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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 현륭원 가는 길, 거리를 다시 측정하다

 

'원행정례'의 편찬을 명한 1789년 9월 18일의 교서에서 정조는 이런 말로 시작했다.

 

“새로 옮겨가는 아버지의 무덤(新園)이 서울과의 거리가 백리를 족히 넘으므로, 매해의 참배를 (영우원이 배봉산에 있던) 예전처럼 하기 어려운 형세이다.”

 

상당히 솔직한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1)에는 서울에서 수원 옛읍치까지의 거리가 88리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수원의 새읍치를 팔달산 아래에 만들기로 하면서 수원의 옛읍치에 만든 현륭원까지 꽤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니 서울의 도성에서 현륭원까지의 거리는 당연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의 88리보다 멀 수밖에 없고, 심하면 100리도 넘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원행정례'에는 전혀 예상 밖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원행정례'에는 과천길을 통할 때 화성행궁과 현륭원까지 65리와 85리로, 시흥길을 통하면 63리와 83리로 나온다. 보면 볼수록 놀랍다. 과천길을 기준으로 삼을 때 첫째, 노들나루를 통하면서. 둘째, 화성행궁를 거치면서. 셋째, 안녕리와 만년제로 돌아가면서 우회하게 만들었음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88리보다도 더 적은 85리로 기록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과천길보다 더 돌아가는 시흥길을 통한 거리가 더 짧기까지 하다.

 

임금과 왕비의 무덤은 서울의 도성에서 10리 밖과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는데, 현륭원이 100리 밖에 있어 신하들이 반대를 하자 정조가 키 큰 장정을 시켜 한 걸음을 크게 잡아 100리 이내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헌 기록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원행정례'에 기록된 이상한 거리 수치를 볼 때 그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기록된 시흥길의 100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88리보다 멀어 꽤 합리적인 수치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실제보다 꽤 적게 측정된 거리일 수 있다.

 

1795년의 원행을묘 때 과천길이 아닌 시흥길을 택한 후 이 참배 길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조선의 임금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왕릉 참배를 지속했는데, 순조(재위: 1800~1834) 때부터 가장 많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히 사도세자의 현륭원과 정조의 건릉 참배다. 그래서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이 참배 길을 조선의 10개 대로(大路) 중의 하나로 기록됐다.

 

시흥길을 새로 개척했다는 말을, 없던 길을 새로 만들었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지만 원래부터 있던 길을 임금이 다닐 수 있게 넓히고 정비한 길이다. 경기도의 남서부, 충청남도, 전라도, 경상도의 서남부 사람들이 서울을 오갈 때 이용한 최단코스의 길은 과천길이었고, 시흥길은 시흥과 안산 2개 고을의 사람들만 이용하여 오갔을 뿐이다. 서울에서 화성행궁까지 동재기나루-과천길을 통하면 70리, 노들나루-시흥길을 통하면 80리인데, 아무리 길을 잘 정비해 놓았어도 굳이 돌아서 갈 사람이 몇이나 있었겠는가?

 

걸어서 다니던 전통 시대, 임금의 행차나 사신의 파견과 같이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하거나 대규모 전쟁 때 상대방의 방어와 공격 전술에 따라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최단코스의 길을 택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이렇게 간단한 역사적 사실까지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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