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대한민국 행정 시스템이 멈춰 서는 사상 초유의 대란 사태가 벌어졌다. 그동안 수없이 자랑해온 ‘정보기술(IT) 강국’ 운운이 이번 화재 사고를 계기로 온 세계에 완전한 헛소리로 비치게 됐다. 단 한 번의 화재로 무너진 정보 안전 대참사를 놓고 정치권은 철부지 ‘네 탓 공방’의 늪에 빠졌고, 당국은 또 한심한 예산 부족 타령이다. 열일 젖혀놓고 ‘정보 시스템 이중화 장치’ 구축에 들어가야 한다. 더 이상 무슨 변명이 필요한가.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 본원에 화재가 발생해 대한민국 행정 시스템이 마비됐다. 대국민 행정 서비스 관련 647개 업무 시스템이 멈추면서 정부 업무 전산망인 ‘온나라시스템’이 먹통이 된 것이다. 국민 일상과 밀접한 무인 민원 발급기와 주민등록증 발급, 정부24 등도 일시에 멈춰 섰다. 인터넷 우편 서비스와 우체국 예금·보험은 중단됐고 모바일 신분증 발급이 안 돼 병원·여객터미널에서도 혼란이 빚어지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이번 사태를 놓고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중화 장치와 대체 장비가 없었던 것이 문제라는 지적을 내놓는다. 전산망은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 냉각 장치 등 모든 구성 요소를 이중화해 한쪽이 마비되더라도 즉시 복구가 가능하도록 설계되는 게 원칙이자 상식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센터 간 백업체계는 있지만, 데이터를 돌릴 장비가 없다”며 “예산이 빠듯했다”고 해명했다. 예산 부족으로 관련 장비 여유분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번 화재의 원인이 2022년 카카오 먹통 사태를 빚은 SK C&C 데이터센터 화재 때와 마찬가지로 리튬이온 배터리였다는 점은 특히나 뼈아픈 대목이다. 데이터센터 화재 발생할 때마다 서버 분산, 실시간 백업체계 구축 등의 대책을 강도 높게 요구하던 정부가 정작 국가 전산망 관리는 엉망으로 하고 있었던 셈이니 참담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유사한 위험 요인을 안고 있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설치 확대 정책을 유지하는 점은 심각한 문제다. ESS는 대부분 열폭주 시 대형화재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높은 리튬이온 배터리를 활용해 전력을 저장한다. 한국전기안전공사에 따르면 2017년 이후 올해 6월까지 ESS 화재는 55건이 발생했다. 배터리 화재는 2020년 292건에서 2023년 359건, 2024년 상반기 296건으로 매년 증가 추세다.
그런데도 정부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2029년까지 2.22GW, 2038년까지 23GW 규모의 장주기 ESS를 도입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화재 방지, 냉각, 자동 차단 장치 등 안전 설비를 갖추지 않고 용량만 늘리면 같은 위험을 키우는 셈”이라고 경고한다.
국회 행안위 소속 의원들은 화재 현장을 둘러보고 피해 복구 상황을 살펴본 뒤 여야가 각각 별도의 현장 브리핑을 통해 상반된 입장을 내놨다. 화재 원인을 두고 더불어민주당은 ‘전 정부의 부실 대응과 예산 문제 때문’이라고 변명한 반면, 국민의힘은 ‘현 정부의 위기 대응 능력 부실’이라고 비판했다. 세상만사를 정쟁거리로 만드는 정치꾼들의 탁월한 능력만 빛나고 있는 셈이다.
2019년과 202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디지털정부 평가에서 2회 연속 종합 1위를 차지한 대한민국의 디지털 선도국 명성이 이번 화재로 통째로 날아가게 생겼다. 땜질식 처방으로 비판 여론이나 가라앉힐 궁리에만 빠지는 습성부터 제발 고쳐야 한다. 정보 안전 시스템은 ‘백업’만으로는 어림없다. 사고 즉시 작동하는 핫 스탠바이 체계가 필요하다. 복구 지연은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치명적이다. 정치권과 정부는 ‘정보 시스템 이중화 장치’와 ‘대체 장비 확보’에 즉각 나서야 한다. 염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문제를 확실히 해결해 국민 걱정부터 덜어놓고, 그다음에나 지지든지 볶든지 해야 할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