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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의 문단 사람들] 민족사에 빛나는 문화의 얼굴, 이어령

 

이어령 선생이 지병으로 타계한 지 벌써 3년 7개월이 지났다. 향년 88세. 참으로 만감이 교차한 순간이었다. 필자는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하면서 선생을 처음 만났고, 선생의 문학에 대해 여러 편의 글을 썼으며,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는 선생을 고문으로 모셨다. 선생과의 만남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3년 4월 '문학수첩' 편집위원으로서 ‘대중문화 인물탐방’ 시리즈 첫 순서로 선생과 함께 한 장장 3시간의 대담이었다. 많은 이들이 선생에 대해 ‘세태를 앞서 읽는 눈과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선언’이 전매특허라고 말한다.

 

1960년대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출발한 선생의 시대 선언 장정(長征)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역설하면서 서막을 열었다. 1970년대의 ‘신바람 문화’는 군사독재 시대에 민족의 열정을 깨우는 목소리로, 1980년대의 ‘벽을 넘어서’는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초대형 국가 이벤트를 이끌며 지구촌의 화합을, 그리고 1990년대의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는 IT강국을 기반으로 한국이 글로벌 정보화 사회의 리더가 되는 길을 제시했다. 2000년대의 ‘디지로그 선언’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문명 융합을 주창한 새로운 시각이었고, 2010년대에 이르러 ‘생명자본주의의 주창’은 한국과 세계를 아울러 문명 인식의 새로운 전환점을 열어 보이는 회심작이었다.

 

일찍이 세익스피어는 백만인의 성격을 지녔다는 수사(修辭)가 있었지만, 선생은 그야말로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인물이었다. 누군가가 재미 삼아 세어보니, 그 직함이 무려 십수 개였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대학 교수, 신문 칼럼니스트, 문화부 장관, 문명비평가, 에세이스트, 시인…. 어느 호칭을 사용해 그를 불러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저술은 무려 200권을 넘었다.

 

그런데 그 저술들이 그냥 책이 아니다. 그의 책들은 그때마다 살아있는 시대의 화두(話頭)가 되었다. 천재성의 필자, 비범한 상상력의 소유자, 겹시각의 황제 등 현란한 수식어들이 그다지 무리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닫혀있는 인식과 세계관의 창을 활짝 열어주는 선각자였다. 기존 문학의 우상을 파괴하고 창의적 시각의 새 길을 열자고 주창했던 그는, 어느결에 그 자신이 하나의 새로운 우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백철·조연현·서정주·김동리 등은 이미 세상에 있지 않지만, 그 또한 후세의 사필(史筆)을 두려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옛 세대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새 세대의 그것은 아직 세워지지 못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더 빛난다. 이 양자를 함께 바라보며 우리가 선 지점의 좌표를 깨우치고,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인도하도록 예정된 예인 등대의 불빛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 누가 있어, 이 겨레의 정체성이 어떠하며 왜 어떤 각오로 무엇을 향해 살아가야 할지를, 그와 같이 드러내 보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이어령이다.

 

1970년대 책 읽는 젊은 대학생들의 가방 속에 꼭 한 권씩 들어 있던 책이 이어령의 에세이였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병사들의 배낭 속에 꼭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숨어 있었듯이. 필자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 젊음을’이나 ‘아들이여 이 산하를’과 같은 제목, 그리고 ‘저 물레에서 운명의 실이’ 등의 레토릭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어쩌면 지성미 충일한 아고라 광장에 갓 들어선 희랍의 젊은이처럼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에세이들의 결정판이 곧 한국인의 풍토(風土)를 다룬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강과 바다가 수백 개 산골 물줄기의 복종을 받는 이유는, 항상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뒤에 있ᅌᅳᆯ 지라도 무게를 느끼지 않게 하며 그들보다 앞에 있ᅌᅳᆯ지라도 그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은, 한 시대의 천재였던 선생을 거울로 하여 오래 되새겨야 할 경계의 말이다. 필자는 선생이 가고 없는 이 허전한 산하, 이 쓸쓸한 문화비평의 마당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아직 생각을 가다듬을 수 없다. 분명한 해답은 그동안 선생이 남겨놓은 언술 속에 충분히 잠복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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