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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의 문단 사람들] 한 역사문학가에 대한 소중한 기억

 

돌이켜 보니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4·19 혁명 56주년이 되던 2016년 4월 19일, 그 역사적인 날에 그야말로 역사적인 한 인물이 유명을 달리했다. 초당(草堂) 신봉승(辛奉承) 선생. 83세의 일기였다. 선생은 ‘국민 사극 작가’로 불린 극작가요, 시·소설·평론·시나리오에 두루 걸쳐 130여 권의 저술을 남긴 광폭(廣幅)의 문인이었다. 그중에 많은 사람이 오래 기억하는 작품은 8년간 지속한 TV 드라마 '조선왕조 5백 년'이었다. 그 가운데는 세조 조의 한명회나 구한말 흥선 대원군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를 비롯하여, 그야말로 볼거리가 즐비했고 화제도 만발했다.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성격이 확정된 역사에 대한 관점의 ‘반란’은 작위적인 의지만으로 가능할 리 없다. 오랜 사료의 검토와 연구, 그리고 역사관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선생은 이 곤고한 역사 학습의 과정을 초인적인 인내와 근면으로 넘겼다. 그는 언필칭 ‘재야의 역사학자’였다. '조선왕조실록'이 국문으로 번역되기 전에 9년에 걸쳐 통독하고 그 500년 역사를 통시적으로 관통하는 눈을 길렀다.

 

여러 곳의 말과 글에서 확인되는 선생의 문학관은 자신의 역사관과 면밀히 결부되어 있다. 그는 역사라는 사실적 골격에 문학이라는 상상력의 치장을 덧입힌 것이 역사문학이라는 명쾌한 논리를 가졌다. 치장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골격을 사실과 다르게 설정하면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그 논리로 그는 춘원 이광수와 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들, 역사적 사실성의 고증을 위반한 작품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동시에 오늘날의 TV 사극들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심하게 이 사실과 상상력의 균형을 훼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멀리하고 있는가를 탄식했다.

 

선생이 보는 당대의 현실 정치도 그와 같았다. 자격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정치 일선에 서 있기 때문에 나라의 모양이 그토록 무질서하다는 것이었는데, 그의 시각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정암 조광조와 같은 선비 정치의 모범이 있었다는 말이다. 600년의 우리 근대사를 한눈에 꿰뚫는 식견이 없이는 내놓기가 쉽지 않은 말하기 방식이다. 바로 이 식견으로 선생은 2012년에 매우 기발하고 뜻있는 책 한 권을 냈다.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라는 책이다.

 

조선조 500년에 명멸한 역사 인물 가운데서, 그 품성과 역량에 비추어 현재 한국 정부를 구성할 ‘드림팀’을 선발한 것이다. 이를테면 대통령에 세종대왕, 국무총리에 이원익, 기획재정부 장관에 이황, 법무부 장관에 최익현, 행정자치부 장관에 이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박지원, 지식경제부 장관에 정약용, 검찰총장에 조광조, 감사원장에 조식과 같은 인재의 선발이다. 우리 근대사의 흐름과 그 경로를 따라 부침(浮沈)한 인물들에 대한 확고한 평가, 또 그에 따른 논증에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글쓰기다. 오늘의 한국 정치인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다. 그런데 기실 선생의 수발(秀拔)한 이력과 업적보다 필자를 더 감동하게 한 대목은 늘 따라 배워야 할 그 사람됨이었고, 임종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던 삶의 길에 대한 신념이었다. 80세가 넘도록 10여 년을 일관한 저술과 강연도 놀라웠다. 해마다 몇 권의 책을 상재하고 150회 이상의 강연을 소화했으니 가위 철인의 면모가 없지 않았다. 더 나아가 선생은 내면의 질적 수준, 곧 철인(哲人)의 풍모를 지닌 지성인이었다. 늘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다짐했고, 후진들에게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름 석 자에 때 묻히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마음껏 높은 정신적 지경을 거닐고 또 아낌없이 자신의 예술과 학문의 재능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던 생애의 줄을 놓고, 선생은 영면에 들었다. 우리 역사의 행간을 탁월하게 읽어내던 그 눈길을 선물처럼 남겨두고 스스로 역사의 행간 속으로 떠났다. 선생을 잃은 것이 특히 슬펐던 이유는 그 창대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창의적 사유의 자산을 함께 잃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선생을 추억하며 그리워할 때마다, 마침내 후대의 역사가 될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중한 마음으로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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