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변치 않고 찾아온 가을이 이제는 점차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가을이 오면 여름의 무더위가 사라지고 맑고 시원한 날씨가 이어진다. 하늘도 더 파랗고 투명해 지면서 청량감을 가져준다. 또 가을은 결실과 수확의 계절이다. 아울러 상념과 그리움, 우수와 고독, 사색과 동경,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처럼 가을은 다양한 형태와 의미, 색조를 가진 계절이다.
가을은 풍성하고 찬란한 계절이다. 계절의 황금기라고들 한다. 내가 사는 용인에서도 벌판에 나가면 잘 익은 누런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군데군데 참새 떼들을 쫓기 위한 허수아비들이 장승처럼 서 있다. 이제는 논두렁길을 가다가 메뚜기 떼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몹시 아쉽다. 시골집 담장에는 빨갛게 익어가는 홍시와 누런 호박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텃밭에서 포도송이가 알알이 영글어가는 풍경도 보인다.
가을은 걷기 좋은 계절이다. 여기저기 가로변과 탄천에는 갸느린 자태의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하양과 연분홍, 짙은 자주색의 꽃잎들이 서로 어울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 길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길이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코스모스 길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해도 좋고 아니면 홀로 고독에 잠겨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또 그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아도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이에 비해 노란 은행나무 길은 좀 더 세련된 도회지 풍의 멋이 난다. 이 길은 깃을 세운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걷는다면 왠지 분위기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창경궁과 덕수궁 돌담길 그리고 과천청사 가로변들이 그런 길이다. 학창 시절 이 코스모스나 은행잎을 책갈피에 꽂아 말리던 기억도 새롭다. 빛바랜 그 드라이플라워를 대할 때마다 지나간 시절의 추억들이 가슴에 새록새록 떠오른다.
가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을 풍경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그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꿈틀거린다. 어느 늦은 가을날, 억새로 뒤덮인 진부령고개를 찾았다. 왠지 모를 감상적인 분위기에 취하여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자그마한 산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다른 투숙객은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뿐이다. 갑자기 이 세상에 나 자신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가을은 상념과 그리움의 계절이다. 또 누군가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은 계절이다. 귀뚜라미 울음 애절한 이 가을밤, 문득 당신 생각이 납니다. 당신과 함께 즐겨듣던 음악을 들으면서, 당신이 즐겨 낭송하던 시를 가만히 읊어 봅니다. “세월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그러나 무엇보다 가을은 낙엽의 계절일 것이다. 품위 있는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뽐내는 국화꽃이 가을을 풍성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역시 가을다운 서정적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하는 것은 낙엽이다. 가을이 되면 불타오르는 듯한 단풍이 우리의 가슴에도 불꽃을 지핀다. 그러나 단풍도 잠깐, 이내 우수수 낙엽이 되어버린다. 이 병든 갈색의 낙엽이 거리를 뒤덮을 때면 마음이 왠지 고독하고 숙연해진다. 그리고 무엇인가 그리워진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지난날의 추억이든...
“지난 시절, 우리는 낙엽 지는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했고, 낙엽 지는 소리에 애간장을 태웠으며, 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낙엽 지는 거리를 걸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북이 쌓인 낙엽 더미에 파묻혀 그 속을 뒹굴어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옛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낙엽을 태우며 지난 추억도 지우렵니다...”
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계절 가을은 머무르는 기간이 너무 짧다. 이렇게 보내기가 서운하고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자연의 가을은 또 다른 가을이 찾아오기에 그 짧음이 더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은 한번 지나면 그만이다. 그래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이 시기가 처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깊어 가는 이 가을날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무엇을 하면서 지내시는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