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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 청파배다리의 표지석, 내용을 너무 축소했다

 

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은 숭례문에서 서울역을 지나고 청파동입구교차로에서 경부선 철도 밑의 쌍굴다리 2차선 도로를 건너 남북 방향 6차선의 청파로를 만난다. 너푸내란 하천과 옛길을 함께 복개하여 만든 도로다. 옛 문헌과 지도에는 한자 蔓(넝쿨 만), 草(풀 초), 川(내 천)의 뜻을 따서 蔓草川(만초천)으로 표기했다.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인왕산의 서남쪽과 안산의 동남쪽 골짜기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흐르다가 원효대교 부근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6차선의 청파로 건너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빌딩 앞에 청파배다리의 표지석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청파배다리 터(靑坡舟橋址) :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과 만초천(蔓草川, 너푸내)이 만나는 지점에 놓였던 돌다리인 청파배다리가 있던 곳이다. 원래는 북쪽으로 300여m 떨어진 철길 위에 있었다.”

 

이 지역은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남대문 정거장, 즉 지금의 서울역이 1900년 7월 8일에 생기면서 옛길과 너푸내의 유로가 꽤 변했다. 너푸내를 건너던 청파배다리의 위치가 북쪽 300여 m 떨어진 철길 위에 있었다는 문구가 그래서 기록됐다. 다만 일제강점기의 1:5만 지형도에는 쌍굴다리 길로 경부선 철길 밑을 지나 청파배다리 표지석 부근에서 너푸내를 건넜다.

 

표지석의 설명 중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과 만초천(너푸내)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표현은 많이 고칠 필요가 있다. 실제보다 내용을 너무 축소했다. 숭례문을 나와 ①경기도 남서부, 충청남도, 전라도, 경상도 서남부를 향한 고을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던 동재기나루 ②경기도의 시흥·안산·인천 고을의 사람들이 건너던 노들나루 ③국가의 조세를 나르던 세곡선이 가장 많이 모이던 항구 용산나루를 오가던 사람들이 이 길을 통했다. 서울 도성에서 지방을 오가는 사방팔방의 길 중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길이다. 그래서 도성 안을 제외하면 이곳보다 많은 사람들이 밟고 건넌 돌다리는 없었다. 그런 사실을 표지석의 지금 설명문만으로는 상상하기 어렵다. 좀 아쉽다.

 

1795년 윤2월 9일, 숭례문을 나온 원행을묘 행렬이 처음으로 만난 다리가 청파배다리(靑坡舟橋)다. 그런데 다른 문헌이나 지도에는 그냥 배다리(舟橋)였고, 『원행정례』에는 청파다리(靑坡橋)로 기록했다. 청파배다리는 노들나루에 배다리가 만들어지면서 구별하기 위해 청파를 붙여서 표기한 것이다. 배다리라 부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전국적으로 흔하진 않아도 꽤 있는 지명이었다.

청파배다리를 지나 작작골(雀雀洞)-돌모루(石隅)란 지명이 오랫동안 길 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구간 어디쯤, 필자가 현재의 위치를 찾지 못한 栗園峴(율원현)이란 한자 지명의 앞길에서 정조 임금은 이렇게 명했다.

 

“백성들이 좁은 옆길(夾路)에서 원행 행렬을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도록 금하지 말라!”

 

안전과 권위에 손상이 갈 수 있음에도 재위 20년 임금으로서의 자신감과 인자함이 넘쳐흐르는 마음의 표현이다. 권위주의 시대 대통령의 행차 시 미리 동원된 사람 말고는 쉽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던 것과 대조된다. 백성과 함께 호흡하고 싶었던 임금 정조, 원행을묘 백리길은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정치를 향한 갈망의 순례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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