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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정의 탐라썰전] 호적 한 줄에 담긴 70년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70여 년이 걸린 사람이 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 인구 10분의 1을 앗아간 4·3, 그 비극의 한가운데서 태어난 고계순 씨의 이야기다.

 

올해 일흔일곱인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의 딸이었던 적이 없다. 호적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1948년 6월 제주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신고가 이뤄지기도 전인 그해 12월, 아버지 고석보 씨를 잃었다. 남겨진 가족은 갓난아이의 호적을 작은아버지 밑에 올렸다. 4·3 희생자의 유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불이익이 닥칠지 모를 시대였다.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마저 지워야 했다. 다만 작은아버지는 족보에만큼은 고계순 씨를 친아버지 밑에 올려놓았다. 호적에서 지운 이름을 족보에서라도 지키려 한 것이다.

 

우리는 이 비극을 흔히 이념 갈등이나 국가폭력이라는 무거운 틀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틀 안에는 갓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 석 자조차 물려받지 못한 삶이 있다. 역사는 숫자로 기록되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빼앗긴 어린 시절이다.

 

지난 2월, 고계순 씨는 70여 년 만에 아버지의 딸로 돌아왔다. 제주4·3위원회가 "고계순은 희생자 망 고석보의 친생자임을 인지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4·3으로 뒤틀린 가족관계를 국가가 바로잡은 첫 사례다.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 한 장 없이 이름을 글로 써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도 한시도 잊은 적은 없다. 결정서를 받아 든 고계순 씨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날 같은 결정을 받은 이는 모두 네 명. 왜 이토록 오래 걸렸을까.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없으니 유전자 검사가 불가능했고, 기존 법으로는 친자관계를 증명할 길 자체가 막혀 있었다. 2021년 특별법 개정으로 특례 규정이 만들어지고, 대법원 규칙과 시행령이 정비된 뒤에야 비로소 신청의 문이 열렸다. 법을 고치고, 규칙을 만들고, 신청을 받고, 조사를 마치기까지 또다시 수년이 흘렀다.

 

가족관계 정정 신청은 499건, 아직 갈 길이 멀다. 신청 기한은 2026년 8월 말.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어머니의 이름을 되찾지 못한 채 침묵하고 있는 이가 있을 것이다.

 

호적에서 이름이 지워진 이도 있지만, 가족도 없는 타지에서 영문도 모른 채 잠들어 있던 이도 있다. 주정공장수용소에서 한 차례 면회를 끝으로 소식이 끊긴 이도 있고, 토벌대에 연행돼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는 소문만 남은 이도 있다. 가족들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수십 년을 보냈다. 올해에도 4·3 당시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다섯 분의 유해가 대전과 경산에서 발굴돼 70여 년 만에 제주로 돌아왔다. 유해를 맞은 손자는 "하르방 고향에 왔수다, 펜안햅써(할아버지 고향에 왔어요. 편안하십시오)"라고 했다.

 

오는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제78주년 추념식이 열린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후 처음 맞는 추념식이다. 그 자리에서 고계순 씨의 사연이 소개된다. 아버지의 딸로 돌아오기까지 70년이 걸린 한 사람의 이야기. 4·3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호적 한 줄 바로잡지 못한 채 살아온,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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