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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공연] 수원시립공연단의 올 시즌 시작의 한판, 승부수는 연극 '십번기'

3~5일, 바둑 매개체로 한 제29회 정기공연 성료
수원 출신 작가 해이수의 동명 소설 원작으로 해
두 주인공의 사랑, 성장, 시간의 축적 섬세한 표현

 

"일단 시작되면 두 사람 외에는 끼어들 수 없는 것."

 

"바둑과 사랑은 서로 마주보며 하는 것."

 

지난 주말,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도 뜨거운 승부가 관객들의 환호 속에 막을 내렸다. 

 

수원시립공연단은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정조테마공연장에서 제29회 정기공연 연극 '십번기'를 선보였다.

 

이번 작품은 수원 출신 작가 해이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바둑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두고 사랑과 성장 그리고 시간의 축적을 섬세하게 풀어냈다. 

 

'십번기'는 두 사람이 10판을 이어 두며 실력을 겨루는 장기 매치 형식으로, 극에서는 단순한 승부를 넘어 두 인물의 관계와 내면을 드러내는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야기는 2002년 장안일보 편집실에서 출발한다. 

 

어느새 기자로 성장한 훈이 무용 공연 취재를 맡으며 과거와 조우하고, 시간은 1987년 남문중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대 위 격자무늬 바둑판은 이들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구현하며, 첫 만남부터 이어지는 관계의 궤적을 시각적으로 환기한다.

 

밝고 명랑한 모습 뒤에 아픈 가정사를 숨기고 있는 연희와 바둑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훈은 서로를 통해 성장해간다. 

 

두 사람은 ‘십번기’를 이어가며 감정을 축적하고, 그 과정에서 각자의 상처와 욕망을 직면한다.

 

"4의 四. 16의 四. 6의 十七. 4의 十"라는 암호 같은 대사는 이들의 시간을 연결하는 매개이자, 기억을 환기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연희가 가정사로 미국으로 떠난 이후에도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관계를 이어간다. 물리적으로는 멀어졌지만, 바둑이라는 공통의 언어는 단절되지 않는다. 

 

"우리의 십번기 마지막 한판. 나는 어디에 승부수를 두어야 할까."

 

마지막 대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느리지만 치열하게 축적된 시간의 밀도를 보여준다. 

 

15년 뒤 2002년, 경기도문화의전당 대극장에서 수석 무용수와 기자로 재회한 두 사람은 마침내 '십번기'를 완성하며 서사의 매듭을 짓는다.

 

연출은 비교적 절제된 방식 속에서 효과를 극대화한다. 

 

8개의 이동식 플랫은 장면 전환과 시간 이동을 유연하게 수행하며, 무대 위에 다층적인 공간을 형성한다. 

 

플랫의 배치와 이동은 단순한 장치 활용을 넘어 서사의 흐름과 긴밀히 결합돼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오간다.

 

 

조명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사각형 구조의 조명은 크기와 채도를 조절하며 공간을 분리하고, 특정 순간을 강조한다. 


특히 두 인물만 존재하는 바둑의 세계를 구현하는 장면에서는 조명이 시간의 정지 상태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몰입도를 높인다.

 

대국 장면에서의 연출은 인상적이다. 

 

문이 열리듯 시작되는 '십번기' 장면은 주황, 파랑, 초록 등 원색 조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극의 리듬을 끌어올린다. 

 

무용수들의 동선과 맞물려 회전하는 플랫, 박자감 있는 음악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시각적·청각적 밀도를 강화한다. 

 

 

흑과 백으로 대비되는 인물과 움직임은 바둑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며, 작품의 주제 의식을 명확히 한다.

 

1980년대의 시대성을 반영한 연출은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레트로 의상과 당시 유행어, 음악은 향수를 자극하는 동시에 코믹한 장면을 형성해 서사의 무게를 조절한다. 

 

결국 '십번기'는 승패를 가르는 게임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쌓아온 시간의 기록이다. 

 

과거의 장면들이 흑백사진처럼 겹쳐지며 이어지는 연출은 기억의 층위를 차분하게 환기한다.

 

서로의 편견과 장애를 넘어 마주 선 두 사람은, 하나의 바둑판 위에서 각자의 삶과 감정을 완성해간다.

 

그들의 '십번기'는 끝이 아닌 서로를 향해 내딛은 시간의 수였다. 느리지만 깊게 축적된 그 여정은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관객에게 긴 여운을 전하며 막을 내렸다.

 

[ 경기신문 = 서혜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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