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의 핵심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은 초기 대승 경전의 대표적 경전으로 공 사상(空 思想)의 창고라고 할 만큼 불교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고 있다. 금강경의 한역본(漢譯本)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대표적인 금강경으로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서기 402년에 산스크리트어의 경전을 번역한 ‘금강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 있다. 이는 금강경 중에 가장 먼저 번역되어 나온 경전이기도 하지만, 구마라습의 번역문장이 매우 유려하기 때문에 많이 독송 되어 왔다. 금강경은 부처님과 제자 수보리(須菩提)의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부처님은 수보리를 통하여 사물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집착을 끊으라고 설법하셨는데 이 말은 중생으로 하여금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더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적극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한 가르침이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내가 이와같이 들었다)”으로 시작하여 수보리는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최고의 진리를 배우고 닦으려는 마음을 낸 선남선녀는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 이렇게 주요한 가르침은 수보리의 질문과 부처님의 대답으로 엮어지고 있
‘대학(大學)’은 BC 43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작자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후한 때의 경학자인 가규(賈逵)에 의하면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가학(家學)의 민멸(泯滅)을 우려하여 ‘대학’을 지어 경(經)으로 하고, ‘중용’을 지어 위(緯)로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정치철학과 유학(儒學)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경전이다. 그래서 ‘대학’은 천하를 이끄는 군주나 위정자(爲政者)가 익혀야 할 학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전문(全文)이 1천750여 자(字)의 짧은 글이지만, 송나라 때에 주자학이 일어나면서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맹자(孟子)’ 순으로 불리듯 ‘사서(四書)’의 필두에 자리하고 있다. 주자가 쓴 대학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大學(대학)이란 책은 옛날 태학(太學)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법(法)이다. 하늘이 백성을 내렸을 때부터 이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을 부여(賦與)해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마다 기질(氣質)을 품수 받은 것이 혹 같을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모두 그 본성에 지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알아 그 성품을 사람마다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
지구상에서 전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길고,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지금도 총성과 포연(砲煙)이 멈추지 않고 있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시대와 국가를 변화시킨 예가 허다하다. 가깝게 우리의 분단과 전쟁만 보더라도, 6·25 사변이 겨레의 삶과 심성에 끼친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고 문학사적으로도 예외 없이 걸출한 작품들이 그로부터 나온 것은 열거할 나위도 없이 많다. 전쟁문학의 역사는 유구하고 면면(綿綿)하다. 서구문학의 시원(始原)에 자리한 ‘일리아드’부터가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그린 서사시다. 그래서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은 문학적으로 소재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한다. 이제 전쟁 체험 세대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기억조차 아스라해지면서 어느덧 한국문학에서 전쟁 이야기는 희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 외적으로는, 올해로 6·25가 발발한 지 70년이 되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현재도 적과 대치 중인 세계 유일의 나라이다. 시간의 흐름만큼 전쟁을 겪은 나라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하여 70년 전의 참상은 문학속에서나마 그 실상을 더듬어 볼 정도이다. “전쟁은 지옥이다. 그렇지만 그 표현만으로는 전쟁을 설명
『독립정신』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쓴 책으로 융희사년(1910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대동신서관에서 펴냈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조선의 정치제도에 대하여 왕정제를 없애고 공화정으로 바꿀 것 등을 주창하다가 1899년 박영효 등과 반역죄로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이때 옥중에서 쓴 저술이다. 그는 서문에서 ‘한성감옥에 투옥되어 있을 때 거적자리와 착고(죄인에게 씌우는 형틀)밑에 감춰가며 원고를 썼고 석방된 뒤 감시의 눈을 피해 1905년에 다른 사람의 트렁크 밑에 감춰서 태평양을 건너 미국이라는 자유 세계에서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출간된 지 110년이 지났으나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저자인 이승만은 외교사적으로 뛰어난 독립운동가면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이지만 정권에 따라 공과(功過)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는 3·1 독립선언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15년 전 뿌리인 『독립정신』을 외면해 온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근대 독립국가 건설의 큰 비전을 담고 있는 큰 저술이며 역사적 텍스트이기에 더욱 그러하
5월 21일은 부부의 날로 지정된 기념일이다. 2007년도에 법정 기념일로 정해졌는데 ‘둘이 하나 되는 것’이 부부라 하여 21일로 정했다 하니 부부의 의미를 숫자로 잘 정의했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복잡하고 다양하게 진화된 사회구조에서 부부의 관계와 의미를 숫자 하나로 단순히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부란 인륜의 원천이며 사회구성의 시작이기 때문에 ‘둘이 하나 되는 것’으로 정의한 21일은 지당한 발상이다. 그렇다면 과연 부부란 무엇인가? 필자는 430여 년 전에 망자(亡者)의 아내가 쓴 한 통의 편지에서 부부란 무엇인가를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내샹해날려닐오 (자네는 항상 내게 말하기를)’로 시작하는 이 편지는 수신자가 ‘워니 아바님께’로 하여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에 쓰인 것으로 되어있다. 죽은 남편을 매장할 때 관속에 함께 넣은 아내의 한글 편지인데 1998년, 택지개발이 한창이던 경북 안동시에 소재한 정상동의 언덕 기슭에서 이름 모를 무덤을 이장하던 중에 관속에서 발견된 수습유물 가운데 하나다. 유물 분석결과, 무덤의 주인은 고성이씨(固城李氏) 응태(應台)이며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둘 사이에 ‘원이’라는 아이가 있었던 것으로
5월은 가정의 달이다. 1년 내내 가정의 소중함이 더하고 덜한 날은 없겠지만 5월 한 달만 이라도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돌아보자는 취지로 지정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5월에 는 5일 어린이날과 8일 어버이날이 있고, 15일 스승의 날과 21일 부부의 날이 있다. 그 기념일 가운데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기리고자 하여 제정한 날이 어버이 날이다. 효(孝)는 시대나 사상을 막론하고 인간의 도리로서 가장 우선시 되어 온 가치이다. 『부모은중경』은 불교 경전의 하나로 원전(原典)은 중국 수(隋)나라 말에서 당나라 초기에 간행되어 전래 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말 이후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널리 유통되었다. 그중의 하나가 보물 제705호로 지정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인데 삼성리움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는 호암본으로 1378년(戊午, 우왕 4)에 간행된 판본이다. 이 외에도 많은 보물급 이본(異本)이 있고 대부분 판화가 수록되어 있어서 글을 모르는 일반인도 대략 내용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여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경전이다. 유교의 『효경(孝經)』과 더불어 비교되는 경전이며 특히 효도를 강
전국책은(戰國策)은 전국(戰國)시대(BC.403~BC.221) 즉, 진(晉)나라가 삼국(三國)으로 나눠진 시점부터 진(秦)에 의해 전국(全國)이 통일될 때까지 약 180년간의 기록이다. 일반 역사서와는 달리 왕이나 세가들의 역사가 아니라 종횡가(縱橫家)들의 언설(言說)과 책략들을 국가별로 기록한 책이다. 이 시기는 각국이 서로 패권을 다투던 때였으므로 위나라와 같은 소국(小國)은 물론 진(秦), 초(礎)와 같은 대국(大國)에서도 부국강병책으로 천하의 패자(覇者)를 꿈꾸거나 생존의 수단으로 난국을 타개하는 것을 우선하던 때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종횡가들이 나타나 천하를 누비며 각국의 군주에게 자신의 외교술과 책략을 받아들여야 부국강병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변설과 권모술수가 난무하였다. 이 책은 전한(前漢) 시대에 유향(劉向)이 각 나라별로 33편의 술책들을 모아 정리하였는데 후대에 많은 주석가들이 차례로 주석을 달아 오늘날 전해져 오고 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팔고자 마(馬)시장에 내놓았으나 며칠이 지나도 팔리지 않았다. 누구도 그 말이 준마(駿馬)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백락(伯樂)을 찾아가 이렇게 부탁하였다. “제가 준마를 팔려고 며칠
허생전(許生傳)은 연암 박지원의 문집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수록된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있는 한문소설이다. 이 이야기는 연암이 중국에 연경사절단(燕京使節團)으로 가서 열하로부터 북경으로 돌아오던 중에 옥갑(玉匣)이라는 곳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동행했던 여러 비장(裨將)들과 주고받은 설화(說話)들을 이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지은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박지원이 중국에 다녀온 것이 1780년(정조4)이고 열하일기를 기술한 것이 1793년이므로 이 허생전도 그때쯤 쓴 것으로 보인다. <연암집(燕巖集)>은 박지원이 죽은 후에 아들 종채(宗采)가 편집한 57권 18책의 필사본으로 전해져 왔는데 그중 별집에 있는 열하일기 중 <옥갑야화>에 있는 허생전 이야기는 본래 제목이 없이 한 부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편의상<허생> 또는 <허생전>이라 부른다. 이 이야기는 실학 사상가인 연암이 허생이라는 일사(逸士)를 동원하여 주인공이 벌이는 상행위를 통해 18세기 당시 허약한 국가의 경제구조를 비판하고 양반들의 무능함과 허위적인 의식을 풍자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대강 한양 남산골에 사는 허생이라는 선비가
한비자(韓非子)는 기원전 230년경에 한비(韓非)가 쓴 법가사상(法家思想)의 이론과 그의 후학들이 정리한 논저로 55편 20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비자의 법가사상은 진나라 시황제에게 제공한 반(反) 유가(儒家)의 선봉이자 법가 이론의 총괄서로 평가받는다. 원래 한비(韓非)는 한자(韓子)라고 불렸으나 당나라 때 유가(儒家)의 석학인 한유(韓愈)도 한자(韓子)로 불리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한비자로 구분하게 되었으며 저서 또한 그의 이름을 따서 한비자(韓非子)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비자는 전국시대 한(韓)나라 귀족 출신으로 유가사상(儒家思想)을 전수받은 순자(荀子)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나, 약소국이었던 한(韓)나라의 한계와 봉건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유가사상을 승계하지 않고 법가의 사상을 따르게 되었고, 그의 법가사상은 후에 진시황에 의하여 정치원리로 받아들여졌다. 전국시대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심했던 혼돈의 시대로 구분되고 있으나 역설적이게도 사상적으로는 황금기이기도 하다. 제자백가라고 하는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서로 다투어 자기의 설(說)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한다. 이들 여러 설(說)가운데 가장 정치적으로 비중이 있고 영향을
‘명심보감’은 고려 충렬왕 때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추적(秋適)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적이 국학교수(國學敎授)로 재임하면서 이 책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말씀과 여러 전적(典籍)에서 좋은 내용들을 발췌하고 유불선(儒佛仙)의 사상을 망라하였다. 이 책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명나라 때 범입본(范立本)이라는 사람이 추적(秋適)이 발췌하지 못한 전적(典籍)의 문구를 추가하여 ‘증편 명심보감’을 편찬하였다. 이런 이유로 명심보감의 저자가 중국의 범입본이라는 논란이 있었던 적도 있으나 추적이 만든 ‘명심보감초’는 범입본의 증편 명심보감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서 교재로 채택되고 초학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다. 아이들이 글을 접하게 되면 처음에는 천자문 등으로 글자를 익히게 하고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전에 명심보감을 읽게 했다. 글보다는 먼저 양심을 기르고 인간의 도리를 배우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인격 도야의 기본 수양도서가 되다보니 1305년 처음 편찬된 이후 우리나라인 고려, 조선은 물론 중국, 일본, 월남 등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국가에 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