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영화를 잘 안 보는 사람들이라도 한 번은 들어 봤고 또 한 번 정도는 봤었을법한 영화가 홍콩 왕가위의 작품들이다. 그의 초기작 ‘열혈남아’와 ‘아비정전’, ‘중경삼림’과 ‘동사서독’ ‘타락천사, 또 ‘화양연화’와 ‘해피투게더’, ‘2046’을 거쳐 비교적 최근에 속하는 2013년작 ‘일대종사’ 까지, 왕가위의 영화들은 희대의 걸작들이다. ‘일대종사’ 이후 그는 연출을 하지 않고 있는데 풍문에 따르면 그 역시 TV 드라마를 시작하려 한다고 한다. 뭐라? 왕가위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상실과 공허의 정서 때문이다. 왕가위의 영화들에는 늘 이별이 있고 사람들의 관계는 항상 이어지지 못한다. 사람들의 일상은 파편적이며 목적을 찾기가 힘든 모습들이다. 그저 실존의 아픔을 견디며 고독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반복해 간다. 그런 왕가위의 작품들을 보는 사람들은 영화가 주는 ‘작위적인 행복’ 보다 ‘리얼한 불행’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왕가위의 영화는 머리는 어둡되 가슴은 촉촉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왕가위의 지성은 늘 비관적이지만 의지는 그래도 약간이나마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왕가위가 그렇게 된 데에는 홍콩의 역사와 정치가 깊이 연관돼 있다. 왕가위
호주에서 온 영화 ‘드라이, The Dry’는 가물고 건조한 내용의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상당 부분이 호주의 말라붙은 땅을 그려내는 데 주력한다. 키와라(가상 도시)라는 지방에 320여 일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다. 계곡과 들판 모두가 다 말라붙었다. 사람들도 그렇다. 모두들 대체로 삐쩍 마른 데다 영혼마저 건조해졌다(실제로 호주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극심한 가뭄과 엄청난 홍수를 반복하는 기후변화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제인 하퍼의 동명 원작 소설은 2016년에 나왔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물이 흐르지 않는다. 다들 고립돼, 무미하고 건조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터진다. 루크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자신의 아내인 카렌과 아들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다. 멜버른에 있는 루크의 친구이자 민완형사인 주인공 애론(에릭 바나)은 장례식에 와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루크의 아버지는 애론에게 “루크는 내게 거짓말을 했어. 너도 내게 거짓말을 했어”라는 묘한 내용의 쪽지를 보낸다. 진실 역시 말라붙었다. 계곡 사이로 흘러야 할 진실의 강은 메마른 지 오래다. 사건 현장을 지나친 것으로 알려져 용
인기 작가 천명관이 ‘용감하게’ 감독한 영화 ‘뜨거운 피’는 안타깝게도 극장에서 홀대를 받고 있다. 그의 데뷔는 처절할 만큼 천대받고 있다. 그런데 꼭 그럴 작품은 아니다. 물론 솔직하게 얘기하면 ‘뜨거운 피’는 썩 잘 만든 작품은 아니다. 할리우드 갱스터 무비, 일본의 야쿠자 영화들에게서 느껴지는 ‘어깨 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소설가 출신이어서인지(이야기꾼의 수다가 많아서인지) 영화가 전체적으로 불균질한 느낌을 준다. 그건 그가 워낙 서사에 ‘미련’이 많고, 그러다 보니 에피소드를 층층이 쌓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러다 보니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복잡하다. 아주아주 복잡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중간에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형국의 이야기야’라고 볼멘소리를 할 법도 하다. 예컨대 주인공 희수(정우)와 동거녀인 인숙(윤지혜)의 관계 같은 것이다. 희수는 인숙을 연모한다. 인숙은 한때 원룸을 다니며 몸을 팔았고 그 와중에 애를 낳았다. 그녀의 문제 많은 아들이자, 희수에게 의사(擬似) 부자 관계를 갖게 하는 양아치 건달인 아미(이홍내)는 끊임없이 전체 이야기 속으로 들락날락한다. 아미야말로 사실은 희수
일본 조총련계 동포 감독 양영희의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국내에선 아직 개봉되지 않았다. 지난해 DMZ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으며 얼마 전 '4·3과 친구들' 이란 특별상영회에서 소수 관객들에게 소개됐다. 짐작하듯이 4·3 제주항쟁에 대한 얘기이다. 아주 적은 폭의 관객들에게만 알려졌지만 작품 내용이 갖는 ‘참담함의 감동’에 대해 입소문이 퍼져서 인지 많이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꽤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영희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보다 면밀하게 얘기하면 자신의 엄마 강영희 씨의 삶을 가족의 시선으로 그려 나간 작품이다. 강영희 씨는 제주 애월면 하귀리 출신이다. 영화의 시작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강영희 씨가 딸에게 중얼중얼 무언가를 얘기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보이는 사람들은 무조건 죽였어. 총으로 쏴서도 죽이고 아버지 앞에서 애를 칼로 찔러 죽이기도 했어. 눈앞에서 애가 죽은 남자는 눈이 돌아가서는 니들도 인간이냐고 비명을 질렀지. 그리고 그 남자도 죽었지. 그땐 다 그랬어. 진짜 무서웠어.” 강영희 씨는 눈앞에서 목격한 4·3 학살 장면을 딸에게 얘기한다. 그녀는 자
영화를 보기 전에는 ‘패러렐 마더스’의 제목을 어떻게 우리말로 옮기면 좋을까, 최소한 의역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했다. ‘평행 엄마들?’ 아 근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것이 두 명의 엄마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은 1936년의 스페인 내전을 말하고자 함이며 거기에 엄마 두 명의 에피소드를 얹혀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엄연히 이것은 우주 평행 이론 급에 해당한다. 과거의 일, 그 뿌리가 지금 현재 두 명의 여성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한 얘기다. 여성이 유린당하고 여성성이 파괴되는 일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 안에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 그것이 평행이론이고 또 그렇다면 이 영화의 평행성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냥 영어 제목을 쓰는 것이 낫게 된다. 제목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영화는 그 순간 확 이해가 되면서도 동시에 약간 실망감을 느끼게도 되는데 그건 순전히 이 작품을 만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탓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지금껏 이렇게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모티프를 자신의 영화에 섞은 적이 없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답지 않다. 알모도바르가 찍은 것 같지가 않다. 알모도바르는 지
영화 ‘스펜서’는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이야기다. 그녀의 성이 스펜서이다. 스펜서 백작 가문의 집안이라는 얘기다. 스펜서 집안은 스튜어트 왕가의 후손이다. 스튜어트 왕조라면 몇 년 전 영화로 나왔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생각하면 된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앤 여왕이었으며 앤은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앤 여왕 다음으로 하노버 왕조가 이어지고 그다음이 지금 엘리자베스 여왕이 제위(帝位) 중인 윈저 왕조로 연결된다. 윈저 가문은 끊임없는 유명세 혹은 구설을 낳았다. 조지 5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이라는 이혼녀를 사랑해서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린 일이나, 그 뒤를 이은 에드워드의 동생 조지 6세가 말더듬 장애를 이기고 처칠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극복한 이야기(영화 ‘킹스 스피치’) 등이 그렇다. 어쨌든 다이애나는 이런저런 왕가가 죽 내려와서 현대에 정착한 윈저가의 며느리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제목이 ‘윈저’가 아니라 ‘스펜서’인 것은 다이애나가 찰스 윈저의 아내이거나 윈저 가문의 한 사람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만의 독립체로서 죽었다는 것이며, 그녀가 그러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이 모든 것이 ‘그 놈의’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도끼로 암살한 것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트로츠키의 주장처럼 사회주의는 영구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끊임없이 민주적 과정을 거쳐 일신하고 또 일신해야 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죽이면서까지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굳혔다. 일국 사회주의 노선은 사회주의의 이상 자체를 말살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해방운동이 이것 때문에 변질됐다. 인간의 얼굴을 해야 할 사회주의가 늑대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됐다.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의 성과를 내기 위해 급격한 공업화 우선 정책을 폈고 그것을 위해서는 농산품 수출이 필요했는데 당시 소련으로서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그 방법으로 밖에는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농산품 수출을 위한 식량 조달은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를 갈취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스탈린의 이 ‘강도’ 행위로 우크라이나 인민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홀모도모르 사태다. 영화 '미스터 존'은 그 부분만을 뚝 떼어 내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이러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그 원한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다. 당연히 친러파보
레벤느망은 우리말로 사건이다. 영어로 event, happening으로 나와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accident가 맞다. 사고다. 영화 ‘레벤느망’의 주인공 안느 뒤신(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은 영화 속에서 사고를 당한다. 뜻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임신이라는 사고. 그녀는 이 사고 때문에 거의 죽을 뻔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임신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 안느가 1940년에 출생했다는 점, 이야기가 벌어지던 때는 그녀가 23살이니까 현재 (우리 식으로) 1964년이고 배경은 프랑스라는 점이다. 이때 프랑스뿐만 아니라 거의 전 세계적으로도 중절 수술이 불법화돼 있었던 때이다. 물론 지금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시대와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이슈는 여성 인권의 사안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그 금지의 수위를 낮춰 왔다. 가톨릭에서는 여전히 태아를 죽이는 일을 살인 행위로 간주한다. 우리나라는 2019년에 이르러서야 기존 낙태죄를 폐지하면서 임신중절의 합법화 길을 열었다. 여성 스스로 자기 결정권에 의해 임신 14주 이내에는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레벤느망’에서 안느는 임신 10주째 돼서, 불법으로 낙태 수술을 해 주는 非의사에게서 아기를 뗀다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그렇게 명료하지가 않다. 분위기와 몇 개의 장면들이 마치 환등기(幻燈機)의 슬라이드 마냥 한 장 한 장씩 기억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화적으로 사람들에게 있어 유년기란, 풀 숏이나 부감 숏 그리고 롱 숏으로 기억된다. 게다가 비교적 롱 테이크들이다. 클로즈업으로 떠오르는 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 정도다. 케네스 브래너의 위대한 역작 ‘벨파스트’가 딱 그렇다. 이 영화가 초반에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흑백과 롱 숏&롱 테이크와 풀 숏 위주로 촬영돼 있기 때문이다. 아홉 살 버디(주드 힐)의 엄마(케이트리오나 발피)의 자태가 꽤나 그윽한 데다 여전히 예뻐 보이는데도 얼굴은 잘 안 보이게 찍혀 있다. 자나 깨나 아들 둘 걱정에 남편과 가정의 앞날에 대한 시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엄마의 표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제대로 잡히기 시작한다. 영화 ‘벨파스트’는 1969년의 벨파스트 사태, 흔히들 북아일랜드 분쟁이라 불리는 극심한 내전의 상황이 배경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핏빛 전투와 테러, 폭탄과 총탄이 난무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벨파스트 어느 동네의 한가로운 모
영화와 예술은 공교롭게도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먹고 자란다. 영화는 밝은 시대보다는 어두운 시대에 더 잘 되는 경향이 있다. 아니 그보다는 어두운 상황에 대한 얘기를 더 잘하는 경향이 있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그랬다. 한국사회가 문재인 정부 하에서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심하게 곪아 있고 또 그렇게 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줬다. 그건 신자유주의가 심화된 때문이고 한국 자본주의가 극도의 천민화, 양극화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문재인 이전 이미 9년 동안 진행돼 왔었다. '기생충’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 모두 이러다가 비극적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적 드라마로 등극한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다. 극중 인물인 1번 노인을 통해 이 드라마는 보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러다가 우리 다 죽어!” 영화가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은 그러나, 한 템포 정도 약간 늦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영화는 대체적으로 3년이나 4년, 늦으면 5~6년 전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러니까 ‘기생충’은 박근혜 시절이 계속됐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가를 보여줬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