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일본 조총련계 동포 감독 양영희의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국내에선 아직 개봉되지 않았다. 지난해 DMZ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으며 얼마 전 '4·3과 친구들' 이란 특별상영회에서 소수 관객들에게 소개됐다. 짐작하듯이 4·3 제주항쟁에 대한 얘기이다. 아주 적은 폭의 관객들에게만 알려졌지만 작품 내용이 갖는 ‘참담함의 감동’에 대해 입소문이 퍼져서 인지 많이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꽤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영희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보다 면밀하게 얘기하면 자신의 엄마 강영희 씨의 삶을 가족의 시선으로 그려 나간 작품이다. 강영희 씨는 제주 애월면 하귀리 출신이다. 영화의 시작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강영희 씨가 딸에게 중얼중얼 무언가를 얘기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보이는 사람들은 무조건 죽였어. 총으로 쏴서도 죽이고 아버지 앞에서 애를 칼로 찔러 죽이기도 했어. 눈앞에서 애가 죽은 남자는 눈이 돌아가서는 니들도 인간이냐고 비명을 질렀지. 그리고 그 남자도 죽었지. 그땐 다 그랬어. 진짜 무서웠어.” 강영희 씨는 눈앞에서 목격한 4·3 학살 장면을 딸에게 얘기한다. 그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자 곧바로 남동생과 3살 된 여동생을 들쳐 업고 군경의 눈을 피해 오사카로 밀항을 한다. 그녀가 재일동포가 된 이유이다. 약혼자는 사살당했다. 일본으로 간 강영희 여사는 역시 제주도 출신의 조총련계 활동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3남 1녀를 낳는다. 그리고 친북인사가 된다. 남편과 강영희 씨 부부는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북송 사업에 적극 참여한다. 아들 셋을 모두 북한으로 보낸다. 그때부터 시작해 수십 년간, 바로 얼마 전까지 북한에 있는 자기 ‘새끼들’을 위해 꼬박꼬박 돈과 현물을 보내고 있다. 북한 북송사업의 비극을 겪고 있는 ‘산증인’이 된 셈이다. 영화감독 양영희는 이 모든 과정을 지금껏 평생을 거쳐(그녀는 1964년생이다.) 영화로 담아 왔다. 북송사업의 이면이 갖는 북한의 추악성에 대해서는 극영화 ‘가족의 나라’라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북한의 폐쇄성이 갖는 비인간성에 대해서도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등 두 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흔히들 양영희의 북한 3부작이라고 부른다. 양영희 감독은 북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남한에 대해서도 너그럽지는 않다. 그녀는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부르며 국가가 인간에게 저지르는 이른바 ‘국가 폭력’에 대해 면도날 같은 비판의 칼날을 내세운다. 그런데 그 비판의 방식이 철저하게 ‘내재적(內在的)’이다. 일단 그 안의 역사 정치 사회에 대한 분석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과거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독일의 정치철학자 송두율이다. 남한의 비민주적 정부와 일부 극우보수 신문이 그를 북한 노동당 서열 몇 위의 인사라는 둥 과장 보도를 일삼아 영원히 이 땅을 떠나게 한 적이 있다. 양영희도 비슷하다. 그녀는 일단 북한에서 그런 취급을 받는다. 그녀는 북한에 입국이 금지된 상태이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보고 있으면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상황’들, 양영희와 양영희 가족에게만 한정해도 정말 이해가 불가한 상황들이 벌어진 모든 원초(原初)는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이다. 1947년 4월 3일 제주에서 시작된 소요사태는 6·25 전쟁을 거쳐 1954년까지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괴(怪) 단체 가벌인 민간인에 대한 토벌 작전으로 이어졌다. 무려 7년간. 그런데 그건 작전이라기보다는 만행이었다. 군경 토벌대는 아이들까지 싹 죽이는, 일종의 인종청소를 저질렀다. 이 일로 제주도민 3만 명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상이 서북청년단의 일원이었으며 죽기 전까지 교회를 다니던 열렬한 신도였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다니는 서울의 한 대형 교회는 서북청년단이 세운 교회이다. 이들은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를 앞세우며 반공의 기치로 남한 사회의 민주 인사들을 빨갱이로 모는 데 앞장선다. 그런데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소속 목사들이 벌이는 설교를 통해서이다. 한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이 1960년대에 벌인 북송사업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일부 전위부대가 일으킨 정변과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세운 정권들이 흔히들 자행한 오류 중의 하나였다. 자본주의를 거치지 못한 사회주의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극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사회의 물적 토대가 극히 희박한 것이다. 사회주의 독재정권들은 이를 주변 나라의 수탈을 통해 피해 가려했다. 스탈린이 우크라이나를 대상을 벌인 식량 갈취 정책은 3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기근으로 죽게 했다. 이른바 ‘홀로도모르’ 사건이다. 북한도 전쟁 직후 급격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는데 그중 하나가 ‘인간의 노동력’이었다. 북송사업은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게다가 인간이 딸려 오면 일본에 있는 돈과 물자가 같이 온다. 일석이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의 낙원을 만든다는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을 공감하게 해 수프까지 만들어 보내게 한 셈이다. 당시의 시점으로 보면 ‘신박한’ 아이디어였을 수 있었으나 결국 자신의 인민들을 위해 다른 나라의 인민들을 착취한, 제국주의적 약탈의 수법이었다. 사회주의는 실로 뼈아프고 몰지각한 실수를 저질러 왔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고 침략을 일삼는다고, 그래서 일국(一國)의 사회주의만이라도 지키겠다고 자본주의의 못된 습성을 답습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사회주의는 그렇게 끝이 난 셈이다.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안에는 이 모든 지리멸렬한 역사의 과정이 흐르고 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하며 그 시작이 4·3 항쟁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이다. 그런데 얼마 전 대통령 당선자라는 사람이 그 위령제에 지각을 했다. 팔을 훠이훠이 휘저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묵념을 하는 사람들 앞을 지나갔다. 거기에 총리라고 하는 사람은 종종걸음으로 아부하듯 그 뒤를 따랐고. 할 말이 없다. 그럴 수도 있을 때와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있고 그래서는 절대 안 되는 일과 때가 있다. 당선자와 총리(앞으로의 정부와 지금까지의 정부)는 그래서는 정말 안될 일이었다. 아직 5년을 시작도 안 했다. 걱정이 구만리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패러렐 마더스’의 제목을 어떻게 우리말로 옮기면 좋을까, 최소한 의역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했다. ‘평행 엄마들?’ 아 근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것이 두 명의 엄마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은 1936년의 스페인 내전을 말하고자 함이며 거기에 엄마 두 명의 에피소드를 얹혀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엄연히 이것은 우주 평행 이론 급에 해당한다. 과거의 일, 그 뿌리가 지금 현재 두 명의 여성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한 얘기다. 여성이 유린당하고 여성성이 파괴되는 일이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 안에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 그것이 평행이론이고 또 그렇다면 이 영화의 평행성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냥 영어 제목을 쓰는 것이 낫게 된다. 제목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영화는 그 순간 확 이해가 되면서도 동시에 약간 실망감을 느끼게도 되는데 그건 순전히 이 작품을 만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탓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지금껏 이렇게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모티프를 자신의 영화에 섞은 적이 없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답지 않다. 알모도바르가 찍은 것 같지가 않다. 알모도바르는 지금껏 40편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면서 늘 성적 욕망과 그것에 대한 구원, 인간이 갖는 양성성의 본질, 남성들이 회복해야 할 여성성과 모성애의 정서 등에 대해서 얘기해 왔다. 그의 영화는 늘 개인의 구원에 맞춰져 왔으며 정치나 역사와 같은 거대담론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알모도바르의 매력이었다. 종종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성적 판타지에 대한 묘사와 그 수위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낙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 ‘패러렐 마더스’는 스페인의 아픈 과거사를 가져와 그것에 대한 씻김굿을 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현재의 여성 둘의 임신과 출산,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극 등등은 사실 메인 테마가 아니라 곁다리였다. 어쩌면 그 얘기 자체가 맥거핀이라는 생각도 든다. 알모도바르가 정작 얘기하고 싶은 것은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 집단 학살이 있었고 그 상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실규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번에 프로파간다 영화를 찍은 셈이다. 그건 매우 신선한데다 알모도바르가 이제 자신의 주변을 되돌아볼 만큼 늙고 현명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그의 성적 도발성이 약화된 것 같아서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든다. 얘기의 시작은 주인공 여자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즈)가 남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야니스는 사진작가이다. 주로 패션 쪽 상업적인 작품을 찍는다. 아르투로는 법의학자로서 발굴 전문가이다. 그는 역사기억보존협회 같은 이름의 기관에서 일을 한다. 야니스는 아르투로에게 자신의 할아버지와 그의 마을 사람들이 묻혀 있다고 추정되는 장소를 발굴해달라고 요청한다. 둘은 마음이 맞고 이데올로기가 맞는다. 당연히 눈이 맞는다. 그래서 비교적 격렬한 섹스를 한다. 그리고 임신을 한다. 남자는 유부남이다. 여자는 싱글 맘이 되기를 원하는데, 그건 자신의 엄마도 그랬고 자신의 할머니도 그랬다(할아버지가 학살됐기 때문에 할머니는 결과적으로 싱글 맘이었다). 그래서 야니스는 아르투로에게 말한다. “집안의 전통대로 애를 낳을 거야. 내가 키울 거야”. 야니스는 아르투로와 헤어진 후 아이를 낳는다. 병원에는 자신과 같은 임산부가 있는데 아나라는 이름의 미혼모, 어린 여성이다. 야니스와 아나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딸을 출산한다. 둘 다 건강했으며 둘 다 행복했다. 그러나 곧 야니스는 두 아이가 신생아 격리실에서 바뀐 사실을 알게 된다. 알모도바르는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와 이야기 전개를 배배 꼬기로 유명하다. 이번에도 그렇다. 자신이 키우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야니스는 혼란에 빠진다. 게다가 아나가 키우는 (자신의 실제)아이가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은 것을 뒤늦게 알고, 더더욱 어쩔 줄 몰라 하게 된다. 남자 아르투로와 헤어진 야니스는 아나를 만나 그녀를 위로해 주는 과정에서 동성애에 빠진다. 야니스는 아나와 섹스를 한다. 비밀을 지킬 수 있다면 아나와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도 빠진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리 쉽게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르투로가 아내와 별거를 하고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난다. 둘은 유적지 발굴을 하기 위해 함께 그녀의 고향으로 향한다. 영화의 시작, 설정은 마치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닮았다. 거기서도 두 남자는 각자 키운 아이가 서로 뒤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레에다는 두 아이를 실제로 다시 바꾸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특히 ‘패러렐 마더스’를 보고 있으면 그게 현실적이고 가능한 얘기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을 다시 바꾸기보다는 대부분은 비밀을 안고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모성이나 부성이라는 것은 천부적이고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꽤나 후천적이고 교육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키운 아이를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혈육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모도바르식으로 같이 키우면 된다. 새로운 가족 공동체, 이성과 동성을 뛰어넘는 양성성, 선의의 쓰리섬을 받아들이면 된다. 스페인 내전을 약간이라도 알고 보면 영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가 있다. 스페인 현대사는 거의 내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특히 프랑코 총통이 쿠데타를 일으켜 벌어진 프랑코파와 공화파의 전쟁은 2차 대전의 전초전이라 불릴 만큼 세계적인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지식인 의용군들이 국제 여단을 만들어 이 내전에 뛰어들었다. 스페인 내전은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로 재생됐는데 앙드레 말로의 『희망』이라는 작품,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동명 영화로 만들어졌다. 멕시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라는 공포영화로 스페인 내전의 어두운 세계를 그려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패러렐 마더스’를 수작이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좋은 작품, 좋은 의도의 영화가 꼭 수작이나 걸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엉뚱하게도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 올리기’가 생각이 난다. 그 영화는 영화 속 화자와 에피소드보다는 한지(韓紙)의 중요성, 역사성이 강조되는 영화가 되고 말았다. 이데올로기와 역사가 중요하다고 그걸 너무 앞세우면 영화가 이상해진다. ‘패러렐 마더스’가 그렇다. 아쉽다.
영화 ‘스펜서’는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이야기다. 그녀의 성이 스펜서이다. 스펜서 백작 가문의 집안이라는 얘기다. 스펜서 집안은 스튜어트 왕가의 후손이다. 스튜어트 왕조라면 몇 년 전 영화로 나왔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생각하면 된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앤 여왕이었으며 앤은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앤 여왕 다음으로 하노버 왕조가 이어지고 그다음이 지금 엘리자베스 여왕이 제위(帝位) 중인 윈저 왕조로 연결된다. 윈저 가문은 끊임없는 유명세 혹은 구설을 낳았다. 조지 5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이라는 이혼녀를 사랑해서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버린 일이나, 그 뒤를 이은 에드워드의 동생 조지 6세가 말더듬 장애를 이기고 처칠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극복한 이야기(영화 ‘킹스 스피치’) 등이 그렇다. 어쨌든 다이애나는 이런저런 왕가가 죽 내려와서 현대에 정착한 윈저가의 며느리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제목이 ‘윈저’가 아니라 ‘스펜서’인 것은 다이애나가 찰스 윈저의 아내이거나 윈저 가문의 한 사람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만의 독립체로서 죽었다는 것이며, 그녀가 그러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썼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다이애나는 다이애나였다. 왕세자비도 아니고, 공작부인도 아니며, 어떤 남자의 여자도 아니었고, 대중들이 환상을 가졌던 여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다이애나 스펜서로 죽었으며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의 엄마로 죽었다. 그러니까 영화 ‘스펜서’는 시작부터 다이애나란 이름의 여인이 갖는 개별성과 독립성, 주체적 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영화 ‘스펜서’가 왕세자비로 살았던 다이애나의 살풍경한 왕실 일상이나 갈등, 그 장대하고 파란만장한 일생이 대서사로 그려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1997년 다이애나 공작부인(이혼 후 그녀는 왕세자비란 호칭 대신 이렇게 불렸다)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몇 해 전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휴가 3일간의 얘기를 그린다. 그 짧은 3일 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숨 막히는 삶을 살았는지, 왕세자비로서 그녀의 삶이 얼마나 불행했는지를 증명해 낸다. 그 과정이 눈물겹다.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그녀가 왕실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인 의상 담당 비서 격의 매기(샐리 홉킨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전히 『레 미제라블』을 좋아하고 『오페라의 유령』을 좋아해. 나는 중산층 여자야”. 그런 사람이었던 만큼 그녀는 왕실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삶은 일반 시민들처럼, 사람들 틈에 섞여서 살아야 했다. 그녀는 생래적으로 왕가의 엄격한 규율에는 안 맞는 사람이었으며, 속박과 얽매임을 견디기 힘들어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다이애나는 대중과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건 마치 신데렐라 증후군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은 다이애나처럼 자기와 같은 부류(는 엄밀하게 얘기해서 결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들도 왕이나 왕에 준하는 가문의 사람으로, 그러니까 계층 상승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판타지를 가졌다. 다이애나는 대중들의 환상이자 꿈이었다. 왕실의 수석 요리사의 대런(숀 해리스)은 그런 그녀를 늘 안쓰러워했던 모양이다. 마침 다이애나는 거식증에 시달리는 때였다. 대런은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남모르게 메뉴에 넣는다. 전하가 좋아하실 만한 디저트를 만들었으니 그건 꼭 맛보시라고 얘기한다. 대런은 종종 왕세자비를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친근하게 군다. 요리사는 왕세자비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당신을 걱정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여왕 폐하나 왕세자만이 아니다. 궁정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걱정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걱정하고 사랑한다. 다들 당신이 잘 견뎌 내기를 간절히 원한다(당신은 일반 국민들의 꿈이자 만인의 연인이기 때문이다)”. 다이애나를 죽인 건 어쩌면 왕가의 불필요할 만큼 엄격한 규칙들(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저울에 앉아 몸무게를 재야한다는 전통 같은 것)이거나 왕세자 찰스의 외도 혹은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파파라치로 대변되는 대중의 유난한 관심이 그녀를 죽인 것일 수도 있다. 하녀 매기는 다이애나에게 말한다. “여왕이나 찰스 왕세자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니에요”. 맞다. 특히 찰스는 다이애나를 이해하려고 애썼으며 카밀라 파커볼스와의 불륜은 사실 결혼 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니 찰스 역시 왕가의 희생자일 수 있다. 엄마인 엘리자베스 여왕으로서는 과거 자신의 큰 아버지였던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 부인을 만나 왕위를 버린 것처럼, 아들 찰스가 유부녀인 카밀라 때문에 왕위를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이애나와 찰스를 결혼시킨 것은 이러한 정략적 판단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영화는 그 같은 배경을 생각해서인지 찰스와 엘리자베스 여왕을 그렇게 혹독하게 그리지는 않는다. 왕가의 이야기를 그리는 만큼 의상과 미술의 화려함은 여느 영화와는 비할 데가 못 된다. 특히 끼니때마다 갈아입어야 해서 다이애나로서는 스트레스 중의 스트레스였던 왕세자비 의상은 샤넬 수석 디자이너였던 칼 라거펠트의 작품이다. 헤어와 메이크업은 일본 디자이너 요시하라 와카나의 작품인데,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외모를 다이애나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게 만들었다. 미술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버킹엄 궁전과 크리스마스 휴가 3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샌드링엄 별장의 모습을 재현해 내는 데 주력한다. 샌드링엄 별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크론베르크에 있는 슐로츠 호텔의 내부를 변형해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슐로츠 호텔은 과거엔 프리드리히 호프 궁이었으며 영국 하노버 왕조의 빅토리아 여왕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 속에서 다이애나가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자신의 유년 시절을 환각 속에서 보게 되는 계단 신은 이 슐로츠 호텔의 계단에서 찍은 것이다. 인상적인 장면이 꽤나 많지만 찰스(잭 파딩)와 다이애나가 당구대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특히 기억에 오래 남는다. 당구대 사이가 유난히 멀게 느껴지게끔 각자의 시점 숏으로 교차 편집되는 이 장면은, 둘 사이가 얼마나 벌어졌는지를 유감없이 그려 낸다. 다이애나의 당구대 앞에는 당구공 몇 개가 흐트러져 있다. 찰스의 앞에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한 명, 특히 다이애나가 곧, 당구공 하나를 집어 들고 찰스에게 집어 던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실로 팽팽하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찰스와 다이애나가 이미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알 수 있다. 조니 그린우드가 만들어 낸 불협화음의 음악은 왕가 내부의 갈등과 위선, 촘촘한 감시체계 속 억압 심리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해 준다. 영화의 오프닝 부분에서 다이애나는 벌판에 서있는 허수아비에게서 자신의 아버지가 입다 버린 외투를 벗겨 온다. 그녀는 그 옷을 매기에게 뭘 어떻게 해서든지 수선을 해달라고 한다. 그녀는 스펜서의 옷을 입으려 한다. 허수아비에게는 자기가 입던 옷을 입힌다. 스펜서로서 살고 스펜서의 것을 남기려고 하는 마음이 읽힌다. 샌드링엄 별장의 숲에는 사냥용 꿩을 키운다. 찰스 왕세자는 아들 윌리엄과 해리를 데리고 꿩 사냥에 나선다. 다이애나와 꿩은 죽이기 위해 키우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동일화가 느껴진다. 그녀는 아이들이 ‘꿩=자신’을 죽이기를 원치 않는다. 사냥에 나간 아이들을 울부짖어 가면서까지 빼내서 데려오는 이유이다. 인간은 뼛속 깊숙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 죽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사람들은 고통 속의 삶을 살아간다. 그걸 몸소 보여 준 인물이 바로 다이애나 스펜서이다. 다이애나는 현대판 노라(헨리크 입센의 1879년 소설 『인형의 집』 주인공)였다. 영화 ‘스펜서’를 보는 것은 그래서 고통스럽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소리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그만 거기서 뛰쳐나와. 나오라고!’ 하녀 매기는 다이애나를 사랑한다. 그녀의 제스처에는 섹슈얼한 무엇이 있다. 그녀는 다이애나에게 말한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과 충격, 그리고 웃음이에요”. 맞다. 우리에게도 사랑과 웃음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한 시대이다.
이 모든 것이 ‘그 놈의’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도끼로 암살한 것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트로츠키의 주장처럼 사회주의는 영구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끊임없이 민주적 과정을 거쳐 일신하고 또 일신해야 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죽이면서까지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굳혔다. 일국 사회주의 노선은 사회주의의 이상 자체를 말살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해방운동이 이것 때문에 변질됐다. 인간의 얼굴을 해야 할 사회주의가 늑대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됐다.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의 성과를 내기 위해 급격한 공업화 우선 정책을 폈고 그것을 위해서는 농산품 수출이 필요했는데 당시 소련으로서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그 방법으로 밖에는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농산품 수출을 위한 식량 조달은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를 갈취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 스탈린의 이 ‘강도’ 행위로 우크라이나 인민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홀모도모르 사태다. 영화 '미스터 존'은 그 부분만을 뚝 떼어 내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이러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그 원한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다. 당연히 친러파보다는 친서방파가 득세할 가능성이 높은 나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키이우(키예프) 공국 군주 중 한 명이 세운 나라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시조 격 나라이다. 누가 뭐라 하든 러시아 사람들은 우크라이나를 자기들이 ‘보호(?)’해야 할 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크림반도가 그렇다. 돈바스 지역은 더 하다. 그러니 여기에 친서방파가 권력을 잡고 EU와 나토 가입을 서두르면 가만있을 리가 없다. 특히 나토 미사일의 우크라이나로의 동진(東進) 배치는 과거 1962년의 미-쿠바 미사일 사태와 판박이다. 당시 흐루시초프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자 케네디 정부는 봉쇄 정책을 폈다. 핵전쟁의 위기로 치달았다. 그런데 흐루시초프가 이런 일을 한 데에는 미국이 터키에 대(對) 소련 미사일 기지를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 문제는 연원을 따지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어진다. 누구 말대로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기보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한 목소리로 대응해야 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핵전쟁의 가능성을 일축시켜야 한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을 중심으로 대 러시아 전쟁의 전선을 확대시켜야 한다. 젤렌스키의 지지율이 90% 이상 나오는 것은 그 같은 열망이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우크라이나 문제에 미온적인 것은 국내 문제가 꽤나 심각하기 때문이다. 발등의 불이 더 뜨겁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후 보통은 그간의 정치적 이견(異見)으로 일었던 갈등은 ‘허니 문’ 기간에는 다소 잠잠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게 여의치 않게 됐다. 청와대 이전 문제를 들고 나온 당선자 때문에 한국사회는 급격한 안보 논리에 휩싸였다. 그런 와중에 북한은 ICBM을 시험 발사했다. 다른 미사일도 아닌 ICBM을. 가뜩이나 당선자와 국민의 힘의 국방 정책 우선순위가 선제타격론에 힘이 실려 있는 상황이다. 한반도를 가까스로 평화 구역을 만들고자 했던 지난 5년 간의 노력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셈이다. 한국 사람들 중 90% 이상이 평소에 한반도에서는 이제 6·25 같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일상의 감각으로 살아간다. 휴전선 인접 도시인 파주에는 GTX과 들어오고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쇼핑 몰이 들어서려는 중이다.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맞기는 맞는 말이다. 6.25 전쟁 같은 재래식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핵 발사 하나 만으로 한반도 전체는 쑥대밭이 될 것이다. 전쟁의 공포가 이렇게 전격적으로 다시 일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했던 일이 아니다. 자 그러니 어떻게 보면 우크라이나 문제가 더 이상 먼 나라 얘기가 아니게 됐다. 우크라이나는 지금 한반도이며 한국의 정치 문제는 우크라이나에 맞닿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를 해결하면 한국의 전쟁 위협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두 나라는 동전의 앞뒷면이며 손바닥의 안과 밖이다. 전쟁 중단의 방법론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 쓰이든 그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한국의 많은 사람들도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외곽을 때리고, 그렇게 우회로를 거쳐, 한반도의 문제, 국내 정치의 본질의 문제에 접근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사실 먼 나라가 아니다. '제5원소',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가 우크라이나 키이우 태생이다. 밀라 쿠니스('블랙 스완')도 그렇다. 007 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에 나와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됐으며 최근 우리 영화 '배니싱: 미제사건'에 유현석과 같이 출연하는 올가 쿠릴렌코는 우크라이나 베르단스크 출신이다. 할리우드 감독 겸 배우인 리브 슈라이버가 연출한 2005년 영화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를 보면 광활한 해바라기 밭이 나온다. 우크라이나는 아름다운 곳이다. 소피아 로렌과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나오는 1970년도 영화 '해바라기'에서와 같은 아름다운 전원은 이제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그게 곧 우리 얘기가 될지 모른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레벤느망은 우리말로 사건이다. 영어로 event, happening으로 나와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accident가 맞다. 사고다. 영화 ‘레벤느망’의 주인공 안느 뒤신(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은 영화 속에서 사고를 당한다. 뜻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임신이라는 사고. 그녀는 이 사고 때문에 거의 죽을 뻔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임신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 안느가 1940년에 출생했다는 점, 이야기가 벌어지던 때는 그녀가 23살이니까 현재 (우리 식으로) 1964년이고 배경은 프랑스라는 점이다. 이때 프랑스뿐만 아니라 거의 전 세계적으로도 중절 수술이 불법화돼 있었던 때이다. 물론 지금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시대와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이슈는 여성 인권의 사안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그 금지의 수위를 낮춰 왔다. 가톨릭에서는 여전히 태아를 죽이는 일을 살인 행위로 간주한다. 우리나라는 2019년에 이르러서야 기존 낙태죄를 폐지하면서 임신중절의 합법화 길을 열었다. 여성 스스로 자기 결정권에 의해 임신 14주 이내에는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레벤느망’에서 안느는 임신 10주째 돼서, 불법으로 낙태 수술을 해 주는 非의사에게서 아기를 뗀다. 극히 위험한 짓이었고 당연히 생명에 지장이 온다. 안느는 기숙사 화장실에서 10주 된 태아를 밑으로 쏟아 내며 혼절한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영화 ‘레벤느망’을 두고 ‘수위가 너무 세다’는 말이 나왔던 이유다.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끔찍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두고 르 몽드는 이렇게 썼다. ‘간결하고 급진적이다’. 할리우드 리포트는 이렇게 썼다.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며 숨이 가쁜 영화다’. 르 몽드가 더 정확하게 영화의 감성을 전달한다. 영화는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1964년이 배경인 영화가 왜 그런 평가를 받는가. 급진적이라는 수사(修辭)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거꾸로 지금의 세상이 진보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비판이다. 영화 ‘레벤느망’은 1960년대 여성들이 받았던 고통을 떠올리게 하며 왜 지금의 세상은 보다 여성적이고, 보다 계급·계층적인 측면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가를 우회적으로 보여 주려 한다. 그것이야말로 감독 오드리 디완이, 1974년에 발표된 아니 에르노의 동명 원작 소설을 지금에 와서야 영화로 만든 이유이다. 이건 바.로. 지.금.의. 얘기라는 것이다. 여성의 권리는 여전히 침해받고 있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수세적이게 하고, 당당함보다는 변명으로 일관해야 하는 삶을 강요받고 있다는 얘기이다. 현재 페미니즘의 올바른 정치학이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주장인 셈이다. 아니 에르노는 현존하는 프랑스 작가들 가운데, 영화에 대한 르 몽드와 할리우드 리포트의 평가를 섞어 얘기하면, 정직하고 급진적이다. 이 소설은 자전적인 데다가 진보적이다. 디완 감독이 뒤늦게나마 영화화를 결심한 이유이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생이고 주인공 안느처럼 낙태수술을 경험했었다.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 ‘한 여자’ 역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얘기이다. 1964년은 프랑스 전역에서 68혁명의 불길이 일어나기 직전에 해당한다. 주인공 안느가 낙태 문제로 혼자의 힘으로 세상과 치열하게 싸워 나갔듯이 68혁명도 세상의 모든 금기에 도전했던 시대의 운동이었다. 프랑스 68은 1968년 5월 프랑스의 문부상이었던 작가 앙드레 말로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원장이었던 앙리 랑글루아를 해임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이후 68은 학생과 지식인, 노동자들이 연대한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투쟁, 곧 기득권과 특권계층 중심의 세상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번져 나갔으며 세계의 민권운동(인종주의 등 모든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과 결합하면서 거의 시가전에 이르는 전시 상황으로 확대됐다. 프랑스와 세계는 심한 홍역을 앓았다. 안느가 그렇게나 애써가며, 그러니까 스스로의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애를 지우려 했던 이유는 여성이 임신을 하면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학내 규칙 때문이다. 무엇보다 낙태를 하다 ‘걸리면’ 감옥에 간다. 그런 여성을 보호해 준 사람도 감옥에 간다. 안느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면서 친구들이 한 명 한 명 곁을 떠나는 이유다. 안느가 괴로운 것은 원치 않는 임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철저하게 고립될 수밖에 없는 학내 환경이자 사회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안느가 낙태를 강행하는 것은 아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모성애는 자기애에서 발현된다. 이타주의가 모성의 시작은 결코 아니다. 안느는 자신이 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니고 여성으로서 주체적으로 우뚝 서야 아이에게도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투쟁’의 과정이 실로 눈물겹다. 정상적인 병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한 걸 알면서도 안느는 시중의 산파 같은 여성에게서(이 여성의 목소리는 굵고 허스키한데 그건 마치 남성이 여성에게 임신을 시키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여성을 파멸시키는 폭력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를 연상시키려는 의도로 읽힌다) 시술을 받는다. 그전에도 그녀는 이미 본인 혼자서 기숙사 방에 수건을 깔아 놓고 꼬챙이를 자신의 자궁 속에 넣고 휘저으며 아이를 떼어 보려고 한다. 당연히 몸에 좋을 리가 없다. 그러한 행위를 직접 목도하며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관객들의 심사도 좋을 리가 없다. ‘레벤느망’은 고통스러운 영화가 맞다. 낙태만이 여성의 권리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주체 결정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찍고 있는 방점이자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목소리이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세상의 모든 부당한 금기, 억압을 뚫고 나간다는 것은 결국 계급과 계층의 해방이라는 사회운동과 맞닿을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결국 계급운동인 바, 양측 간의 괴리가 발생하고, 그 틈이 지나치게 벌어지면서 오히려 여성운동이 변질되고 퇴보하는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여성운동은 여성만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동반·연대해서 자유를 얻는 것이며,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가부장적, 남성 중심적, 계급주의적인 상황들을 이겨 내는 것이다. 여성운동의 방향은 바로 그것이며 영화 ‘레벤느망’이 전개 방향도 그런 점과 합치되는 것이다. 안느의 친구 쟝(케이시 모테 클레인)에게 임신했다며 도움을 요청하지만, 쟝은 임신한 김에 자신과도 한번 섹스를 하자는 얘기를 한다. 안느를 임신시킨 남자 대학생은 그녀의 몸 상태보다 친구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한다. 그는 끝내 책임을 지지 않는다. 1960년대의 남성들 인식이 얼마나 저열했는지를 보여 주지만 현대의 남성들 역시 그 궤도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 있지는 못한 상태이다. 왜 2021년의 베니스영화제가 이 영화에 황금사자상이라는 최고의 영예를 주었을까. 세상이 봉착해 있는 페미니즘의 해법, 그 원류를 되새겨 보자는 의미를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문제 해결을 위해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역사를 되짚고 되짚어 나가면서 상황이 가장 심각했던 때를 뒤져내는 습성을 지닌다. 과거 가장 심각했던 때를 들여다보면 지금의 상황과 그 해결 방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의사와 불법 시술자에게 다리를 벌리고 눕는 주인공 안느를 보고 있으면 그녀의 현재 상황이 부끄러움이나 수치스러움을 뛰어넘을 만큼 심각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절박함이 공유돼야 한다고, 오드리 디완 감독은 말하고 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딸을 세상의 엄마가 되게 하고 싶은가. 그럼 그녀를, 당신의 딸들을, 먼저 해방시키라. 자유로운 존재로 받아들이라. 죽을 때까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람으로 살게 하라. 여성의 해방은 세상의 해방이고 세상의 자유는 여성의 자유이다. 이젠 그 점을 만고의 진리로 받아들일 때가 됐다. 아니 지나도 훨씬 지난 얘기가 됐다.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그렇게 명료하지가 않다. 분위기와 몇 개의 장면들이 마치 환등기(幻燈機)의 슬라이드 마냥 한 장 한 장씩 기억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화적으로 사람들에게 있어 유년기란, 풀 숏이나 부감 숏 그리고 롱 숏으로 기억된다. 게다가 비교적 롱 테이크들이다. 클로즈업으로 떠오르는 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 정도다. 케네스 브래너의 위대한 역작 ‘벨파스트’가 딱 그렇다. 이 영화가 초반에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흑백과 롱 숏&롱 테이크와 풀 숏 위주로 촬영돼 있기 때문이다. 아홉 살 버디(주드 힐)의 엄마(케이트리오나 발피)의 자태가 꽤나 그윽한 데다 여전히 예뻐 보이는데도 얼굴은 잘 안 보이게 찍혀 있다. 자나 깨나 아들 둘 걱정에 남편과 가정의 앞날에 대한 시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엄마의 표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제대로 잡히기 시작한다. 영화 ‘벨파스트’는 1969년의 벨파스트 사태, 흔히들 북아일랜드 분쟁이라 불리는 극심한 내전의 상황이 배경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핏빛 전투와 테러, 폭탄과 총탄이 난무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벨파스트 어느 동네의 한가로운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첫 대사가 엄마가 아들을 부르는 소리다. ‘버디! 버디! 어디 있니? 저녁 먹으러 들어와라’. 그러면 골목길 사람들,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아들 버디에게 엄마의 말이 옮겨진다. 아이는 쓰레기통 뚜껑을 방패 삼아 아서왕 놀이쯤으로 보이는 칼싸움을 하다가 냅다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런 모습은 세계 어느 나라의 사람들이라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기억이다. ‘엄마가 밥 먹으러 들어오래. 나 갈게!’ 바깥의 세상에서 아무리 총탄이 날아다닌다 한들 오늘도 엄마는 아이의 저녁밥상을 차린다. 그게 엄마이다. 그게 평화이다. 그게 정상의 세상이다. 벨파스트 한 동네의 골목길도 ‘그날’의 시작은 지극히 평범했었다. 그러나 골목 바깥에서는 이미 전쟁이 시작된 터였다. 이때부터 1998년까지 약 30년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유럽 대륙 본토에서는 무려 4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테러와 린치, 게릴라식 전투로 목숨을 잃는다. 이른바 IRA의 무장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단편적이나마 많은 영화에서 다뤄져 왔다. 짐 쉐리단의 1994년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있고 스티브 맥퀸 감독의 2008년 영화 ‘헝거’ 등이 있다. ‘헝거’는 특히 오랜 투옥 생활 끝에 정치범에 대한 권리 회복을 주장하며 단식 투쟁으로 목숨을 끊은 보비 샌즈의 이야기였다. 그가 극심하게 살이 빠지는 과정을 마이클 패스벤더의 연기로 보여줘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작품이다. 이 밖에도 아일랜드 독립과 분쟁을 다룬 영화로는 닐 조단의 ‘마이클 콜린스(1996)’와 클라이브 오웬,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주연의 ‘섀도우 댄서(2012)’ 등이 있다. 제이슨 본 시리즈의 감독으로 알려진 폴 그린그래스가 2002년에 만든 ‘블러디 선데이’는 영국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을 그린 내용으로 우리의 광주항쟁을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 유명했다. 영화 ‘벨파스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사전적 지식이 필요하다. 아일랜드에서는 왜 이런 내전이 일어났는가. 모든 분쟁은 한 가지 문제 때문이 아니다. 복합적이다. 아일랜드 사태는 멀게는 1700년대 영국 잉글랜드의 식민통치에서부터 시작돼 1918년의 아일랜드 독립전쟁, 북아일랜드 내에서 내전으로 확대된 기독교계와 가톨릭계의 갈등 등으로 설명된다. 독립전쟁 과정에서는 비교적 하나의 아일랜드였다. 영국이 공동의 적이었다. 이때 독립운동가 마이클 콜린스의 활약이 대단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의 내전으로 양상은 복잡해졌다.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계가 소수의 가톨릭계 주민들을 탄압하고 몰살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북아일랜드의 기독교계는 아일랜드로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영국령으로 남기를 원한다. 이들은 대부분 18세기 때부터 영국에 의해 북아일랜드에 정착한 이주민 후손들이다. 반면 북아일랜드 가톨릭계들은 아일랜드로의 통합된 독립을 갈망한다. 마이클 콜린스는 북아일랜드를 뺀 (남)아일랜드 독립에 대해 영국과 합의를 하게 되는데 이제 그만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리파로 간주되면서 통합파에게 암살을 당한다. 한편 북아일랜드 IRA는 기독교인들에게 저항하는 극렬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고, 이에 대해 영국은 정규 군대를 파병하면서까지 억압정책을 펼친다. 이제 싸움의 양상은 영국 정부군 대 북아일랜드 내 IRA, 기독교 대 가톨릭, 남과 북의 싸움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한다. 영국 의회 내에서는 아일랜드를 대변하는 신페인당의 의회 투쟁이 계속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의회주의, 비폭력주의는 IRA와 갈등을 빚게 되는 양상으로 치닫는다. 어쩌면 영화 ‘벨파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모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영화는 텍스트만으로도 콘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하며 스토리와 아우라만으로도 작품 속 사건의 앞뒤 역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벨파스트’의 주된 설정은 바리케이드다. 동네 어귀에는 영국 정부군에 의해 바리케이드가 쳐지는데 이 동네가 바로 소수 가톨릭 지구이기 때문이다. 바리케이드는 명목상 안전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목 안은 기독교계 조직에 의한 테러 활동으로 하루하루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나날이다. 영화는 그 하루하루의 불안을 그려낸다. 골목길은 늘 수심의 구름 같은 분위기에 싸여 있다. 게다가 버디의 집은 가톨릭이 아니라 기독교 집안이다. 하지만 버디의 엄마, 아빠 모두 동네 사람들과 같이 자라고 같이 살아온 터, 정작 이들은 싸울 일이 없다. 오직 싸움은 바깥의 일일뿐이다. 하지만 일상의 생활은 시시각각 무너져 간다. 정치와 전쟁 따위 아랑곳없이 오로지 아들과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고, 어떻게 하든 가정을 지키려 하는 엄마의 노력은 점점 더 구석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바리케이드 밖 전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지만 골목 안의 일상은 어느 정도 이어져 가긴 한다. 학교에서 버디는 늘 3등을 하다가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의 옆에 앉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런 아이의 연애를 돕기 위해 할아버지(시아란 힌즈)는 일종의 커닝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또 그런 할아버지를 늘 비아냥대면서도 은근히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할머니(주디 덴치)의 표정은 도통 알 수가 없다. 벨파스트의 오래고 거친 세월 속에서 그녀는 말을 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알게 된 것처럼 보인다. 버디의 예쁜 엄마는 도박 버릇이 있는 아빠를 늘 못마땅해 하면서도 그를 너무나 사랑한다. 둘은 아직 젊다. 엄마가 사랑하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다. 남편과 생때같은 자식들 먼저, 그리고 그런 남편과 자식이 살아갈 수 있는 오랫동안 정든 벨파스트이다. 벨파스트가 없으면 가족도, 자신도 없다. 가족과 자신이 없으면 벨파스트도 없다. 남편(제이미 도넌)은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가 건설 일을 하고 2주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제 그만 벨파스트를 떠나자고 한다. 여자는 주저하며 이사를 감행하지 못한다. 어딜 가든 아이리시는 같은 취급을 받을 거라는 두려움이 앞선다. 분쟁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가족은 늘 화목해지려고 노력한다. 특히 영화광인 둘째 아들을 위해 이들은 동네 극장을 자주 찾곤 하는데, 버디는 극장과 흑백 TV를 통해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자란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와 ‘하이 눈’, ‘치티 치티 뱅 뱅’은 그가 입을 쩍 벌리면서 본 영화들이다. 버디는 결국 그렇게, 케네스 브래너가 된다. 둘째 손자 버디가 집 뒷문 쪽 실외 화장실에서 문을 열어 둔 채 변기 위에 걸터앉아 있고 그 앞에서 할아버지는 말안장을 고치는 중이다. 아이와 할아버지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중이다. 집 뒤쪽 창가 안에 할머니가 앉아 있는데 마치 그림처럼 미동이 없다. 카메라의 움직임 없이 마치 정물화처럼 담아낸 이 장면은 일본 오즈 야스지로의 ‘다다미 숏’마냥 시선을 고정한 채 롱 테이크로 이어간다. 영화 ‘벨파스트’는, 세상이 요동쳐도 내 안의 평화를 지켜내려는 노력은 우리 삶에서 오랫동안 계속돼 왔으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아마도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바로 그 점을 그려내고,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엄마·아빠=가족’의 강고한 의지야말로 세상의 동력이라는 점을 보여주려 한다. 멕시코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가 있다면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자 이 위대한 배우는 아일랜드엔 ‘벨파스트’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기억은 역설적이고 서정적이다. 아이가 써놓은 산문 같은 것이다. 그 순수함이 세상을 지켜낸다. 모든 전쟁과 분쟁, 학살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유년의 기억들 때문이다. 그건 곧 어머니의 사랑 같은 것이다. 벨파스트들의 어머니를 위하여. 지금도 아이를 지키려 품 안에 자식을 감싸 안는 우크라이나의 여인들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여인들을 위하여.
영화와 예술은 공교롭게도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먹고 자란다. 영화는 밝은 시대보다는 어두운 시대에 더 잘 되는 경향이 있다. 아니 그보다는 어두운 상황에 대한 얘기를 더 잘하는 경향이 있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그랬다. 한국사회가 문재인 정부 하에서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심하게 곪아 있고 또 그렇게 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줬다. 그건 신자유주의가 심화된 때문이고 한국 자본주의가 극도의 천민화, 양극화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문재인 이전 이미 9년 동안 진행돼 왔었다. '기생충’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 모두 이러다가 비극적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적 드라마로 등극한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다. 극중 인물인 1번 노인을 통해 이 드라마는 보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러다가 우리 다 죽어!” 영화가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은 그러나, 한 템포 정도 약간 늦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영화는 대체적으로 3년이나 4년, 늦으면 5~6년 전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러니까 ‘기생충’은 박근혜 시절이 계속됐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가를 보여줬던 셈이다. 영화는 단순히 정치적 이슈나 정부의 주체가 누구였는가만을 문제삼지 않는다 점도 생각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는 단지 정부가 어떤 인물들로 구성돼 있는 가로 표출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물적 토대의 문제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가에 따라 나타난다. 부동산 문제가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심각하게 잘못 운용했다고 비판하면서 그 이슈가 이른바 정권교체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2030 세대의 지지를 이반시켰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에, 부동산 문제는 이미 그 이전 정권,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더 구체적으로는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 체제에서 저질러진 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안다. 영화와 예술은 때문에, 현상보다는 해당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 그 심연을 추적해 들어가는 경향성을 보인다. ‘기생충’에서 시작해 ‘오징어 게임’과 ‘D.P.’ ‘지옥’ ‘우리 학교는 지금’과 같은 드라마는 한국 사회, 한국 자본주의가 언제부터, 그리고 얼마만큼, 어디까지 왜곡되고 변질됐는지, 무엇보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 것인 가를 보여주려 애쓴다. 그리하여 특정 정권의 교체보다는 정치 체제와 그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영화나 TV드라마 같은 대중 예술이 주려는 메시지는 그 같은 기저에서 찾아야 한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대체로 영화나 드라마의 메시지를 잘못 보거나 보긴 봤어도 그 실체적 진실을 스스로 내면화해서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서툴러 하기 십상이다. 대중들은 대체로, 자주, 잘못 인도된다. 때문에 평론가들이나 기자, 통칭 언론은 대중예술이 사회를 반영하는 방식과 내용, 메시지를 올바르게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사회가 궁극적으로 잘못된 길로 빠지는 데에는 평론과 언론이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자(識者)들이 줄곧 언론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지금 극장에서는 '더 배트맨'이란 영화가 상영중이다. 흥행은 잘 안된다. 배트맨 시리즈가 다소 지겨워서일 수도 있다. 새로 배트맨 역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이란 배우가 한국에서 그다지 큰 인기를 모으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지금의 한국사회를 얘기하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영화에서는 리들러(폴 다노)라는 이름의 한 미치광이가 개인적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사회적 복수심에 전전긍긍하는 하층계급들을 선동해 고담 시의 시장 선거를 방해하고 시 전체를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뜨리게 한다. 배트맨 역시 다소 기이한 결핍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 눈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자신의 파워를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 혹은 범인들로 추정되는 거리의 깡패들, 조직범죄의 두목들, 예컨대 펭귄(콜린 파렐)등을 소탕하려 한다. 그런데 그 또한 개인적 복수심의 발로다. 사건은 시장과 검찰, 경찰이 모두 얽혀 있는 비리 문제로 번져 나간다. 배트맨은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복수는 과거를 되살리지 못한다”는 점을. 영화 '더 배트맨'이 한국사회를 겨냥해서 이야기를 만든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한 명의 미치광이가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선동하고 동원해 세상을 어지럽혔던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그 보편성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언제든 그런 일이 반복될 수 있고 지금 현재 반복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히틀러와 나치, 극우주의자들의 출현이다. 유럽사회와 미국사회, 동구권과 사회주의권에서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복수극=정권교체 구호’도 마찬가지 모양새다. 알고 보면 이들의 복수에는 실체가 없다. 영화 ‘더 배트맨’은 현재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광기에 대해 경고음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거기에 한국도 포함돼 있다. 그걸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느냐는 전적으로 ‘관객=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이다. 내일(9일)이 20대 대통령 본 선거의 날이다. 걱정이 눈앞을 가린다.
새 영화 ‘안테벨룸’은 쉽게 정체가 드러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얘기는 곧, 쉽게 정체를 드러나게 할 수도 없는 영화라는 뜻이다. 단 한 줄의 설명도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기 쉽다. 영화를 볼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그저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단 하나, 안테벨룸은 최근 수 년간 나온 작품 가운데 단연코 설정이 가장 뛰어나고 놀랄만한 작품이라는 점은 얘기할 수 있겠다. 영화의 전체 이야기 구조는 극 후반에 가서야 나타난다. 그게 약 72분이 걸린다. 그러므로 왜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느냐고 너무 불평하지 말고, 참고 앉아 있으시라. 곧 영화의 내용이 극장 전체를 폭발시키게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극 흐름 중간중간 키워드가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첫 번째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흐르는 자막이다. 이런 내용이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이다. “과거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 문구에서 주목할 부분은 과거가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이다. 또 하나는 핸드폰 소리다. 핸.드.폰.소.리. 영화를보면서 이걸 꼭 기억해 두시기들 바란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핸.드.폰.소.리. 그게 아주 결정적이다. 돌이켜 보면 남군 병사 한 명의 태도도 이상하긴 했고 그것 역시 이 영화의 장치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인 여성노예를 언제든지 유린하고 강간할 수 있는 이 병사는 막상 오두막에 들어 와서는 마음이 약한 척 군다. 착해 보이는 이 백인 남성에게 흑인 노예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려 한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이런 식으로 소리를 지른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다. 하지만 내용은 이렇다. “내가 폭력적으로 굴어야 한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여기서 방점은 ‘굴어야 한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에 있다. 자 이게 다 무슨 얘기인가. 제목 안테벨룸은 남북 전쟁 이전의 시대를 의미한다고 한다. 1812년부터 1861년까지다. 1812년은 1700년대 후반 오랜 숙적 관계, 곧 식민 종주국과 식민지 관계였던 영-미의 오랜 전쟁 이후 실질적으로 독립을 한 미국이 다시 한 번 영국과 짧은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는 해였다. 이때의 ‘민병대=미국 군대’가 대체로 우리의 이미지에 남아 있는, 소위 남군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원래 미국의 주력 부대는 남군이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1861년은 미국에서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이 발생하는 해이다. 남북 전쟁의 핵심은 노예제 폐지에 있었지만, 그런 인간주의적 이유보다는 급속한 산업화와 공업화를 이어 가던 북부 도시들의 부르주아들이 흑인 인구의 유입으로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하려 했던 욕망이 근본적 원인으로 꼽힌다. 남부는 목화 재배 농장들이 주력 산업을 이루었고 당연히 이들도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다. 결국 미국의 초기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을 어떻게, 그리고 누가 더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의 문제가 남북전쟁의 기본 이슈였던 셈이다. 따라서 1861년을 전후한 시기는 흑인들에게 가장 가혹했던 역사의 시대였다. 그들은 그때 그야 말로 짐승 취급을 받았다. 안테벨룸의 이야기는 두 가지 축으로 벌어진다. 하나는 1861년 시대로 보이는 남부 목화농장에서의 이야기다. 이든(자넬 모네)이라 불리는 흑인 여자 노예는 여기서 잔혹한 일을 겪는다. 영화의 첫 부분은 아마도 이든이 탈출을 시도했던 모양이다(그런데 이것도 나중에 복기해 보면 이든은 막 여기에 도착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녀는 남군 사령관에게 매질을 당하고 인두로 낙인이 찍히며 목화밭에서 다른 흑인 노예들과 함께 강제노역에 혹사당한다. 그녀는 사령관에게 정기적으로 강간을 당한다. 흑인 노예들은 서로 간 대화도 금지될 만큼 철저한 감시 체계 속에 살아간다. 여성 흑인 노예들은 이든처럼 병사들의 성 노리개들이다. 그중 줄리아(키어시 클레몬스)라는 여인은 임신까지 하게 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엘리(통가이 키리사)라는 남자 노예는 줄기차게 이든에게 몰래 접근해 언제 탈출을 감행할지를 촉구한다. 그리고 핸드폰 소리. 시대는 현대로 돌아온다. 베로니카 헨리(역시 자넬 모레)는 성공한 흑인 여성이다. 그녀의 성 담론, 페미니즘 이론은 각계에서 환호를 받는다. 베로니카의 이론은 꽤나 혁신적이고 진보적이며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녀는 계급과 인종(혹은 민족), 그리고 젠더 이론이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성의 문제를 인종과 계급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녀가 행하는 강론의 주제다. 여성주의의 계급화는 자칫 사회의 핵폭탄급의 정치적 움직임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여성들 다수에게는 환호를 받지만 일부 극단적 남성주의자들(여기에는 여자도 포함된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베로니카의 강연 투어 중에 묘령의 여자가 그녀의 뒤를 캐고, 쫓는다. 베로니카는 결국 친구 돈(가보리 시디베) 등과 함께 만찬을 즐긴 후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 소리…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오버랩 되는 과정에서 인물들이 겹친다. 이든은 베로니카가 되고 묘령의 여자는 과거 목화 농장의 간악한 여주인 엘리자베스가 된다. 사령관 밑에서 흑인들을 관리하는 악독한 남자이자 엘리자베스의 남편인 재스퍼 대위(잭 휴스턴)는 자세히 보니 현재 시점에서 베로니카를 납치하는 범인이다. 자 어떻게 된 것일까. 영화는 두 시대의 얘기를 병립해서 보여 주면서 과거의 일이 여전히 현재의 상흔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그 정도에 불과하다면 이 영화의 설정이 뛰어나다, 혀를 내두를 만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제라드 부시, 크리스토퍼 렌즈의 상상력은 우리 같은 범인(凡人)의 생각을 뛰어 넘는다. 72분이 지나서야, 핸드폰 소리를 다시 한 번 듣게 되고 나서야, 우리 모두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진심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우리의 인류사가 문명화된 것, 인간의 얼굴을 하게 된 것은 불과 백여 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얼마나 악독한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 번 목격하게 된다. 더 나아가 인간이 인간에게 여전히 얼마나 못되고 악한 존재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윌리엄 포크너의 얘기대로 과거는 절대 사라지지 않으며 현재까지 계속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국가나 체제가 그럴 듯하게 위장하고 있고 미디어가 진실을 가리고 있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야만의 만행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이야 말로 이 영화 안테벨룸의 주제다. 극 후반, 결말로 휘몰아치는 과정에서 이든=베로니카의 공격과 복수가 통쾌한 감흥을 준다. 이든 같아지고 싶어진다. 베로니카처럼 응전을 해주고 싶어진다. 영화 속 남군 백인들처럼,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살아가는 기득권층과 억압계층들을 향해 피지배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한번 만큼은, 단 한번이라도, 속 시원하게 보복을 하고 싶어진다. 요즘 할리우드에는 블랙팬더 당의 후예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듯이 보이며 이 영화를 비롯해 지난 3~4년간 만들어진 영화, 곧 ‘겟아웃’, ‘어스’, ‘캔디맨’ 등을 보면 그 같은 저류의 움직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들이 할리우드를 뒤엎고, 미국을 흔들고, 세상을 뒤집기를 기대해 봄직하다. 단 하나 들게 되는 의문은 영화가 한편으로는 상당히 양가적(兩價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결론은 인종, 계급, 여성 문제 해결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복수의 서사를 단순히 즐기게 함으로써, 또 즐기는 것으로만 그치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 혁명성을 순치(順治)시키는 역효과가 날 것인가라는 점이다. 영화가 어느 쪽으로 기능하게 될지 가늠하기란 쉽지가 않다. 예컨대 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헝거 게임’은 캐피탈이라는 독재 도시에 맞서 생존게임에 나선 여자 주인공이 다른 무리들과 함께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였다. ‘헝거 게임’은 미국의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 시위(월가 점령 시위)’ 이후 나온 영화로, 혁명도 상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때문에 오히려 젊은이들의 개혁 열기를 스크린 안으로 가둬 두려는 할리우드 부르주아들의 고단수 정치 상술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영화는 늘 그렇게, 이중적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 볼 것인가. 한국의 대선,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등등 혼탁한 시대에 안테벨룸은 진정, 생각할 거리를 준다. 해외에서는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 다소 심할 만큼 낮은 점수를 줬다.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러닝타임을 너무 많이 써먹었다는 것이며, 장르영화로서 그건 옳지 않다는 지적이 대세였다. 짐작하겠지만 그런 평가에 난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뒤의 30분가량이 중요한 작품이다. 그 부분을 잘 보시기들 바란다.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변수로 따지면 일종의 돌발 변수다. 예상치 못한 작품이고, 예상치 못한 내용인 데다, 예상치 못한 반응들이다. 흥행 역시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을 만들어 혜성처럼 등장해 각광을 받았고, 그 다음 작품 ‘은밀하게 위대하게’로 700만 관객까지 모으며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장철수 감독이 만들었다. ‘김복남’과 ‘은밀하게’는 서울 강북과 강남만큼 큰 차이가 난다. 보폭이 워낙 크게 벌어진 작품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장철수 본인도 대체적으로 돌발 변수적인 측면이 큰 감독이다. 그 역시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얘기다.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새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개봉 전, 일부 평론가와, (별로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일부 네티즌, 유튜버들 사이에서 ‘싸구려 포르노’란 소리를 들었다. 동의하지 않는다. ‘포르노’란 단어는 아무 데나 막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세계의 얘기다. 영화의 표현 수위가 높은 것은 맞다. 섹스 신, 베드 신, 애정 신으로 극 전편이 이어진다. 근데 섹스는 이 영화의 소재를 넘어 주제이다. 주제가 섹스이기 때문에 섹스 장면이 많이 나온다. 포르노에는 주제가 없다. 영화의 주인공 둘 수련(지안)과 무광(연우진)은 사단장이 돌아오기 전까지 사흘간 밤낮으로 섹스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원작인 옌롄커의 소설 8장, 175쪽에 나온다. 소설 속 이름 우다왕과 수롄은 그렇게 문을 다 걸어 잠그고 사흘 동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애욕을 불태운다. 이 부분을 영화는 어떻게 묘사하나 싶었다. 그걸 눈여겨봤다. 장철수의 영화도 철커덕철커덕 문을 걸어 잠근다. 커튼도 착착 소리를 내며 차단시킨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 각자에게도 다른 각자들을 향해 칸막이를 치라고 속삭인다. 이제 뜨거운 장면을 보게 될 거야. 혼자 보라고. 저들이 왜 저러는지 잘 지켜보라고. 영화 속 수련과 무광은 집안 곳곳에서, 때로는 침대에서 때로는 식탁 위에서 또 때로는 그냥 마룻바닥에서 온갖 체위와 자세로 섹스하고 섹스하고 또 섹스한다.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놀랍게도 옌롄커의 원작을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따라 했다는 말이 맞을 만큼 흡사하게 만들었다.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먼저 보는 사람들, 혹은 앞으로도 책까지는 읽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인물들의 대화가 심각하게 어색하다고 느낄 것이다. 예컨대 수련이 무광의 옷을 처음으로 벗기는 장면 같은 것이 그렇다. 이런 식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지. 어서 벗어”. 수련은 이 말을 세 번 반복하며 무광의 옷을 완전히 벗긴다. 다 벗은 무광의 몸을 보고 수련은 이렇게 얘기한다. “정말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군. 잘했어”. 근데 이 어투는 소설에서조차 어색하다. 로봇의 대사처럼 들린다. 보통은 이렇게 말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이런 대사 등등을 바꿀 줄 알았다. 그런데 장철수는 이 대목을 ‘특히’ 그대로 살렸다. 곰곰이 복구해 보면 군대에서, 병영 안에서 욕정에 들끓는 여자가 하급 병사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명령만큼 확실한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대목들이 어색한 이유는 특히, ‘위계에 의한 간음의 행위’가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런 감정이 점점 더 애정으로 연결돼 가는 것이니 만큼 그 어색함을 피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제2 주제는 바로 그 어색함과 생경함이다. 개인의 관계가 됐든 사회적 관계가 됐든 혹은 그것이 정치적 관계가 됐든 변화와 혁명의 시작은 어색함과 낯섦이다. 장철수는 어쩌면 그런 대목을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지론은, 영화가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무기란 늘 두 가지 중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는 폭력이고 또 하나는 섹스이다. 앞의 것은 미국의 샘 페킨파와 한국의 박찬욱 등이 추구하는 주제이다. 뒤의 주제는 한국 같은 경우 장선우가 ‘거짓말’ 같은 영화를 통해 비교적 선구적인 모습을 보인 바 있다. 폭력 영화든 섹스 영화든, 두 가지가 한꺼번에 섞여 있는 것이든 이런 류의 영화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사회가 억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가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상황, 그 힘의 세기가 너무 지나쳐 사회의 분위기가 폭발 직전까지 가 있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사단급 병영 내에서 서른두 살의 사단장 부인과 스물여덞 살짜리 하급 병사 간에 벌어지는 욕정의 드라마이다. 여자보다 18살 정도가 많은 사단장(조성하)은 과거 항일 투쟁 때 입은 부상으로 남성성을 잃었다. 간호장교였던 여자는 남자가 그런 상태라는 것을 모르고 결혼한 것으로 영화는 묘사하지만 원작은 그걸 알고도 당에 대한 충성과 개인의 입지를 위해 선택한 것처럼 나온다. 장철수의 영화의 가장 특이한 대목이 바로 여기쯤에서 나온다. 옌롄커의 원작은 당연히 중국 인민 해방군의 병영에서 벌어지는 얘기로 그려지는 데 반해, 장철수의 영화는 이를 짐짓 북한 인민군으로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북한군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병들, 사단장과 간부들, 사단장 부인 모두 북한 말을 쓰지 않는다. 사병들의 내무반은 남한의 부대처럼 보인다. 사병들 간에 벌어지는 알력이나 따돌림 폭력도 남한 부대 안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장철수는 의도적으로 영화 속 군대와 군인의 모습을 모호하게 그려낸다. 중국군도 아니고 북한군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남한 병사들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없다. 시간도 그렇다. 사단장이 항일 투사였고 극 후반에 이른바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면 1976년 상황이지만 영화 속 이미지들은 20년 후쯤이거나 아니면 지금 현재처럼 느껴진다. 장철수는 그렇게 시공간을 뭉갠다. 그런데 그게 매우 중요한 장치처럼 느껴진다. 일종의 섹스 영화를 찍으면서 장철수는 그것을 통해 작금의 세상에 저항하고 반항하려 했을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 내는 각종의 금기(자본의 금기, 정치사회적 금기)를 뛰어넘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칫 그 같은 태도는 매우 양가적(兩價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잘못 악용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특정 공간, 특정 시간, 특정한 상황을 드러내지 않고 뭉갬으로써, 영화의 내용을 인간 억압에 대해 저항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보장돼야 좋은 세상이라는 일반론으로 치환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시점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라는 의도가 읽힌다. 꿈과 해몽이 같든 틀리든, 장철수의 이번 영화는 지금의 한국사회가 뭔가로 콱 막혀 있음을 우회적으로 암시한다. 한국 사회 역시 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으로 모든 빛을 차단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줄곧 섹스에 탐닉하는 두 남녀 주인공처럼, 파격을 넘어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에서 수련과 무광은 당에서 받은 훈장과 상패, 지도자의 흉상, 초상화 모두를 때려 부순다. 세상이 자신들에게 짐 지운 모든 우상과 허위의식, 위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성공을 하든 안 하든 궁극의 중요성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와 실천에 있는 것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직역하면 ‘인민을 위해 섹스하라’다. 이건 존 카메론 미첼이 영화 ‘숏버스’에서 바 주인인 트랜스젠더를 통해 하는 말과 같다. 그(녀)는 이렇게 소리친다. “전쟁 말고 섹스를!” 이 영화의 섹스가 치졸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저속하고 더럽게 느껴지는가. 당신은 지금의 세상이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당신은 위선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세상의 변화를 위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폭력인가 섹스인가.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묻고 있는 대목이다. 수련 역의 지안은 자칫 오해받을 수 있다. 그녀의 연기가 다소 떨어진다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철저하게 장철수가 의도한 연출 때문이다. 수련은 딱딱하게, 어색하게, 경계선 안과 밖에서 오가는 이미지로 그려져야 했다. 몸도 풍만하고 볼륨감 있는 쪽보다 마르고 작은 쪽이 맞다. 이번 여배우 캐스팅에 감독의 고심이 컸을 것이다. 여배우는 연기에 감정을 많이 실으려 했을 것이다. 감독은 대본대로, 대사대로 하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 간극의 톤앤매너(Tone & Manner)를 끝까지 지키고 간다. 나중엔 그 점이 놀랍게 느껴진다. 원작자인 옌롄커는 자신의 소설이 중국 사회에서 문화적 역병이 되길 바랐다. 시진핑의 중국 사회에서는 의식의 혁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장철수의 영화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역시 한국 사회의 문화적 바이러스가 될 것인가. 관객들의 선택을 유의 깊게 살펴보는 건 여러 이유 때문이다.
워낙 유명했던 작품을 다시 만드는 것은, 게다가 그게 세계적 명작 수준의 원작소설을 가지고 만든 것이라면 더욱 더,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어떻게 바꿀까’, ‘무엇을 바꿀까’다. 첫 번째는 결국 만드는 자의 차별성, 곧 자신만의 정체성 문제 같은 것이다. 마치 화가의 낙관(落款)같은 것을 자신의 영화엔 어떤 문양으로 찍을 것인가와 같은 문제인데 이건 결국 시대정신과 관련이 있다. 지금의 시의성을 어떻게 보여주고, 대중들이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올바로 원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다. 두 번째, 무엇을 바꿀 것인가의 문제는 트렌드와 유행, 그 모던함을 어떻게 살려 낼 것인 가이다. 영화가 올드 패셔너블한가, 모던한가의 반응은 여기서 갈린다. 영국 셰익스피어 연극전문배우 출신의(그만큼 전통과 정통의 연기파라는 얘기를 듣는) 케네스 브래너는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의 ‘나일 강의 죽음’을 두고 똑같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피터 유스티노프, 베티 데이비스, 미아 패로, 제인 버킷, 올리비아 핫세 등이 나왔던 1978년 영화는 원작을 그대로 따라간 작품이었다. 너무 바꾸면 원작이 갖는 무게감, 그 의미를 실어내거나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시 또 똑같이 만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너무 ‘옛날풍’이기만 해서 ‘볼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나일 강의 죽음’은 엄청나게 돈이 많은 상속녀 리넷(갤 가돗)이 한때 친했던 친구 재클린(에마 매키)의 남자 사이먼(아미 해머)을 낚아채 결혼까지 하게 됐고 나일 강 유적지로 초호화 유람선을 빌려 신혼여행을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신혼부부는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 선박에 초대한다. 일단 대모(代母)와 그의 여비서가 있고,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의 줄임말)’과 그의 어머니(아네트 베닝), 신부의 전 남자친구이자 사실은 영국 공작 집안의 아들이고 의사인 남자, 그리고 이 신혼부부가 처음 만났던 클럽의 재즈 여가수와 그의 매니저 조카 등이다. 신부의 오랜 여비서도 있다. 나중에 이 여인도 살해당한다.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이 한 명 빠졌는데, 이미 유럽 상류사회에서 너무나 유명해진 벨기에 출신의 사립 탐정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가 이 선박에 탑승한다. 그가 배에 오른 이유는 신부의 남사친 부크(톰 베이트먼)가 초청해서인데 부크는 신부 리넷의 특별한 요청을 수행했을 뿐이다. 나중에 이 부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숨겨져 있음이 드러난다. 리넷과 사이먼 부부는 과거 사이먼의 여친 재클린으로부터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그리고 그 하소연은 결국 일련의 살인사건으로 비화되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놀라운 것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상속녀 리넷이게 이렇게 저렇게, 씨줄과 날줄로 원한 같은 것이 있었다는 점이다. 좋아하고 웃고 떠드는 것은 다 위장일 뿐이다. 물론 가식만은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빛과 어둠이 있기 마련이다. 밀실 안의 살인 사건은, 밀실 안의 사람들 중 한명이 범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건 어쩌면 쉬운 퍼즐 게임이다. 그러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원작이 늘 그렇듯이 이번 나일 강 살인사건의 범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 중에서 나온다. 케네스 브래너는 몇 가지 지점에서 어떻게 바꿀 것인가, 시대정신을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에 있어 자기 식의 원칙을 지킨다. 젠더 문제와 인종 문제, 계급 문제를 원작과 다른 지점에서 녹여 낸 것인 바, 상속녀 리넷의 대모와 그녀의 비서를 사실은 오랜 동성 파트너 관계로 그려낸 점이 대표적이다. 극중 재즈 여가수 살로메(소피 오코네도)는 소설 원작과 1978년 영화의 3류 연애소설 작가 캐릭터를 바꾼 것이다. 1978년 영화에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했던 올리비아 핫세가 오지랖 넓은 3류 작가 역을 맡았었다. 케네스 브래너는 살로메 이미지를 흑인 여가수로 바꿔냄으로써 영화의 인종 이슈를 슬쩍 뛰어 넘으려 한다. 살로메의 조카 로잘리도 리넷과 학교를 같이 다닌 인물이다. 로잘리는 당시 흑백갈등을 겪었고 그 문제로 리넷에게 앙심이 있다. 로잘리는 리넷의 남사친 부크와 비밀 연애에 빠진다. 당연히 돈이 많은 부크의 엄마는 그런 그녀를 못마땅해 한다. 계급 문제가 숨어있다. 케네스 브래너는 그런 식으로, 1937년 배경의 원작을 2022년의 시대상황으로 확장해 낸다. 무엇을 바꿔 내느냐에 있어서 케네스 브래너는 최근 공개된 영화 가운데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로케이션과 세트 미술을 보여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초호화 유람선의 실내는 놀랍게도 모두 세트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1920~30년대 유럽 부르주아의 삶, 2차 대전 전후의 계급사회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화려했는가를 직접 목도할 수 있게 된다. 시샘을 넘어 부러움과 감탄의 마음이 되는 것을 어쩌지 못하게 한다. 케네스 브래너는 리넷이 소유한 티파니의 보석만큼이나 최절정의 사치스러움으로 영화를 치장해낸다. 영화에 나오는 보석은 실물이다. 람세스 유적지인 아부심벨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한 것도 감독 케네스 브래너의 야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나일 강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이다. ‘할리우드 영화라면 아부심벨 정도는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라고 하는 그의 ‘잰 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관객들에게 철저한 눈요기를 제공하는 셈이다. 영화 ‘나일 강의 죽음’에서는 기묘하게도 영화가 가장 영화다울 때, 곧 TV드라마나 연극 무대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낼 때, 그 존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절박함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에르큘 포와로는 왜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을 기르는 것일까. 보통은 쿠키 영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케네스 브래너는 이번 영화에서 과감하게 맨 앞에 배치했다. 포와로는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지극히도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지금까지 포와로의 개인사를 보여 준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결국 사랑이 문제다. 사랑 때문에 모든 파탄이 빚어진다. 근데 그건 사실 사랑이 아니다. 사랑보다는 욕망이고, 욕망보다는 탐욕이다. 모든 배신과 살인이 벌어지는 이유다. 사랑과 탐욕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세상사, 인생사 모두 그 경계를 오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유람선 갑판에 있을 때 카메라가 패닝(panning)을 하며 한 명, 한 명을 보여 준다. 영화에서 패닝신이 자주 등장한다. 그 안에 범인이 있다. 범인을 잡아 보시라.
마이클 돕스가 쓰고 출판사 모던 아카이브의 박수민 대표가 번역한 다소 장황하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그래서 이른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미국 작가 조너던 사프런 포어의 소설 제목이자 영국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톰 행크스와 산드라 블록이 주연을 맡았다.)’ 느낌을 주는 책 『1962–세기의 핵 담판과 쿠바 미사일 위기의 13일』은 논픽션 르포르타쥬이다. 그런데 실로 내용이 너무나 다이나믹하고 풍부해서 한편의 밀리터리 첩보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은 다큐를 이런 식으로 쓴다. 한 권의 대하소설처럼 쓴다. 그래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쉽게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이 책 『1962』는 그런 면에서도 귀감이 된다. 제대로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나 역사학자가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등급 차이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1962』는 1962년의 급박했던 미국-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를 다룬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비엔나에서의 미-소 정상회담 때 했던 약속을 뒤집고 쿠바에 핵 미사일 기지를 비밀리에 조성한다. 그리고 핵 탄두를 반입하기 시작한다. 뒤늦게 이를 안 존 F. 케네디 정부는 쿠바 내 미사일 기지에 대한 선제 공습을 시도할 것인지, 아니면 이를 봉쇄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한다. 두 방식 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면적인 핵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나저러나 전쟁이 터질 것이다. 내각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다. 당시 공군참모차장이었던 커티스 르메이의 경우가 ‘쓸어 버리자’는 쪽이었다. 케네디도 처음엔 그 생각에 기울었고 동생이자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는 더욱 강경한 쪽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평소의 대화에 형과 동생이 꽤 욕을 많이 해 가며 대화를 나눈 것으로 보인다. 정치인의 뒷담화, 사생활이나 개인관계가 끼어든 대화를 두고 그걸 인성(人性) 문제로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대목이다. 어쨌든 케네디 형제는 봉쇄(blockade)를 택한다. 그리고 13일 동안 미국-소련-쿠바 간에는 치열한 군사외교의 물밑 협상이 오고 간다. 이때의 사태만큼 정상급 지도자부터 말단의 병사, 작전 요원, 일반 국민 한명 한명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해낸 적도 없었다고 할 만큼 엄청난 일들이 진행된다. 이 책은 그걸 날짜별, 시간별, 공간별로 기록해 낸 것이다. 그 방대한 자료의 섭렵만으로도 마이클 돕스의 노력은 노력이 아니라 거의 천재적 직관에 가깝다. 누군가 당시의 미-쿠바 미사일 사태 때 보여줬던 케네디 대통령의 선택을 윤석열 후보의 ‘선제타격’론이 이어받고 있다고 얘기하는 모양이다. 불행하게도 윤석열 후보가 보여 준 지금까지의 여러 행태는 케네디만큼 군사, 외교적 면에서 방대하면서도 종합적인 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책의 몇 가지 대목들이 눈에 띄는데 이런 얘기들이다. “핵 시대에 대통령은 군대를 ‘지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다. 매일, 때로는 매분 통제할 수 있(는 지적 능력, 방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단순하게 물리적으로만 비교해 봐도 케네디와 윤석열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 케네디는 2차 대전 때 해군으로 참전했지만 윤 후보는 부동시라는 불명확한 이유로 면제를 받았다. 한 사람은 군사문화를 알고 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케네디는 외교라는 복잡한 정치를 공부하고 경험하며 성장한 정치인이지만(케네디의 부친은 주영국 미국 대사를 지냈다.) 윤석열은 안타깝게도 그렇게까지 배울 조건과 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케네디는 확전으로 이어지는 군사적 선택을 최소화하려고 했지만(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베트남전도 조기에 종식됐을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후보는 그걸 극대화하는 쪽으로 선택하려 한다. 케네디는 미사일 위기를 ①미국의 터키 배치 미사일 철수 ②쿠바 불가침 약속 ③소련의 쿠바 배치 미사일 철수라는 단계적 협상으로 돌파한다. 하지만 윤석열의 ‘선제타격론’은 자칫 한반도의 내전이 미-중간 미-러 간 대전으로 이어지게 할 공산이 크다. 3차 대전이다. 무엇보다 미-중간 무역 갈등은 늘 화약고 앞에서 서성거리는 느낌을 주는 시대이다. 그러니 대북 선제타격론은 방어와 확전 방지의 구체적인 전략전술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오히려 세계 대전을 도발하는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문제는 SNS에 마치 애들마냥 단 네 글자로 올리며 희희낙락할 ‘꺼리’가 아니다. 미국 군사 전문가들조차 윤석열의 군사외교적 태도에 회의감을 갖는 이유다. 강경파 커티스 르메이의 부하이자 공군전략사령관인 파워란 이름의 인물은 비열하고 잔인하며 용서를 모르는데다 정신적으로 불안하기까지 했던 군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실로 더 큰 문제는 그가 지나치게 많은 무기 체계를 통제하고 있고 특정 상황에서 그런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단 한 명의 잘못된 판단으로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는 상황이 벌어지면 모두가 공멸하는 최대의 비극이 벌어질 수 있었던 때라는 얘기다. 위대한 거장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1964년 이를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 나는 어떻게 폭탄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그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는가?’라는 긴 제목의 블랙코미디로 만들었다. 영화는 당시 백악관에서 벌어진 군 지휘부의 우스꽝스러운 대책 회의를 집중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속에서 통제 불능의 공군 장군 벅 터짓슨의 모습이 바로 공군 최고 지휘관 커티스 르메이이다. 국가는 무엇보다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상식적인 사람이 운영해야 한다. 무속에 기대거나 특정 분야의 전문지식만으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사람에게서 국가적 큰 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한국은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서 있다. 통탄할 일이다.
영화 ‘리코리쉬 피자’에는 리코리쉬 피자가 나오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를 암시하는 대사조차 나오지 않는다. 리코리쉬 피자는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판매망이 구축된 체인점 레코드 숍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런 뜻이 없는 척 미국인들, 특히 7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 ‘리코리쉬 피자’가 과거의 얘기를 하는 작품이란 걸 알게 만든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영화 제목이 ‘난다랑’인 셈이다. 난다랑은1980년대 초중반 서울 여기저기서 성업했던 카페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리코리쉬 피자’는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 개리 고츠만의 실제 성장담을 극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츠만은 ‘나의 그리스식 웨딩’, ‘맘마미아’, ‘폴라엑스’, ‘더 파크랜드’ 등을 제작한 인물이다. 개리 고츠만과 이 영화를 만든 폴 토마스 앤더슨은 가까운 사이다. 고츠만은 1952년생, 앤더슨은 1970년생이다. ‘리코리쉬 피자’의 주인공 이름은 개리이며 그의 15살 때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아마도 개리 고츠만은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 평소 ‘라떼에는(‘나 때에는’을 우습게 표현한 말)’ 방식으로 수다를 떨곤 했었을 것이다. 그걸 평소 귀담아 듣던 폴 토마스 앤더슨이 어느 날 진짜로 이야기를 엮어 낸 것이다. ‘리코리쉬 피자’의 개리(쿠퍼 호프만, 약물사고로 사망한 할리우드의 위대한 배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아들)는 15살이다. 아역배우를 하고 있는 중인데 끝물이다. 이제 덩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당연히 CF 출연도 하면서 부모 세대만큼, 부모 세대 이상으로 돈을 번다. 개리는 광고 문안도 곧잘 쓰는 등 어린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사업 수완이 만만치 않다. 그는 결국 청소년임에도 물침대 사업을 벌인다. 이 개리란 아이가 흠뻑 빠진 여자가 알라나(알라나 하임. 하임 밴드의 멤버로 하임 밴드는 시스터 그룹이다. 알라나는 그중 막내)인데 이 친구는 25살이다. 15살 남자 아이와 25살 여자는 안 그러는 척 밀고 당기는 연애를 시작하며 영화는 이 둘의 성장기를 그린다. 이 영화가 레트로-하이틴 청춘물이라는 얘기다. ‘리코리쉬 피자’를 좀 더 재미있게 즐기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간중간에 숨겨져 있는 그림들, 그 퍼즐들을 풀어 나가야 한다. 극 전반부 주인공 개리가 출연하는 어떤 老여배우의 버라이어티 쇼 무대는 루실 볼의 것이다. 루실 볼(1911~1989)은 195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TV스타이며 국내에도 방영된 적이 있는 시트콤 ‘아이 러브 루시’의 주인공이다. ‘리코리쉬 피자’에 나오는 장면은 루실 볼이 전성기를 지낸 후 캘리포니아에서 펼쳤던 토크 쇼 무대를 극화한 것으로 보인다. 여주인공 알라나가 10살이나 어린 개리에게 보란 듯이 ‘노친네’들 옆에 앉아 그들과 즐기는 척 군다. 이때 나오는 잭 홀든(숀 펜)은 70년대 당시엔 원로 배우 급이 된 윌리엄 홀든이다. 바에서 그를 만나 너스레를 떠는 친구 렉스(톰 웨이츠)는 미키 루니 같은 배우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술을 마시며 ‘도곡산! 도곡산!’하고 구호를 외치는데 이건 윌리엄 홀든의 1954년 출연작 ‘원한의 도곡리다리’를 의미한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홀든과 그레이스 켈리, 미키 루니 등이 출연했다. 개리와 친구들, 알라나가 물침대를 배달하는 할리우드 배우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는 아마도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존 피터스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얘기를 하는데 크리스토퍼슨과 스트라이샌드는 1976년 ‘스타 탄생’에 같이 출연했다. 이번 영화에서 존 피터스 역을 맡은 브래들리 쿠퍼는 레이디 가가와 2018년 ‘스타 탄생’을 리메이크한 ‘스타 이즈 본’에 출연하기도 했다. ‘리코리쉬 피자’는 이렇게 얽히고설킨 할리우드의 관계사를 살짝살짝 숨겨 놓고 있어 그 맥을 알고 보면 아주 흥미롭다. 영화 ‘리코리쉬 피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미국의 70년대 문화와 정치사회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하다. 영화는 콘텍스트를 이해해야 텍스트가 읽힐 때가 많은데, 이 영화가 전형적으로 그렇다. 영화 속 존 피터스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 얘기는 자동차 주유 때문에 빚어지는 이야기다. 이를 전후로 닉슨의 국민 담화가 TV로 중계되는 장면이 나온다. 1973년 1차 석유파동을 전후해서 벌어졌던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1차 석유파동은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미국과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위해 석유 생산량을 의도적으로 줄이고 가격을 올린 것 때문에 시작됐다. 그러나 원초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제4차 중동전쟁 때문이었다. 세계는 언제 화약고로 변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시절이었으며 무엇보다 석유난으로 경제적 피해가 극심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닉슨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1973년은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국민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자진 하야를 결정하기 직전이다. ‘리코리쉬 피자’는 이렇게, 대내외적 혼란기에 청춘을 보냈던 사람의 눈으로 기록한 미국 현대사의 측면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리코리쉬 피자’를 보면 들게 되는 생각 중 가장 큰 의문 아닌 의문은 ‘왜 1970년대인가?’다.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의 상당수가 1970년대, 더 나아가 1960년대에 대한 시대적 회고나 향수를 보일 때가 많다. 1970년생인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 1970년대는 무엇인가. 할리우드와 미국에게 70년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우리 모두에게 70년대는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가장 자유롭고, 미래비전의 가치가 어떤 방식으로든 유지됐던, 그럼으로써 희망이 남아 있었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상과 사조(思潮, 예컨대 히피즘도 그중 하나이다), 사회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다양한 예술이 꽃피웠던 시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가장 순수했던 정신을 지니고 있었던 시대였다. 실제로 미국인들 중 상당수가 1968년 로버트 케네디 암살 이후, 일명 아메리칸 드림은 끝이 났으며 미국의 미래는 거기서 멈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계 지식인들 중 상당수 역시 19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에 벌어진 프랑스 6.8혁명의 실패가 사실상 인류 발전의 전면적 후퇴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는, 아는 사람들에게는, 인간문명과 문화가 최고조였던 시절을 의미한다. 미국은 1980년대 레이건의 등장 이후 급격하게 보수 자본 반동화됐다. 세계도 마찬가지다. 소련 블록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급격한 세계화는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했다. 사람들의 삶의 질과 만족도가 하향평준화 되기 시작했다. ‘리코리쉬 피자’는 그 시절에 대한 복고를 강렬하게 갈구하는 듯한 영화이다 이는 거꾸로 지금의 시대가 1970년대의 끝자락도 따라가지 못함을 보여 준다. 영화의 웃음 뒤에는 그런 자조와 회한이 담겨져 있다. ‘리코리쉬 피자’는 결국 그리움에 대한 영화다. 그러한 한편으로는 애잔하고 슬픈 정서가 느껴진다. 그걸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당신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자, 당신은 어느 쪽인가.
정치하는 것과 연애하는 것은 사실,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너무 사랑해서 미워하고 또 너무 미워해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신파는 정치의 영역에서나 연애의 과정에서 똑같이 벌어진다. 이런 식의 대사는, 그것만 잘라서 들으면 도대체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정치인지 연애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당신이 여기까지 오는 데 오로지 당신 자신 혼자 힘으로 그렇게 된 줄 알아?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 그런데 당신이 이럴 수 있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자 이건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아니면 남자가 남자에게 하는 얘기일까. ‘불한당 : 나쁜 놈들의 세상’부터 ‘노골적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담아내고 있는 변성현 감독은 신작 ‘킹메이커’에서도 정치판 두 남자의 얘기를 역시 ‘브로맨스(남자 간의 특별한 감성. 우정을 넘어서는 무엇)’의 빛깔로 그려낸다. 유독 이번 영화에는 의도적으로 게이 감성을 곳곳에 심어 놓는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역의 조우진은 완벽한 여성적 캐릭터이다. 조우진은 이후락을 연기하고 있으며 실제 역사에서의 이후락 중정부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킹메이커’는 1960~70년대의 한국 정치사를 모티프로 한다. 알려진 바대로 김대중의 정치 인생 중의 전반부를 다룬다. 그가 1961년 강원도 인제에서 초선으로 정치권에 데뷔하는 장면을 시작으로(하지만 5.16 쿠데타로 의원 배지를 달지 못했다) 1967년 목포 재선에서 당선되는 과정, 그리고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1970년 전당대회 모습까지를 담는다. 영화에서 김대중은 김운범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설경구가 맡았다. 그를 돕는 남자, 특히 ‘그림자’로 불리며 뒤에서 은밀히 선거 ‘공작’을 펴 나가는 남자 서창대는 이선균이 맡는다. 서창대의 실제 인물은 엄창록이며 그는 당시 네거티브 선거와 흑색선전의 1인자로 손꼽혔던, 배후의 정치인이었다. 자 이런 얘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 ‘킹메이커’는 두 가지 지점에서 기획과 연출의 갈림길이 존재했었음을 보여 준다. 영화는 철저하게 실존 인물의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다. 5,60대의 장년층은 단박에 영화 속 인물들을 과거 역사의 인물들로 오버랩 시킬 수가 있다. 유진산(박인환)이 나오고 김영삼(유재명)과 이철승(이해영)이 나온다. 배우 윤경호가 맡은 역은 누가 봐도 박정희의 권력 찬탈을 돕고 그의 초기 집권기를 같이 했던, 무식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모습이다. 조우진은 위의 얘기대로 박정희가 김형욱을 ‘숙청’하고 그 자리를 메운 이후락의 모습이다. 영화에는 평생 김대중의 좌청룡 우백호였던 권노갑과 한화갑의 모습도 나오는데 배우 김성오와 전배수가 그들이다. 당연히 박정희(김종수)도 나온다. 특별출연한 배종옥은 이희호 여사 역을 해낸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실재하는 인물들, 아직 실존해 있는 인물을 그린 것을 넘어서서 60년대와 70년의 한국 정치사를 거의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역사를 얼마만큼 인지하고 있느냐가 이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느냐, 아니냐를 가르는 관전 포인트가 된다. 특히 유진산과 양 김(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이철승이 보여 준 삼각, 사각 관계의 복잡성은 60년대 후반과 70년 당시에도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했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였다. 이들의 복잡오묘한 정치적 거래는 영화 ‘킹메이커’의 백미를 장식한다. 그래서 실제 이야기를 알고 보는 사람들은 영화가 백배 흥미진진하다. 자,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2,30대 관객들 가운데 유진산과 이철승을 아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영삼이 누군지도 모르는 세대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가까스로 김대중은 안다고 쳐도 김형욱이니 이후락이니 등은 더욱 더 언감생심이다. 사람에 대해서 모르면 그 사람이 가졌던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역사적 인물을 모르면 그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진다. 영화 ‘킹메이커’가 실재했던 인물을 다루면서도 배역 인물을 다 바꾼 것, 심지어 브로맨스의 설정을 집어넣고 다소 과장됐을 법한 여성적 남성 캐릭터를 배치한 것도 그 같은 판단 때문이다. 흑백의 역사에 컬러의 채색을 하는 것, 허구의 모습들을 삽입함으로써 영화를 먼저 영화‘만’으로 판단하게 하고 그 이상을 아는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그 이상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또 그런 사람들대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영화만 즐기든지, 아니면 영화 이상을 넘나들어 보든지 그건 보는 사람들, 보는 연령층대로 각자가 판단하라는 것이다. 이 영화를 기획한 이정세와 감독을 한 변성현의 영리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영화의 역사적 고증은 실로 높은 점수를 줘도 모자람이 없다. 특히 공간의 연출은 세트, CG와 버무려져서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1967년 목포 합동유세 장면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김대중의 캐릭터(심지어 공화당의 김병삼 캐릭터)는 물론, 극중 인물들의 의상과 분장, 유달산과 삼학산과 영산강을 배경으로 하는 유세 공간의 미술 감각 등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진부하지만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점을 톡톡히 보여 준다. 특히 1972년의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박정희에 맞서 김대중이 보여 준 장충동 유세 장면은 그 시대를 아는 사람들에겐 ‘판박이’ 소리를 들을만할 것이다(당시 장충동 연설에는 서울 시민 100만 명이 몰렸으며 이에 겁먹은 박정희 측이 온갖 부정선거로 권력을 유지하려 애썼고 이후 김대중 납치 사건 등을 일으키며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까지 꾸미게 된다. 그 이후의 역사는 YH여공 사건을 비롯해 부마항쟁 그리고 10·26 박정희 암살로 이어진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엄창록=이선균=서창대’가 행하는 흑색선전의 ‘마술’을 재현해 내는 부분이 이 영화가 선보이는 압권 가운데 압권이다. 특히 그가 김대중과 갈라선 이후 1972년 대선에서 조작해 낸 지역감정은 그 이후 한국 정치사에도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엄창록은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을 버리고 노태우 쪽에서 일한다). ‘킹메이커’의 오프닝 신은 서창대가 자신을 찾아 온 농가의 남자(진선규)로부터 하소연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남자는 암탉을 5마리 키우는데 ‘얘들이 낳는 계란을 옆집 청년 놈이 매일 한 알, 두 알씩 훔쳐간다’는 것이다.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이 없어 고민이하는 남자에게 서창대는 꼼수의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꼼수는 이후 김운범의 선거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반복 재생된다. 그때마다 김운범은 서창대에게 ‘임자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는 것 같다’며 그를 내치기를 거듭한다. 자신의 선거 공작이 이룬 대가로 지역구 공천을 원했던 서창대는 결국 김운범과 갈라서기를 결심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 본 중정부장의 또 다른 공작도 한몫을 한다. 김운범과 서창대는 각각 상대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심지어 흠모를 넘어서 애정의 단계까지 와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는 합치되지 못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는 현실 정치론과 지더라도 원칙과 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정치론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당신이 여기에 오르기까지 당신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대화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정치나 연애나 사랑이나 어쩌면 다 신파일 뿐이다. 심순애가 김중배의 금가락지를 좇아가느냐, 아니면 이수일과의 순정을 지키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 사람들은 심순애가 이수일을 버린 것에 대해 두고두고 욕을 하지만 현실의 사람들, 자신들 역시 늘 그렇게 돈을 선택한다는 것을 안다. 영화 ‘킹메이커’를 보면서 서창대가 일관되게 정치의 ‘흥행성’을 주장하는 모습보다 그를 내치지도, 품 안에 안기도 어려워서, 고심하는, 그렇게 ‘정치의 예술성’을 추구하는 김운범의 모습에 더 마음이 기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선택은 쉽다. 선택하지 못하고 왔다갔다하는 모습에 진실이 더 가까이 있다. 김대중이 늘 그랬을 것이다. ‘킹메이커’를 보고 있으면 실로 김대중이 그리워진다. 지금의 한국 정치판이 연상되면서 더욱 더 그런 마음이 든다. 지금, 우리에게 김대중과 같은 인물은 누구인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술을 마셔 본 사람은 안다. 사람들은 외로워서 술을 마신다는 걸.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사실은 더욱 더 고독해진다는 걸. 그런데 그 단절감의 원인은 결국 인간 존재의 근원과 같은 것이라는 걸. 때문에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혼자라는 고립감에 더욱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걸. 그런데 바로 그 사실을 영화는 진작 알아 왔던 셈이다. 알코올이란 게 워낙 중독 가능성이 높고 또 그게 매우 위험하다는 걸 영화는 경고 ‘따위’보다는 그 드라마틱한 요소에 집중하는 쪽이었다. 영국 마이크 피기스가 만든 1996년작 ‘리빙 라스베가스’의 벤(니콜라스 케이지)은 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래서 결국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 것을 선택한다. 1962년작 ‘술과 장미의 나날’의 조(잭 레먼)와 크리스틴(리 레믹)도 마찬가지다. 외롭지 않으려고 술을 시작해서, 결국 상대방이 지닌 고독의 심연을 더욱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고 지금 얘기하려는 덴마크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신작 ‘어나더 라운드’가 그렇게나 우울한, 잿빛의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 반대다. 아니 사실은 반대인 척 한다. 하지만 진면목은 꽤나 슬픈 이야기이다. 그런데 꼭 슬프다고 얘기해서는 안 될 작품이다. 결국은 뭔가를 극복해 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삶의 진실, 그 실체를 깨달아 가는, 성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나더 라운드’를 보고 나면 처음엔 술이 한잔 하고 싶어진다. 어찌 보면 꽤 괜찮은 ‘술 영화’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 욕구는 금방 가라앉는다. 오히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고 싶게 만든다. 가슴 속 응어리를 후-하고 내뱉고 싶어진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개인의 상처, 트라우마, 일상의 스트레스가 새삼 각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이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술과 담배보다 사람을 먼저 만나고 싶게 만든다. 얘기를 나누고 상대의 마음을 얻고 앞에 있는 사람, 그 실체를 손으로 만지고 싶게 만든다. 사람들에게는 늘 술과 섹스가 급할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따뜻한 포옹과 달콤한 키스이다. 사람들은 죄, 결핍의 존재들이다. 사람들은 늘 스스로의 욕망의 근원을 인식하지 못해 헛다리를 짚는다.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해결책을 찾겠다며 급하게 서두르고 그게 결국 모든, 그리고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된다. ‘어나더 라운드’의 주인공 마르틴과 그의 친구들이 그렇다. ‘어나더 라운드’는 그래서 비극은 아니지만 비극이고, 비극이지만 비극인 ‘척’하며, 그래서 마침내 비극은 아니게 되지만, 그렇다고 햇살 가득한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작품도 아니다. 술과 인생을 아는 사람은 안다. 살아간다는 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며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또 결코, 슬픈 결말을 맞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차피 인생이란 슬픔과 괴로움, 기쁨과 즐거움 사이에서의 교묘하고 기이한 줄타기의 연속일 뿐이다. 우리말 ‘한잔 더’로 해석되는 제목의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술꾼 친구 네 명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 중에서 역사 과목을 가르치는 마르틴(매즈 미켈슨)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모두 같은 고등학교 선생인 이들은 이제 갓 마흔이 됐다. 다른 친구들, 톰뮈(토마스 보 라센)와 페테르(라르스 란데), 니콜라이(마그누스밀랑)는 각각 체육과 음악, 심리학 선생들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 다소 다들 겉늙어 보인다. 살아가는 데 지치면 사람들은 늙는다. 먼저 마음이 늙고 그 다음 ‘반드시’ 몸이 늙는다.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이들 모두는 활력을 잃었다. 매너리즘에 빠졌으며 그래서 늘 일상의 여러 일들에 허덕인다. 학생들은, 젊고 어린 애들이라면 어디나 그렇지만, 말을 안 듣는다. 제멋대로들이다. 선생이 가르치는 교육 수준이 이상하거나 엉망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틴은 어느 날 학부모로부터 역사 수업에 이상이 있다, 입시나 진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는다. 공개적인 대책회의까지 열리는데 이건 거의 인민재판 수준이다. 굴욕이다. 마르틴은 더욱더 실의에 빠진다. 집안에서도 그는 아예 존재감이 없다. 야근 근무가 잦은 아내 아니카(마리아 보네비)는 그를 유령 취급한 지 오래다. 아이들도 아빠가 이제는 있으려니 없으려니 한다. 그가 바깥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당하며 사는지 이들은 별 관심이 없다. 아니 아예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근데 이건 아빠나 남편 책임인가, 아니면 아이들과 아내의 잘못인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언제부터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서로 변화의 모멘텀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일상의 관계가 ‘의무적’으로 가는 순간 삶은 종착역을 향해 가는 기차마냥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견딜 수 없는 지루함과 무의미함에서 허우적댄다. 니콜라이의 생일날 간만에 모인 이들 네 친구는 그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는다. 노르웨이 심리학자 판 스코르데루의 연구 결과이다. ‘모든 인간은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 그 근거까지 이들 대화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어쨌든 판 스코르데루 박사의 결론은 그래서, ‘인간들 모두 이 결핍된 농도를 유지하고 살아가면 일상이 창의적이고 용감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틴과 친구들은 이 심리학자의 연구를 신뢰해 보기로 한다. 측정기까지 사다 놓고 이들은 매 순간 0.05%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와인 두 세잔이나 위스키 한 잔 정도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들은 활기를 되찾는다. 매 수업이 흥미로움의 연속이 된다. 학생들도 좋아라한다. 수업 내용도 풍부해진다. 알코올로 인해 수다가 늘어나듯이 이들의 일상도 다양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술을 마시면 쉽게 너그러워지듯, 이들은 학생들의 마음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아이들과 가까워지게 된다. 마르틴이 가족 관계를 회복해 가기 시작하는 건 물어보나 마나 한 일이다. 심지어 마르틴은 오랜 섹스리스 관계였던 아내와 따뜻하고 격렬한 잠자리까지 갖게 된다. 아내가 묻는다. “당신 무슨 일 있어?” 그러나, 실로 ‘그런데 말입니다’이다. 판 스코르데루가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어떤 방식으로 0.05%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유지하느냐이다. 이걸 매 순간 알코올을 주입해야 한다는 건지, 특정 시간만 그렇게 유지하면 된다는 건지, 그건 마치 ‘케바케(case by case)’인 것처럼 보인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결코 0.05%에서 멈추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친구 넷은 점점 더,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술에 중독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은 희극에서 비극으로, 비극에서 희극으로, 그리고 다시 비극으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나더 라운드’는 결코 행복한 영화가 아니다. 행복이란 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 혹은 연구결과의 수치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거나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일종의 깨달음에서 온다. 인간은 어떻게든 쉽게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역설의 행복론과도 같은 영화이다. ‘어나더 라운드’는 세상에 대해,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에 대해 관조하게 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자신의 마음속 괴물을 응시해 본 적이 없거나, 응시하기를 피해 왔거나, 그래서 그 심연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상대를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당연히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어렵고, 소통불능이 되며, 그래서 결국 단절되고 고립된다. 인간 고독의 근원은 자신 스스로에게 있다. ‘어나더 라운드’가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착지 된다. 사람들은 자각이라는 비싼 비용 없이 쉽게 그 답을 찾으려고만 한다. 인생을 즐기려면 인생을 알아야 한다. 대가 없는 인생은 없는 법이다. 평소 술을 얼마나 드시는가.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혹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술 마시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 영화를 포기하면 안 될 일이다. 영화를 포기하면 사람을 버리게 되고 사람을 버리면 사랑을 잃는다. 사랑을 잃게 되면 결국 세상을 잃고 끝끝내는 자신을 잃게 된다. 이 영화의 인물들 나이를 주목해야 한다. 끽해야 마흔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다 그럴 때이다. 인생은 바닥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한번쯤 미치고, 한번쯤 ‘막 살아 볼’ 필요도 있다. 인생은 짧다. 술과 장미의 나날, 화양연화의 시기는 더더욱 짧다. 너무 고민하고 상심하지 말지어다. 뭘 또 그렇게까지. 모두들 어나더 라운드 하시기 바란다.
이런 식이라면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우리사회의 남녀 사이가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나라의 남녀간, 특히 젊은 남녀간의 사이가 현재, 너무 안 좋다. 사랑 따위는 언감생심이고 서로를 적대하고 증오하기까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서로를 멀리하고, 만나지 않으며. 연애도 별로이고, 결혼은 거의 계획이 없어서, 출산까지는 아예 생각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이런 식이라면 국가의 미래가 없다. 국가의 생산력은 급속하게 떨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잘못된 정보, 잘못된 세계관에 의해 현혹되고 길들여진 20대 남자들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들은 여성가족부, 비동의 간음죄나 비동의 강간죄 등이 남성역차별을 가져온다는 소아병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20대 여성들도 군대를 갔다 와야 하거나 그에 준하는 공적 업무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걸 위해서는 지금의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후보가 문제가 많고 아내와 그녀의 가족에 온갖 비리가 점철돼 있어도 남녀 역차별만 해결된다면 그건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우편향돼있고 일베화 된 지 오랜데 신문기자들 중 상당수가 2030 남자들이라는 점도 주목해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악화가 계속 악화를 구축중인 셈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성들에 대한 공격이 그 어떤 것보다 제1순위이고 이에 따라 여성들도 방어전을 구축하고 그에 맞서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자 간 새로운 미래를 위해 손을 잡고 함께 해 나갈 것을 기대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실로 큰일이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 같은 인물이 어떤 인터넷 신문 인터뷰에서 ‘문재인 같은 대통령이 다시는 나오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그건 실로 치매성 노인의 헛소리를 넘어 다분히 20대 남자들의 그릇된 정권교체 욕망에 편승하려는 치사한 짓이다. 극단의 기회주의적 작태다. 20대 남자들의 대대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그건 어쩌면 역설적으로 쉽다. 여성들이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여성들이 훨씬 공부를 잘하고 지성 지수가 높으며 사회적 기능과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일찌감치 입증돼 왔던 터이다.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육체적 기능이 앞서는 등등 현대사회에서 따로 맡아서 할 부분이 적지 않다. 국방의 의무도 그중 하나이다. 선진국형 국가에서 화이트 컬러 여성과 블루 컬러 남성의 결합이 늘어나는 이유다. 서로가 성적 역할과 그 사회적 배분을 잘 찾아 하면 된다. 남편은 데크 설치 노동자인데 아내는 변호사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남자들이 자존심 상해하거나 가부장으로서 위엄이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잘못된 계급계층 의식, 비뚤어진 엘리트주의가 지금의 남녀 문제를 만든 셈이며 한국의 정치판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귀는 남자에게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심리치료를 받다가 아예 치유 심리학을 공부한 한 여성은 뒤늦은 미국 유학 중에 만난 13살 연하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 남자는 애초부터 여자의 우월을 받아들였고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를 늘 포용하고 아끼며 산다. 이들은 각자의 일과 각자의 영역을 잘 지키며 살아간다. 현대를 살아가는 남녀간 행복의 시작은 남성들의 자각과 수용에 있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어떤 부분에서는 열등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국내에서 가장 강성이라는 한 공공 노조의 사무국장은 한국인 3세이다. 미국 동부에서 태어난 그녀는 현지의 유수 대학, 예컨대 NYU 같은 곳에서 석사와 박사 등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 그녀는 세계 노동운동의 약한 고리가 한국에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레닌주의자이다. 그런 그녀가 한국에서 같이 살고 있는 파트너는 트럭 기사이다. 이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이 살아가고, 노동운동을 하는 데 있어 각자가 갖고 있는 학력과 지력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다국적 기업의 임원도 영국 유수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이다. 이 여성 역시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육체 노동자와 살고 있다. 그녀가 그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느끼는 유일한 장애는 자신의 집안의 반대이지 상대 남자와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는 여자의 고학력을 불편해 하지 않는다. 잘 찾아보면 이런 사례들이 적지 않다. 남녀 간의 문제를 한때의, 있을 수 있는 갈등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국가의 모든 사안이 좌지우지되고 있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단순히 경제적 혜택이나 일부 법률의 개정에서 찾으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하바드를 나왔다는 이준석 같은 인간이 그 정도의 상상력을 내세워서는 더더군다나 치졸한 짓이다. 보다 근본적이고 문화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예컨대 멜로영화나 멜로드라마의 프레임부터 바꿔야 하는 식이다. 전계수 감독이 만든 2018년작 영화 ‘버티고’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여성과 그 고층빌딩의 유리창 닦이 간에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이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어쩌면, 우리사회의 이상 조짐은 시작된 셈이다. 한국의 2030 남녀는 싸움과 적대를 멈추고 이제 사랑해야 한다. 제발 그들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시작부터 이상한 얘기지만 ‘하우스 오브 구찌’는 그렇게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근데 그렇다고 아주 엉망인, 보기가 민망할 정도라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미리 자락을 깔고 리뷰를 시작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할리우드의 거장이자, 국내에도 영화적 팬덤을 깨나 자랑하는 리들리 스콧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이다. 스콧 영화치고 그리 걸작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그의 무수한 전작들, ‘블레이드 러너’로부터 시작해 ‘에일리언’과 ‘델마와 루이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와 ‘에일리언: 커버넌트’ 등을 생각하면 이번 영화의 질감이 좀 떨어진다는 얘기다. 그는 영국 왕립예술아카데미 출신이며 기사 작위를 갖고 있을 정도다. 깨나 지식인이며 그의 영화는 대개가 늘 철학적이다. 실로 리들리 스콧 경(卿)이라 불릴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 85세이다. 고령이다. 신선하고 도발적인 영화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영화를 만들 때이긴 하다. 그런 점에서는 이번 작품이 ‘용서’가 되는 측면이 있다. 리들리 스콧의 ‘하우스 오브 구찌’를 통해 영화적 고관여층, 그러니까 마니아급 관객들은 구찌家의 비극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그 ‘진짜’ 연원을 알고 싶었고 또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는 그런 심층이 좀 없다. 그러니까 구찌가의 며느리였던 파트리치아(레이디 가가)의 마음 속 어떤 폭풍, 그 어떤 심연의 괴물이 자신의 남편이었던 마우리찌오(아담 드라이버)를 청부 살해하게 했을까에 대한 실체를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단순하지가 않다. 너무 복잡해서 때로는 사람을 죽이고도 이해를 얻는다. 아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게 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우발적이지 않다. 죽이는 그 행위 자체보다 죽이기까지 그 과정이 더 크게 작동하기 때문에 동기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사람은 너무 사랑해서 혹은 너무 미워하고 증오해서 상대를 죽이기보다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더 나아가 그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상대를 세상에서 없애려고 한다. 그렇다면 파트리치아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남편의 사업체를 통째로 갖는 것? 아니면 남편의 사랑을 독점하는 것? 아니면 남편 자체를 지배하는 것? 아니면 남편의 집안, 곧 구찌 가문의 모든 것을 승계 받는 것? 그 막대한 재산을 독차지 하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그 모든 것 때문이었을까. 파트리치아의 마음속에는 언제부터 마우리찌오를 죽일 생각이 싹트게 된 것이었을까. ‘하우스 오브 구찌’는 1995년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을 맨 후 순위로 배치한다. 트럭 회사 딸이었던 여자가 세계적 패션 브랜드인 구찌의 아들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고 살아가는 과정을 전반부에 배치한다. 여자는 클럽에서 남자를 만나고 한눈에 반하기보다는 그가 구찌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남자의 아버지, 로돌프 구찌(제레미 아이언스)로부터의 냉대와 경멸을 참고 축하객 하나 없는 결혼식을 치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다 좋아. 같이 놀고, 같이 자고, 데리고 살아. 그런데 결혼만은 안 돼. 우리 집안의 유산은 물려줄 수 없어.” 아버지는 자신의 동생, 그러니까 마우리찌오의 삼촌인 알도 구찌(알 파치노)와 구찌의 모든 것을 5대5로 나눠 갖고 있다. 삼촌 알도는 조카에게 기회를 주려 한다. 그는 자신의 못난 아들이자 디자이너를 자처하는 파올로(자레드 레토)가 구찌의 명성을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친자식보다는 조카가 더 똑똑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런 와중에 형인 로돌프가 죽고 전 재산의 50%가 아들인 마우리찌오에게 승계되지만 그 과정이 깔끔하지가 못하게 된다. 마우리찌오는 막대한 세금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이라크 석유 재벌의 자본을 끌어 들이고, 그렇게 약화된 자신의 지분을 삼촌 알도와 사촌 파올로의 지분을 사실상 자신이 지배하는 것으로 대체하려 한다. 마우리찌오는 두 사람을 배신한다. 어찌 보면 구찌가의 모든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 과정에서 아내인 파트리치아가 깊이 관여했다. 그녀는 아직 심성이 약한 남편을 대신해 악역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자가 변한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성장한다. 생산력의 변화는 생산관계의 변화를 초래한다. 마우리찌오는 파트리치아가 회사 경영에 깊숙이 들어오는 것에 점점 불만을 느낀다. 게다가 그 즈음에 으레 그렇듯이 남자에게 새로운 여자, 파올라(카밀 코탄)가 생긴다. 이제 모든 위기는 폭발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다시 한 번 으레 그렇듯이, 불안에 휩싸인 여자는 점점 점술가에게 의존하기 시작한다. 파트리치아는 점쟁이인 피나(셀마 헤이엑)라는 여자와 남편을 죽일 청부 살해 업자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자, 리들리 스콧은 두 가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무려 27년 전 일이다. 2030 세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일일 수 있다. 그러니 팩트 중심으로, 시간 순으로 이야기를 보여 줄 필요도 느꼈을 것이다. 아니면 중간 중간의 깊은 ‘구멍’ –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천박한 여자로 봤던 계급계층의 심리적 갈등 부분이라거나 여자의 신분상승 욕구, 회사 소유지분과 ‘재산=돈=자본’은 혈육 간 관계조차 뛰어 넘는다는 그 만고의 진리, 겉으로는 유약해 보였으나 사실은 더 치밀하고 냉혹했던 마우리찌오의 속내, 사랑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자존심과 주도권으로 점철됐을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 등등 - 중의 하나에 더 천착할 것인가 했을 것이다. 파트리치아가 마우리찌오를 죽인 이유는 그가 그녀에게 모멸감을 줬기 때문일 수 있다. 그게 진짜 핵심일 수 있었다. 그런데 리들리 스콧은 그런 걸 다 제치고 앞의 것, 그러니까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쪽을 택해 영화를 만든 셈이 됐다. 그래서 비교적 ‘새끈한’ 영화를 만들기는 했으나 깊이 있고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지는 못한 셈이 됐다. 영화가 다소 지나치게 평면적인 이유다. 이 영화에 대한 해외 평점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로튼 토마토의 평점은 332건의 리뷰 중 63% 정도만이 좋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반면 국내 네이버 평점은 7.65로 과거사의 연원을 잘 모르거나 별로 관심이 없는 젊은 세대들은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별 네 개를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구찌 가의 얘기를 다루지만 구찌의 화려한 의상이나 장신구 등이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구찌 가가 소장하고 있다는 수많은 명화(名畵)들도 구스타프 클림트 정도만 나올 정도다. 아마도 영화 기획과 제작 과정에서 구찌 사(社)로부터 협조를 얻지 못했을 것이며 저작권 문제도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런웨이 장면도 후반 수석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 쇼 정도로만 처리됐다. 깊은 내용의 영화, 좀 더 화려한 볼거리의 영화를 기대했던 사람들 양쪽 모두에게서 불만의 목소리를 들을 만 한 셈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 90년대의 시대상과 그때를 살았던 인물들의 싱크로율이 백퍼센트에 가깝다는 점에서 영화는 꽤나 흥미롭다. 특히 사촌인 파올로 역을 한 자레드 레토는 처음엔 전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머리를 뽑고, 배의 살을 찌웠다. 자신의 원래 모습을 완전히 바꿔서 나온다. 삼촌 알도 역의 알 파치노도, 원래 이런 모습이었나 싶을 만큼 변신한 모습으로 나온다. 마우리찌오 역의 아담 드라이버도 말할 바가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같은 방송물에 익숙한 세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모양새의 작품이다. 레이디 가가가 어떻게 저런 연기를 펼쳤을까 싶겠지만 그녀가 명문 중의 명문이라는 NYU 출신이라는 점, 그것도 예술대학인 티시(Tisch School of the Arts)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레이디 가가는 거기서 연기를 전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중에는 어떤 평판이 들려도 한번쯤은 꼭 보고 싶게 하는 내용의 얘기들, 작품들이 있다. 구찌 가의 비극은 언제라도 듣고 싶은 비사(秘史)급 스토리이다. 인질로 잡힌 자신의 손자를 위한 몸값을 거부해 끝내 그의 귀를 잘리게 했던 자산가 폴 게티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 얘기도 ‘올 더 머니’란 제목으로 영화화 됐으며 그것 역시 리들리 스콧이 만들었다. 돈에 대한 욕망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들어도 좋으니 돈이 많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십수 년 전의 우리사회가 그랬고 지금이 또 그렇다. 세상이 온통 부동산과 블록체인 벼락부자 얘기로 채워진 듯이 보인다. ‘하우스 오브 구찌’는 그런 세상에서 이른바 적정량의 돈과 재산, 적절한 만족도의 삶과 명성이란 게 도무지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하게 해준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만고의 진리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지금 이 시기 한국에 묘한 동일화(同一化)를 준다. 영화는 늘 당대의 메시지와 함께 가는 법이다.
솔직히 ‘매트릭스’ 시리즈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렇게 봐도 무방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나왔다한들 사람들을 흥분시키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이 시리즈가 처음 나온 것이 1999년이다. 20년이 넘었다. 시간까지 오래됐다. 정확한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들마저 점차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번 4편이 인기를 얻지 못한 것, 더 나아가 나오느니만 못한 속편이었다는 둥의 비아냥을 받았던 것, 극장 안에서 몇 명 안되는 관객을 확인하는 건 마치 시리즈에 대한 부관참시를 하는 수준이라는 둥의 극악한 비난의 글까지 나왔던 것은 어쩌면 광범위한 의미로서의 무지 때문이다. ‘진실을 보지 못하면 저항이 없다’. 이번 ‘매트릭스4’에 나오는 대사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들은 ‘매트릭스’ 시리즈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관객 폭발=저항(지금과 같은 OTT시대의 극장에서)’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심리학자는 ‘매트릭스’ 시리즈를 철학자들에 대한 로르샤흐 검사라고 말한다. 로르샤흐 검사는 잉크 얼룩을 보여 주고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따라 사람의 심리 상태를 진단하는 정신분석의 용어이다. 철학자들은 이 영화로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 불교와 기독교,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한다. 윌리엄 어윈 등 철학자들은 결국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Matrix & Philosophy’와 같은 책을 통해 이 영화가 얼마나 깊은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는가를 설파하려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 시리즈의 내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중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아직 매트릭스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게 한 것이 지난 3편까지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번 4편은 극도의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 사람들은 매트릭스 안에서 여전히 살고 있되, 오히려 그곳에서 누리는 거짓의 안락함을 선택하고 있으며 실제 세계로의 탈출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트릭스4’는 그 이전의 작품에 비해 훨씬 더 정치학의 의미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묻고 있다. 당신이라면 어떤 약을 선택할 것인가. 빨간 약인가, 파란 약인가. 어떤 경우라도 진실을 알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행복인 것일까. 매트릭스 1, 2, 3에서 고도로 발달된 AI인공지능에 맞서 싸우던 전사들 상당수가 사망했다.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와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도 그랬다. 이들은 오랫동안 AI가 구축해 놓은 가상세계=매트릭스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네오의 가상세계 속 이름은 토마스 앤더슨이다.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밤에는 해커인 인물이었다. 때는 서기 2199년. 그런데 어느 날 모피어스(로렌스 피시번)란 인물을 만나 빨간 약을 먹고 나서부터 모든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가상세계와 달리 리얼 월드가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는 점점 AI에 맞서 싸우는 저항의 집단 ‘시온’의 지도자가 된다. 영화에서 모피어스는 네오를 ‘그’라고 믿는다. 네오(NEO)의 영어 이름을 거꾸로 읽으면 그(ONE)가 된다. 그를 사랑하고 흠모하는 여인 트리니티(TRINITY)는 삼위일체란 뜻의 이름의 인물이다. 저항 조직 시온은 시오니즘을 가리킨다. 영화는 애초에 상당 부분 기독교적 모티프를 지녔던 셈이다. 이번 ‘매트릭스4’에서 이들 주인공 모두가 부활한다. 부제 ‘리저렉션’이 가리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는 어떤 여인이 경찰에 쫓기는 와중에서도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자신을 공격하는 요원(시리즈 전편에 나오는 스미스라는 이름의 복제인간들)중에 모피어스가 있음을 알게 되고 힘을 합친다. 둘은 네오가 살아있다고 믿는다. 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트릭스와의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은 가상세계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는 현재 아주 유명한 게임 프로그래머이자 개발자이다. 그가 만든 세계적 게임이 바로 ‘매트릭스’ 시리즈다. 그는 종종 겪는 환상의 세계(자신을 둘러싼 모든 현실이 사실은 다 컴퓨터가 조장해 낸 거짓의 공간이자 존재들이라는 내용의)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정신분석 애널리스트(닐 패트릭 해리스)는 그가 미치지 않았다고 얘기하면서도 계속 그에게 파란 약을 처방해 준다. 파란 약을 먹으면서도 토마스 앤더슨은 자꾸 환각을 본다. 회사는 그에게 ‘매트릭스’ 게임 시즌4를 만들라고 종용한다. 회사 사장은 투자사인 워너 브라더스가 4편을 만들지 않으면 모든 계약을 취소하겠다는 말을 전한다. 토마스 앤더슨은 동료들과 4편 기획회의를 한다. 동료들은 매트릭스 4편의 콘셉트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이들은 매트릭스 시리즈의 특징 가운데서도 으뜸이 바로 ‘모호함’에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 소리친다.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하면서 이래야 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매트릭스의 내용이 어떻게 되는 거야?!라고 말이지” 그 과정에서 토마스 앤더슨의 정신착란은 더욱 더 심해진다. 그는 심신이 지칠 때마다 카페를 간다. 거기에는 그가 몰래 흠모하는 여인 티파니(캐리 앤 모스)가 다닌다. 그녀는 애가 셋인 유부녀이다. 그녀는 토마스 앤더슨과 수인사를 나누며 자신의 이름이 왜 티파니인지 말한다. “저의 어머니가 오드리 헵번을 좋아했어요.” 오드리 헵번의 가장 유명한 영화가 1961년 작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다. 티파니 역시 토마스 앤더슨처럼 다시 가상세계의 삶에 빠져서 살고 있다. 그러던 중 토마스 앤더슨은 또 다른 모피어스(야히아 압둘 마틴 2세)를 만난다. 앤더슨은 그가 건네는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서 다시 빨간 약을 먹는다. 그리고 자신을 지금의 가상세계에서 빼내려는 저항집단의 팀장급 리더 벅스(제시카 헨윅)를 따라 실재하는 세계로 돌아온다. 그는 왜 자신이 죽지 않았는지, 왜 온몸에 이런 저런 기계장치를 단 채 AI에 의해 정신이 지배당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는 세상을 구해 내는 데 있어 자신과 생체 에너지를 합쳐야만 하는 트리니티를 구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의 연인이다. 네오는 트리니티를 깊이 사랑한다. 큰 부상을 입고 결국 죽은 줄 알았던 트리니티 역시 AI가 살려낸 후 네오처럼 티파니라는 가상의 인물로 ‘사육’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4’의 얘기들은 상당히 모호하다. 헷갈린다. 꼼꼼히 보지 않으면, 앞선 3편을 기억 속에 되살려 내지 않으면 얘기의 실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것이 실제 세계의 얘기이고 어느 것이 가상세계의 얘기인지 분간이 안 간다. 가상세계도 한 가지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가상의 가상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그 경계가 어디이며 그것을 가르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매트릭스 시리즈가 가장 헷갈리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또, 어느 쪽이 사실인가가 뭐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 이 영화의 키포인트이기도 하다. 그 헷갈림 자체가 매트릭스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기억이 가상인가, 기억에 기반한 현실이 가상인가. 그게 그거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다소 소모적으로 보이는 의식 속의 철학적인 논쟁, 그것의 결론에 스스로 도달해가는 자유의 지적 관점 등등이야말로 이 시리즈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화두인 셈이다. ‘매트릭스’의 철학은 결국 인간의 무한한 자유의지가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며 그 자유의지 자체가 선을 향해있다는 긍정적 세계관에 있다. ‘매트릭스’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리는 척, 사실은 그 반대의 지점을 향해간다. 파란 약을 먹을 것인지, 빨간 약을 먹을 것인지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약을 ‘선택’할 것인지를 알고 있다. 선택이라는 우리의 실존적 행위가 전제되는 건 실재 세계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거나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실재 세계가 존재한다는) 진실을 깨닫지 못하면 (가상세계를 만드는 AI에게) 저항 할 수 없다’는 얘기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닐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국 진실(빨간 약)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고 주인공 네오가 수없이 회의하고 의심함에도 불구하고 그건 어느 정도 예정돼 있는 일이기도 한 셈이기 때문이다. 마치 기독교의 예정설(豫定設)과도 같이. 주옥같은 대사와 내용이 천지에 깔려있는 듯한 영화다. 사람들은 세상을 이진법으로 보고 있다는 식의 얘기가 대표적이다. 0과 1. 진실과 거짓. 나와 너. 남과 여. 현실 아니면 가상. 이분의 시선으로는 삶의 진실, 세상의 구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번 ‘매트릭스4’의 메시지이다. 세상의 모호함에 대한 비언어적 깨달음, 정신적 각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왜 살아있는 시체 취급을 받았는가. 사람들이 아직도 파란 약을 먹고 있어서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한심한 일이다.
클로이 모레츠 주연의 넷플릭스 영화 ‘마더/ 안드로이드’에는 ‘KOREA’가 두 번 언급된다. 안드로이드의 공격을 피해 살아 남기 위해 보스턴으로 가려는 주인공들은 궁극적으로는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겠다’고 말한다. 덧붙이기를 ‘거기가 가장 안전하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극 후반에 이들은 실제로 한국으로 가는 기회를 얻는다. 아이를 낳은 여주인공 G(조지아, 클로이 모레츠)는 두 다리를 잃은 아이의 아빠 샘(알지 스미스)과 함께 한국에서 온 요원 셋을 만나 갓 낳은 아이를 눈물과 함께 한국으로 보낸다. 특히 뒷 장면은 6·25 전쟁 후 숱한 전쟁고아를 미국으로 입양 보냈던 시대를 생각하면 이상한 데자뷔를 준다. 이제는 미국인들이 전쟁보다 더한 전쟁을 겪으면서 아이를 거꾸로 한국으로 보내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 AI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의 반란은 어쩌면 지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다만 이상한 것은 한국 쪽에서 나온 여성 두 명, 남성 한 명의 복장과 스타일인데 이들 모습이 남한보다는 북한 사람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이 영화를 만든 제작진의 디테일이 조금 떨어진다는 감을 준다. 그들에게는 남과 북이,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의 차이가 아직 구분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할리우드=미국 대중’이 현재 한국을 가장 안전한 나라로 꼽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분단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나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대우와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영화에 대한 설명을 잠깐 하자면 ‘마더/ 안드로이드’는 近미래의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다룬다. 인공지능 로봇인 안드로이드가 스스로 진화해 인간을 멸종시키려 한다. 미국은 순식간에 초토화 됐고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얘기의 상당 부분은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가 지은 『로봇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Rossum’s Univeral Robot』에서 가져왔다. 카렐 차페크의 이 소설은 1921년에 나온 것으로 인류 최초로 로봇이란 단어가 나오는 작품이다. 이후 모든 SF소설, 영화, 연극에 영감을 줬으며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대 걸작 『파운데이션』도 이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다. 소설 『RUR』은 4차 혁명기라는 요즘 다시 재조명되고 있으며 이 작품이 지닌 요체가 영화로 쓰인 것은 이번 ‘마더/ 안드로이드’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소설에서 인류는 결국 멸망하지만 영화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아이와 남자친구 없이 홀로 포틀랜드로 향한다. 원래 이들은 매사추세츠 출신이었다. 조지아(G)와 새무얼(샘)은 안드로이드 공격으로 펜실베이니아, 뉴욕 등을 오가며 노 맨스 랜드(무인지대)를 목숨을 걸고 통과한 후 보스턴에 도착한다. 그러나 거기도 역시 안드로이드의 공격을 받는다. 이곳 모두 미국 민주당의 아성의 공간이다. 미국이 현재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영화 속 ‘한국이 가장 안전한 나라’로 안다는 대사를 들으면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우리 스스로를 가장 불안한 국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거의 순전히 잘못된 언론과 기득권의 정치세력, 일부 오염된 지식인 집단 얘기다. 이들이 유포시킨 가짜 뉴스는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왜곡된 세계 인식을 주입시켰다. 백신을 들여 올 준비 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신 도입이 제일 늦다고 투덜, 백신을 다량으로 들여오면 이번엔 예산을 낭비했다고 난리, 바이러스의 변이가 확산됨에 따라 백신 주사의 회차를 늘리고 가속화하면 이번엔 또 그게 위험하다느니, 사람들이 백신 쇼크로 다수가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바깥의 사람들은 한국이 가장 안전하다고 하는데 국내의 보수적인 인사들은 한국이 가장 안전하지 못하며 그게 다 문재인 정권 탓이라며 이상한 목소리를 높인다. 이른바 반문 정서를 확산시켜 정권을 다시 가져온 후 보복의 정치를 하겠다는 심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많은 국민들이 현혹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 한 편을 가지고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겠다.그러나 영화는 세상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한다. 영화에서 어떤 현상을 언급한다는 것은 이미 그 같은 생각과 행동 양태가 어느 정도 일반화됐다는 의미이다. 영화 속 몇 마디 대사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그러나 2시간 안에 세상을 담아내야 하는 영화는 단 한 줄의 대사가 갖는 비중이 매우 높은 셈이다. 이 영화에서 한국이 두 번이나 언급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좀 더 이성에 기대는 쪽이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배운 자들이 하는 정치라면 무조건적인 불안 공포증을 만들어 혹세무민 하는 정치 양태를 보이면 안된다. 시대착오적이며 잘못된 권력 추구의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이성 대 反이성, 지성 대 反지성의 싸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경우는 투표하지 않을 자유도 자유인만큼 어느 쪽 진영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식의, 유례없는 냉소와 조소의 선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둘 다 싫다, 어느 쪽도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사실은 샤이(shy) 보수이거나 샤이 진보인 셈이다. ‘샤이’는 비겁과 위선을 의미한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될 일이다.
영화 ‘프랑스’의 제목이 프랑스인 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새로 개봉되는 프랑스 영화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는 프랑스 정치의 지난 20년, 그리고 프랑스 영화의 지난 20년이 어떻게 서로 조우하고 대구(對句)를 이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가 결코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정치가 때론 얼마나 영화적인 가를 보여준다. 영화는 정치이고 정치는 영화이다. 두 가지의 사전적 전제에 대해 일단 좀 풀고 가야 한다. 먼저 프랑스 정치의 지난 20년. 프랑스는 현재의 마크 롱 대통령으로 오기까지 우연과 사단을 꽤나 겪었다. 20년 밖을 슬쩍 보면 ‘코아비타숑(Cohabitation: 동거정부)’이긴 했어도 그럭저럭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프랑수아 미테랑(사회당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보수당 총리)의 결합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정확하게는 15년간), 그러니까 니콜라 사르코지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그리고 지금의 에마뉘엘 마크롱에 이르기까지 보수와 진보, 중도를 오가며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랑드 이후 가장 촉망받았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의 섹스 스캔들과 그의 몰락은 국민들 간에 퍼진 정치혐오증을 엄청나게 제고시켰다. 따라서 프랑스 정치는 단순히 우에서 좌, 좌에서 우로 왔다 갔다 했던 것만이 아니라 이른바 ‘프랑스식’ 전통의 자유와 민주주의, 곧 ‘1789년의 프랑스 혁명 - 60년대 68혁명’의 적통을 잇는 정신과 가치의 실종, 그 아노미를 겪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진단이다. 그런데 그건 프랑스 영화도 마찬가지다. 나름의 위기의식이 만만치 않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프랑스 영화는 늘 세계 영화문화 를 선도해 왔다. 영화운동의 원조는 늘 프랑스였다. 그런데 지금은 길을 잃었다. 가까스로 브루노 뒤몽 정도가 그 프랑스적 영화의 전통을 이어가려 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가 세상을 바꾸거나 뭔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프랑스 영화 역시 소모재로서 휘발되고 있을 뿐이다’라고 브루노 뒤몽은 생각한다. 영화 ‘프랑스’의 도입부는 그래서 마크롱의 기자회견으로 시작한다. 제목이 프랑스인 것과 첫 장면이 대통령 기자회견인 것만으로도 브루노 뒤몽이 국가나 정치의 단위인 프랑스와 영화적 의미의 프랑스를 어떻게 겹치게 하려는지, 그 의도를 엿볼 수가 있다. 마크롱의 기자회견에서 주인공 프랑스 드 뫼르는 첫 질문의 지명자가 된다. 프랑스 드 뫼르는 방송사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앵커다. 나름 유명한 인물이다. 스타다. 하지만 그녀는 대통령에게 질문을 하는 것 따위에는 실상 관심이 별로 없다. 그저 ‘첫 질문 지명자’가 되는 것이고 질문 후에는 어떤 내용의 답변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매니저와 낄낄대고 음탕한 제스처를 주고받을 뿐이다. 그것도 질문의 내용이 마크 롱 집권 초반에 일어난 대규모 시위 및 소요사태(일명 ‘노란 조끼 시위’를 말한다. 마크 롱은 환경오염 방지 대책의 일환으로 경유 23%, 휘발유 15%의 가격 인상을 단행했고 이에 반발해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한때 시위대 수가 30만 명까지 이르렀다)에 대한 것이었음에도 그러고 있다. 사회는 심각한데 언론은 노느라(섹스에 빠져 있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새다. 뒤몽은 그렇게 일갈하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탐사 보도 프로그램 앵커로서 프랑스 드 뫼르는 자진해서 분쟁지역을 자주 오간다. 북부 아프리카의 내전 지역이나 ISIS를 피해 해외로 넘어가려는 난민들의 배에 동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시청률을 위한 것이거나 기껏해야 ‘나 지금 이런 일 하고 있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프랑스 드 뫼르에게는 모든 것이 다 ‘쇼잉’이다. 그녀 자신도 그걸 잘 안다. 하지만 삶이란 게, 그리고 사회생활이란 게 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20년간 그녀는 그렇게 배워 왔다. 프랑스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 스노비즘(snobbism)의 절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프랑스 그녀도 일순간 회의에 빠져든다. 그래서 모든 걸 집어던지고 스위스로 휴양을 떠나기도 한다. 거기서 젊은 남자를 만나고 황홀한 외도의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남자 역시 사생활 폭로를 전문으로 하는 타블로이드 신문의 기자였을 뿐이다. 그녀는 ‘그런 인간쓰레기’에 의해 사생활이 낱낱이 까발려진다. 그 추문을 덮기 위해 그녀는 다시 화려한 앵커직으로 복귀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에게 조언이랍시고 옆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대는 매니저(블랑슈 가르댕)의 말이 가관이다. 이런 식이다. “아냐 아냐. 이제 너는 더 유명해질 거야. 소란은 곧 가라앉을 거야” 이럴진대 정치와 언론의 격이 떨어질 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 프랑스란 여자와 프랑스라는 국가의 자각과 성찰이 더디긴 해도,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브루노 뒤몽식 영화의 해법이다. 일단 드 뫼르에게는 크나큰 상실(喪失)의 사건이 터진다. 그 일을 겪은 후 그녀는 휴양지에서 만난 ‘젊은 놈’을 용서하려 한다. 그녀는 이제서야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말한다. “이젠 진보 따윈 없어. 이상 같은 것도 없어. 그냥 지금을 살아갈 뿐이야.” 사회적 진보니 따뜻한 보수니, 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뿐일 수 있다. 그런 거 다 허울 좋은 수사(修辭)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니 ‘여러분들. 그냥 당장을 열심히 느끼고, 살고, 즐기기를 바라요’라고 브루노 뒤몽은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실용적인 삶의 접근이 우선이라고 그는 사람들을 깨닫게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그 같은 뒤몽 식의 선택이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영화 ‘프랑스’는 프랑스 사회를 넘어서서 대선 정국의 혼란에 빠져 있는 여기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와 언론과 법제 시스템이 극단적으로 왜곡돼 있는 상황에서 우리 자신들, 시민들은 어떠한 사회적 가치와 삶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가. 바로 그런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루한가. 이 영화가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날, 그리고 허구헌 날, 재미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영화가 종종 재미가 없어도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의 시작은 프랑스이다. 할리우드가 아니다. 루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는 파리에서 ‘기차의 도착’,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등을 찍었다. 종주국인 만큼 프랑스는 늘 영화의 새로움, 혁신을 주도해 왔다. 1950~1970년대까지의 누벨바그를 주도했던 프랑수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의 영화들이 그랬다. ‘네 멋대로 해라’, ‘4백번의 구타’ 등이 있었다. 1980년대~2000년대는 누벨 이마쥬의 감독들이 전성기를 누렸다. 레오 카락스가 대표했다. 뤽 베송은 할리우드형 대중영화들을 만들었다. 그의 ‘레옹’은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2000년대, 특히 2010년대에는 뤽 베송류의 영화에 회의와 각성이 일었던 시기이다. 브루노 뒤몽과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들은 이른바 ‘프랑스적’ 영화의 복원을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이 둘은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뒤몽은 최근 ‘프랑스’라는 영화를 찍었다. 오디아르는 ‘러스트 앤 본’ 등의 영화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리고, 그래서, 마침내 2020년대에 이르자 급기야 ‘新인류’급에 해당하는 감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30대 여성감독 쥘리아 뒤쿠르노가 그렇다. 그녀의 영화 ‘티탄’에 나온 ‘갑툭튀’ 여배우 아가트 루셀도 그렇다. 어디서 이런 배우를 찾아냈을까. 이들 신세대는 과거의 누벨바그니 누벨 이마쥬를 다 뛰어 넘는다. 브루노 뒤몽의 영화와 자크 오디아르를 합치돼 매우 아방가르드하고 프로그레시브한 상상력을 덧칠한다. 영화가 기괴하고 이상한 데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며 외설의 경계(境界)를 넘나든다. 영화가 극히 위험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새로운 변화는 늘 경계(警戒)의 시선을 갖게 한다. 덥석 손을 잡게 하지 않는다. 사방의 눈치를 보게 만들며 겁을 집어 먹게 한다. 혁명의 시작은 사실 늘 공포이다. 프랑스 새 영화 ‘티탄’은 그런 영화다. 여주인공 알렉시아(아가트 루셀)가 옷을 훌렁훌렁 발가벗고 전면을 드러낸 채 눈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들의 ‘껍데기’를 비웃는 듯이 보일 때, 왠지 큰일의 전조(前兆)가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음이 느껴진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적어도 영화가 바뀌고 있다. 좀 더 작은 규모로 말하면 프랑스 영화만큼은 변화의 몸부림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진보는 파괴에서 온다. 생명은 늘 알을 깨고 나온다. 파란(波瀾)은 파란(破卵)을 통해야 한다. 영화 ‘티탄’의 줄거리(스포일러를 제외한)는 이렇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알렉시아는 어릴 때 행동과잉 증후군이 있었고, 아빠의 차를 타고 가면서 칭얼거리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 당연히 뇌를 크게 다쳤다. 그래서 머리에 티타늄을 박았는데 이게 결국 그녀를 이상성격의 괴물로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알렉시아처럼 자신이 남과 다르다, 스스로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실제로도 고립되고 사회화되지 못하며 동성이든 이성이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알렉시아는 의사인 아버지와 거의 남처럼 살아가며 폭주족들이 드나드는 라이브 바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며 살아간다. 알렉시아는 자신이 차라리 기계와 결합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종종 차 뒷좌석에서 자위를 하는데 마치 차와 섹스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실제로 차가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알렉시아는 ‘자신과 기계(자신이 최애 하는)=자동차’ 사이에 남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알렉시아가 자신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남자들을 가차 없이 죽이거나 그나마 용인하는 관계로 보였던 레즈비언 파트너도 결국 살해하는 건 그런 이상심리이자 이상성욕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 아닌 또 다른 자기가 별도의 다른 파트너에게 구애를 받거나 한눈을 파는 ‘꼴’을 보지 못하는 셈이다. 그녀 안에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는 얘기이다. 몇 건의 연쇄살인으로 당연히 알렉시아는 지명수배를 받는다. 그녀는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남장을 한다. 가슴도 가릴 수 있을 만큼 사이즈가 작다. 머리도 바짝 짧게 깎는다. 그런데 이때부터 진짜 문제가 발생한다. 그녀에게는 뜻하지 않은 아빠(뱅상 랭동)가 생기기 때문이다. ‘새’ 아빠는 소방대장이다. 이 남자는 새로 얻은 아들(사실은 오래전에 납치됐다가 간신히 되찾았다고 생각하는)을 자신의 소방대에서 일하게 한다. 그런데 알렉시아는 그 이전에 이미 이런 저런 난잡한 성관계로 임신을 한 상태이다. 배는 불러오고 남자 흉내를 내며 사는 것도 점점 한계에 봉착해간다. 게다가 새 아빠의 전처는 그런 몸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챈다. 가장 큰 문제는 알렉시아가 ‘새로운’ 아빠에게 부성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빠 역시 잃었던 부성을 되찾는다. 이 의사(擬似) 부자관계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이 높아진다. 남자와 여자이기 때문이다. 둘은 외형상으로는 동성 근친 관계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무엇보다 진실의 실체이다. 알렉시아는 살인범이다. 그것도 뚜렷한 동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일종의 사이코패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아빠의 역할을 계속 자임하고 나선다면 그건 사회의 근간, 흔히 말하는 법과 질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게 된다. 무엇보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쯤 되면 아수라장이다. 그런데 세상의 혼탁을 일소하고 정돈하기 위해서 사전에 아수라는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어쩌면 그런 과정을 통해 신인류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은 아닌가. 우리들 모두 의식적으로라도 아나키(anarchy)한 상상력,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한번쯤 용인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만연돼 있고 파시즘적 광기가 되살아나고 있으며 지구는 환경문제로 멸망 직전에 다다른, 지금과 같은 극단적 혼란의 시대에 세계 질서를 한번쯤 그렇게 무너뜨리고 새로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바벨탑을 아무리 공들여 쌓았다 한들, 그것이 하늘의 가르침을 역행하려 한다면 일단 부수고 봐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래야만 하늘의 노여움을 풀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영화 ‘티탄’이 추구하는 가치는 그 같은 부숨과 재건설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는 것일 수 있다. ‘티탄’은 무엇보다 관계의 재설정에 대한 화두를 꺼내 든다. 여자는 사람을 죽인다. 그녀를 거둬들인 늙은 남자의 직업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다.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던 여자는 자기가 불길 속에서, 혹은 위험 속에서 사람을 구하는 아이러니에 처한다. 남자는 어차피 죽을 자이든, 죽일 자이든 일단은 구하는 게 직업이다. 하지만 그의 딜레마는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아예 죽여서 나머지 다른 산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사람까지 살려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이다. 그건 결국 구인(求人)과 구원(救援)의 문제이다. 구원에 도달하는 것은 모순된 과정의 중첩을 통해서일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용서의 행위가 전제돼야 할 수 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구원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관계의 복원과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알렉시아는 남자가 자신이 아들이 아닌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남자가 알고 있는데 남자가 그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자신이 알고 있다는, 복잡한 심경의 상황에 놓인다. 쥘리아 뒤쿠르노가 원하는 것은 결국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다. 그녀는 새로운 사회와 세상은 새로운 인간(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인류는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존재와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예컨대 알렉시아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애를 갖게 된 것인가, 아니면 자동차와 섹스를 했던 만큼, 차의 애를 가진 것일까. 그렇다면 아이는 인간일까 자동차일까. 이제 젊은 상상력은 트랜스 섹스를 넘어서서 트랜스 휴먼의 단계로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알렉시아의 머리에 박혀 있는 티타늄은 어쩌면 모든 비극과 변화, 새로운 탄생의 시작을 알렸던 시그널일 수도 있겠다. 캐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크래쉬’를 연상시킨다. 거기서 여주인공(홀리 헌터)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차의 충돌을 통해 섹스의 오르가즘을 느끼려 한다. 그래서 점점 ‘충돌=죽음’에의 유혹에 빠진다. 문제는 점점 그 강도를 높이려 한다는 데에 있다. ‘티탄’은 그 ‘충돌의 쾌감’이 갖는 의미를 좀 더 내면화 하고 있는 작품이다. 쥘리아 뒤쿠르노 스스로 자신의 영화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무대에서 뒤쿠르노가 했던 수상소감 중 나온 표현이다. 영화가 괴물인 것은 사회가 괴물이고 사람 스스로 괴물이 됐기 때문이다. 세상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 영화는 없다. 단 한편도 그럴 수 있는 영화는 없다. ‘티탄’은 괴물의 세상에서 태어난 괴물의 아이 같은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