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중학교 졸업식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타쿠미 아사(하야세 이코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버려진 대야 같은 신세가 됐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는다. 성격이 다소 거칠고 직설적인 이모 코다이 마키오(아라가키 유이)는 아이에게 화난 목소리로 대야는 한자로 관(盥)이라고 쓴다며 관은 절구 구(臼)에 물 수(水), 접시 명(皿) 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명령하듯 말한다. 마키오는 죽은 언니 미노리(나카무라 유코)와 의절한 채 살아왔다. 그녀는 청소년 소설 작가인 듯이 보이고 작품이 웹툰 등으로 만들어지는 등 성공한 작가여서인지 자립해 살아가고 있다. 자립해서 독자적으로 산다는 건 독립적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바깥 세계는 차단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이기적인 고독일 수 있다. 당연히 이모 마키오와 조카 아사의 동거는 처음부터 심상치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세타 나츠키 감독의 ‘위국일기’는 야마시타 토모코의 순정만화 원작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왜 일본의 이야기 문화가 단행본 만화나 웹툰이 기반이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나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제 일본 사회의 특징 같은 것이 돼버린 지 오래이다. 일본의 단행본 만화책 시장은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1년에 7천억엔, 7조 규모다. 우리의 영화 시장 사이즈는 2조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구 대비 작은 시장은 아니라는 평가이다. 따라서 일본과 한국이 영상의 기반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위국일기’라는 영화의 제작은 그렇게 개별적인 세계(만화책은 혼자서 보는 것이니까)를 탐닉하는 일본인 특유의 전통에서 탄생한 서사(敍事)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위국(違國)이란 말은 국가가 망가졌다는 의미이다. 작게는 가정이 무너졌고 더 작게는 개인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현대 일본에서 위국(衛國)을 위해서는 어긋난 국가, 곧 위국(違國)을 버려야 하거나 고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위국(衛國)을 위해 개인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인가. 그 익숙하지 않은 애매하고 모순돼 보이는 상황에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은 불편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자신의 언니와 완전히 틀어진 채 불화의 삶을 살아온 주인공 마키오는 조카 아사를 두고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런 마키오 이모가 조카 아사는 짜증이 난다. 자신을 짜증 내 하는 아사를 두고 마키오는 성가셔 한다. 성가시고 짜증 나는 두 명의 관계는 대체로 좁혀질 수가 없다. 영화 ‘위국일기’는 이모와 조카의 동반 성장기를 그린다. 마키오는 충동적 육아를 통해 조금씩, 평생을 멀리해 왔던 언니의 마음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아사는 이모와의 삶, 타인과의 비자발적이면서도 강제된 일상을 통해 부모의 죽음, 그 상실의 상처를 조금씩 극복해 나간다. 두 사람 모두 개인의 관계를 통해 전체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거나 회복해 간다.(마키오는 극 후반에 자신과 자신의 언니를 구별해 키워야 했던 어머니에게 악수를 청한다.) 세상에는 늘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의 불행은 그 대체 불가능한 존재들이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엇인가로 대체돼야 한다는 점에 있다. 대체 불가능하지만 뭔가로 대체해야 할 때야말로 인생의 전환점이다. 가족은 주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만들고 형성해야 하는 관계이다. 사랑 역시 저절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하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공부하고 양보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키오는 아사를 통해 아사는 또 마키오를 통해 사랑과 배려를 배우고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며 그렇게 서서히 가족이 되어 간다. 위국은 결국 위인(違人)이어야 하며 개인을 구하지 못하는 사회는 국가를 구할 수 없으며 가족을 위해 싸우는 자들만이 국가를 위해 투쟁할 수 있다. 영화 ‘위국일기’라는 순정만화의 스토리가 궁극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모두 11권까지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순정만화를 2시간 안쪽의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다소 지루한 맛을 띠게 됐다. 원작의 캐릭터가 지닌 에피소드를 모두 다 제대로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 압축의 미학을 표현해 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민이었겠으나 연출 역량이 거기에까지는 따라가지 못한 듯이 보인다. 이럴 때는 두 가지이다. 원작을 그대로 살려 11부작 드라마로 만들든지 과감하게 캐릭터를 걷어 내든 아니면 합쳐 내든 해서 이야기를 두세 명의 캐릭터로 집중시키든지 해야 했을 것이다. 영화 ‘위국일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중간 지대에서 눈치를 보는 식이다. 일본 영화가 갖는 총체적인 문제, 곧 스토리를 어떻게 빌드 업하고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도 자기만의 매뉴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점이 더 좋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일본 영화는 밋밋하다고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일본 화의 대체적 평가의 분기점은 이런 데에서 나온다. 영화 ‘위국일기’는 패전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국가적 유 청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청소년기의 방황기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 사회의 순정만화 같은 영화이다. 그래도 이 작품을 비교적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국내에도 번역돼 있는 11권의 『위국일기』를 먼저 읽는 것도 좋겠다. 아마도 이 영화의 국내 수입은, 청소년들이나 젊은 관객들에게 퍼져 있는 만화 원작의 인기를 고려한 탓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화의 인기가 영화의 흥행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만화를 좋아하는 팬층은 영화가 원작의 풍부함을 잘 살려 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키오와 죽은 언니 미노리의 성격 차이는 확연하다. 미노리는 늘 깔끔하고 정돈을 잘하고 사는 스타일이다. 요리와 살림을 잘하고 딸을 키우는데 정성을 다했다. 동생인 마키오는 도무지 정리 정돈이란 걸 할 줄 모르고 사는, 오로지 나 살기에 바쁜(소설쓰기에만도 정신이 없는) 사람이다. 당연히 요리는 전혀 하지 못한다. 조카 아사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려면 유일한 단짝 친구인 다이고 나나(카호)를 초대해야 할 정도이다. 위국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개인부터 구해야 한다. 개인을 구할 줄 알아야 나라와 사회를 구한다. 사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개인의 가치가 국가나 전체의 가치보다 뒤처지는 사회는 열린 사회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가 극 중에서 부모가 죽은 아이 아사처럼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국가주의와 전체주의, 파시즘의 재 부활을 막는 것이다. 원작이든 영화든 아사의 부모를 ‘죽인 후’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든, 일본과 준하는 사회이든, 부모(국가)가 죽어야 새로운 세대(미래의 나라)가 산다. 일종의 살부살모(殺父殺母)의 의식, 이데올로기이다. 영화 ‘위국일기’가 단순한 순정만화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영국 유명 작가 닉 혼비의 소설 『벌거벗은 줄리엣』을 영화로 만든 작품으로 2018년 작품이지만 뒤늦게 국내 개봉된 ‘줄리엣, 네이키드’는 여러 층위를 깔고 있는 작품이다. 언뜻 보면 음악영화 같지만 기본적으로는 로맨스 물이고 조금 더 생각해서 들여다보면 인생에 대한 성찰을 그린 작품이다. 기대하지 않고 골랐다가 의외의 케이크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맨 위에는 초콜릿이 얹혀 있고 그 밑에는 달콤한 크림이, 그 안에는 푹신한 느낌의 빵이 들어 있는 것과 같다. 많이 먹으면 느끼하지만 적당히 한두 조각을 먹으면 뇌를 활성화시키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유의 영화, 곧 멜로 영화가 지닌 순기능적 특성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로맨스 작품을 봐야 한다. 아니 사실은 스스로 보려고들 한다. 그것이 아무리 판타지에 불과하고, 궁극의 거짓말인데다, 결국 헤어짐으로 끝나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러브 스토리에 열광한다. 사랑은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줄리엣, 네이키드’의 기본 로그 라인은 “1993년에 미니애폴리스의 한 클럽에서 공연 도중 갑자기 사라진 미국의 전설적인 록 가수 터커 크로우(에단 호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근데 그건 이 영화의 일부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야기의 시작은 영국 샌드클리프에 사는 한 대학교수 던컨(크리스 오다우드)이라는 남자가 포문을 연다. 이 남자, 터커 크로우의 광 팬이다. 15년 동안 그를 추적 중이다. 인터넷 동호회도 만들었다. 최초 음반부터 이런저런 글과 신문 자료까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수집하고, 회원들과 그것을 공유하며, 늘 터커를 놓고 흥분의 일상을 살아간다. 그에겐 터커의 유령을 쫓아다닌 15년 만큼 같이 동거해 온 연인 애니(로브 번)가 있다. 애니는 샌드클리프의 시(市)박물관의 학예사이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래된 유물, 몇 안 되는 유적(상어 눈 같은 것)과 자료를 뒤적이며 산다. 그녀는 곧 1964년을 모티프로 한 전시를 계획 중이다. 1964년에 영국 샌드클리프에서는 롤링스톤즈 공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샌드클리프는 한때는 북적였지만 지금은 쇠락한 해변 마을이다. 런던의 남쪽, 영국 해협과 그리 멀지 않고 대서양과 북해의 바다를 볼 수 있는 지형의 도시로 보이지만 실재하는 곳인 지가 다소 불분명할 만큼 잊힌 해변도시이다. (실제 촬영은 동부 켄트주의 타넷이란 섬의 소도시 브노드스테어스에서 진행됐다.) 어쨌거나 이런 작은 도시에서의 대학교수라고 하는 던컨이나, 이런 곳에서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아가는 애니의 삶이란 그냥 별 볼일 없이, 평범하고 서민적이며,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둘은 결국 터커 크로우에 대한 던컨의 집착 때문에 싸우고 갈라선다. 그 와중에 던컨은 대학의 동료 교수와 바람이 나고 애니는 우연찮게 진짜 터커 크로우와 문자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 애니도 사실 바람이 난 셈이다. 그렇고 그런 얘기 같지만 실상 닉 혼비의 이 소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시스토 로드리게스라는 걸출한 싱어 송 라이터의 존재감을 픽션화 한 느낌을 준다. 로드리게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의 노동자 가수로, 터커처럼 아주 오래전, 곧 70년대에 한 장의 명반을 발표한 후 홀연히 사라졌고 거의 40년이 지난 후 한 열성 팬인 말릭 벤젠룰에 의해 재발굴, 발견되어 다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다. 그 얘기가 바로 말릭 벤젤룰이 만든 음악 다큐영화 ‘서칭 포 슈가맨’(2012)이다. ‘슈가맨’은 시스토 로드리게스가 마지막 공연에서 부르고 사라지기 전 부른 노래이다. 지금 얘기 중인 영화 ‘줄리엣, 네이키드’의 제목 역시 영화 속 전설의 가수 터커 크로우가 공연 중 사라지기 전에 불렀던 노래 제목이다. 두 얘기는 이 부분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영화를 만든 제시 페레츠 감독은 이야기를 좀 더 말캉말캉한 러브 스토리로 바꿔 놓았다. 거기에다 성찰의 드라마를 비벼 놓고, 할리우드 식으로 비교적 ‘해피’한 ‘엔딩’으로 끝을 맺기도 한다. 그게 손발을 오그라들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슬며시 미소를 짓게도 만든다. 전설의 가수 터커 크로우는 잃어버린 20년간 사방 군데에서 여자를 만났고 마약과 술에 취해 살았으며 그래서 낳은 자식이 5명이나 되는데 각각 다 엄마가 다른 아이들이다. 지금은 아주 어린 아들 잭슨을 돌보며 살고 전처의 집, 뒤편 창고에서 백수로 지낸다. 그래도 그의 생계는 과거 그 전설의 음반이 만들어 내는 음원 수익으로 가능한 상태이다. 한때 막 살았던 인간은, 막무가내의 삶과 엉망의 일상을 살았던 사람은, 어느 순간 철 지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런 사람들은 비교적 통찰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 터커 크로우가 애니와의 문자’질’에서 여자가 자신의 지난 15년 인생이 온통 마이너스뿐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답을 쓰는 식이다. “인생에서 15년을 낭비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좋아요. 우선 숫자부터 줄여 봅시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보낸 시간을 빼고, 즐거운 대화와 수면 시간도 빼요. 그것들은 중요한 거니까요. 그럼 낭비한 시간이 10년쯤으로 줄어들 거고 10년 미만의 모든 것은 세금 낼 때도 탕감해 줘요. 농담이고요, 난 내가 잃은 것들 때문에 여전히 마음이 아프지만 밤이 되면 그냥 그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잠을 잘 못 자나 봐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애니는 뒤늦었지만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터커를 만나러 런던에 갔다가 그가 갑자기 심장 쇼크로 병원에 실려 간 후 문병을 간 자리에서 그 많은 터커의 자식들, 몇 명의 전처들을 한꺼번에 만난 후 자신은 이 ‘패밀리’에 낄 틈이 없다고 느낀다. 아이를 갖는 것에 망설이게 된다. 애니가 전처들과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터커를 만나는 병실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코믹한 장면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장 편안하고 평화로우며 동시에 아주 착한 장면이다. 이복의 형제들은 어색하고 낯설지만 서로 예의를 다해서 인사를 나누고 전처들은 ‘한심한’ 남자를 한때 공유했던 ‘한심한’ 사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줄리엣, 네이키드’는 하찮아 보이는 작품들, 트로트 콘서트 영화와 아이돌스타들의 팬덤 콘텐츠들이 극장가의 메인 룸을 차지하고 있는 이 허름한 세상의 한구석을 지키며 스스로 조용히 빛을 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작은 진주를 발견한 듯한 느낌을 준다. 에단 호크의 늙어 가는 연기가 일품이다. 소설도 쓰고 연주와 노래도 하는 배우답게 이 문학 영화에 딱 들어맞는 메서드 연기를 펼친다. 로즈 번은 ‘노잉’(2009)을 찍은 지 15년이 지났지만 거의 그때의 모습에서 변하지 않았다. 영화 속 애니와 달리 15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다는 얘기일까. 닉 혼비의 소설 속 캐릭터를 자기만의 무엇으로 재해석해 낸 배우들 연기의 합이 좋은 작품이다. 터커는 애니를 만난 후, 그들만의 재결합을 한 후에 25년 만에 새 앨범을 낸다. 앨범 제목이 ‘자, 그래서 나는 지금 어디인가?(So, where am I?)’이다.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영화가 묻고 있는 질문의 핵심이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엄청나게 관객이 몰릴 상업영화는 아니지만 독립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예술영화관을 중심으로 조용히 화제를 얻을 작품이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엉뚱하게 뉴스를 타고 있다. 대전여성영화제와 관련해서이다. 영화의 공식 개봉은 어제(9월4일)였으나 오늘과 내일 이틀간 열리는(9월5~6일) 이 여성 영화 행사에서도 상영될 예정이다. 문제는 대전 시이다. 시가 지원하는 보조금 1350만원의 반납을 고리로 영화의 상영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민원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 대전 시의 주장이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동성애자인 딸이 자신의 파트너를 집에 데리고 들어 오면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엄밀하게 이야기 하자면 딸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딸을 키우는 엄마의 이야기이다. 딸의 성 정체성을 새롭게 알게 된, 그래서 자신의 성 인지 정체성에 대하여 새삼 깨닫고 돌아 보게 되는 한 중년 여성의 이야기이다. 담담하고 성찰 적이다. 이런 영화를 동성애 영화라 해서 민원을 제기하고 그 민원을 앞장 세워 영화 상영을 못하게 하려는 것은 나치의 마인드에 다름 아니다. 검열과 폭력이다. 아무리 지금의 세상이 온통 비상식적으로 거꾸로 가는 일 천지이고 엉망진창이 됐다 한들 이렇게 까지 일 줄은 몰랐다. 명백하게 창작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이건 이명박 박근혜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문화적 쿠데타이다. 고작 1350만원을 수거해 가겠다는 식의 알량한 협박도 이만저만 구차하고 유치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영화제 사무국에서는 이 지원금을 반납할 예정이다. 영화계에서는 모자라게 될 운영비를 십시일반으로 모아 도울 예정이다. 영화인들은 서명 작업에도 착수한 상태다. 한국독립영화협회(회장 백재호)는 이미 성명을 내고 “지난 해 제19회 인천여성영화제에서 인천시가 퀴어 등 의견이 분분한 소재의 영화는 제외시키라고 요구한 사건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며 창작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일련의 행위가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영화인들은 대전 시청 앞에서 시위도 준비할 것이다. 대전 시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이며 하등의 가치가 없는 전선을 만들어 갈등을 부추긴 셈이다. 의도적으로 보인다. 시 행정이란 원래 일부 특정 종교 단체에서 민원을 제기한다 한들 그것을 중재하고 조율할 일이지 그 등에 냉큼 올라 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가 앞장 서서 탄압과 검열을 할 일이 아니다. 대전 시장은 국민의 힘 출신이다. 지상파 드라마에도 동성애 캐릭터가 나오고 아예 퀴어 물까지 나오고 있는 세상이다. 넷플릭스의 ‘영로얄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도 성 소수자가 나오는 시즌 드라마이다. 표현 수위도 만만치 않다. 대전 시는 이런 드라마까지 다 방영을 못하게 막을 것인가. 한 시대의 수상한 기미, 전조는 꼭 정치나 경제, 군사 분야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이 발단이 될 때가 많다. 프랑스 68혁명도 시네마테크 원장 앙리 랑글루아를 해고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영화의 검열은 세상의 검열로 이어지는 법이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이다.
극장가 한편에서 조용히 개봉 중인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연극 ‘라스트 세션’(국내에서도 2023년 대학로에서 번안 공연됐다. 신구 이상윤 출연)을 기반으로 한 작품인 만큼 매우 연극적인 작품이다. 두 배우의 다이얼로그가 영화 전반을 차지하고 내용도 꽤나 깊고 철학적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이전의 연극이 어쩔 수 없이 ‘평면적’일 수밖에 없었다면 영화는 영화인 만큼 시공간을 오가는 입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예컨대 영화에서는 프로이트 박사의 꿈과 환상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가 지니는 표현주의 미학의 정점 같은 것을 담보해 내는 것이다. 그런 장면은 마치 오래전 알프레드 히치코크가 만든 ‘스펠바운드’(1945)를 연상케 한다. 한국에서는 『 KBS명화극장 』 방영 당시 ‘백색의 공포’라는 제목의 영화였으며 그레고리 펙과 잉그리드 버그먼이 나왔던 작품이다. 정신분석이지만 스스로 정신병, 강박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은 종종 꿈을 꾸는데 그 내용은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 영상으로 이어진다. 이번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에서도 프로이트 박사(안토니 홉킨스)는 꿈을 꾸는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휠체어에 태워진 채 어두운 복도를 지나가는 장면이다. 침대에는 자신의 딸 안나(리브 리사 프리에스)와 그녀의 동성 연인 도로시(조디 발포어)가 벌거벗은 채 서로 껴안고 누어 있다. 옆방에는 어릴 때 아버지가 그때 모습 그대로 나와 자신을 노려 보고 있으며 벽에는 온통 성 딤프나(정신병 환자들을 지켜주는 수호성인) 등 가톨릭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가득하다. 프로이트 박사의 턱수염은 그가 흘린 피로 가득해진다.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이처럼 연극 ‘라스트 세션’이 보여 줄 수 없었던 장면들을 ‘영화적으로’ 재창출해 낸다. 그 연출의 작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은 정신분석 의학의 최고 경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마지막 미팅 혹은 마지막 회의의 몇 시간을 보여 준다. (그는 며칠 후 구강암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안락사 하는 것으로 나온다.) 회의의 상대는 옥스퍼드 대학교수이자 훗날 『나니아 연대기』란 소설을 써 판타지 문학의 최고봉 작가가 된 C.S.루이스이다. 영화 속에서는 잭 루이스(매튜 구드)로 불린다. 때는 1939년 9월 1일이 막 지난 때이고 장소는 영국 런던이다. 1일은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날이다. 런던 시내에는 연일 공습경보가 울리고 일단 아이들을 대상으로 소개령이 내려져 기차역에는 자신의 아이를 시골로 내려보내는 엄마들로 넘쳐 난다. 라디오에서는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나와 독일이 폴란드 국경에서 9일까지 물러나 줄 것을 요청했다는 담화를 발표한다. 체임벌린 내각은 전쟁 전 히틀러와 밀약을 추진할 만큼 순진했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전쟁 전야의 와중이다. 곧 나치의 런던 대공습이 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프로이트 박사는 잭 루이스를 초대한다. 그가 얼만 전 발표한 신학 에세이 『순례자의 귀향』때문이다. 둘은 세계관이 다르다. 한때는 둘 다 무신론자로서 같은 대열에 있었으나 루이스는 현재 성공회로 개종한 상태이다. 지금의 세상을 과연 신이 창조했는지, 그런데 왜 이 모양(1차 대전에 이은 또 다른 대전 직전)인지, 신은 무능한 것인지 이기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 탓인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두 박사는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프로이트 박사는 스스로를 ‘믿음과 숭배에 집착하는 열정적인 불신자’라고 명명한다. 그의 정신분석은 세상의 폭력과 인간 내면의 폭력이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한 기초에서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젠주흐트(Senhsucht, 갈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그는 ‘우리가 보거나 인식하는 것은 다만 꿈속의 꿈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의 꿈에 대한 분석을 어떻게 사회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느냐야 말로 프로이트 이론 분석의 시작이다. 반면 옥스퍼드 교수인 잭 루이스는 인간의 행동은 때론 신의 영역이어서 모든 걸 다 분석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인간의 모든 잘못은 신이 부여한 자유의지를 올바로 행사하지 못한 탓이지 결코 신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루이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본질적으로 성적(性的)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프로이트는 그런 그에게 정신분석학에서 성이란 쾌락의 상호성을 말하는 것이지 꼭 육체적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인데 두 사람이 종종 꾸는 꿈은 공히 숲속에 홀로 버려지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오히려 행복감을 느끼지만(아버지의 부재를 갈망했기 때문에) 루이스는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와중에 꼭 사슴이 자신 주변에 있음을 느낀다. 프로이트는 큰 딸 조피와 그녀의 아들을 병으로 잃고 난 후 막내 딸 안나에 대한 자신의 집착에 시달린다. 안나가 갖고 있는 아버지인 자신에 대한 근친 갈망(일종의 애착 장애이자 엘렉트라 콤플렉스)을 어찌하지 못하는 비밀을 갖고 살아가는 중이다. 루이스는 루이스대로 전장에서 같이 싸우다 죽은 친구의 엄마 제니(올라 브래디)와 동거 중이다. 그 역시 비밀스러운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두 사람 모두 정신 분석학적으로 ‘사람이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이다. 극중 프로이트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 모모스 얘기를 한다. 모모스는 인간을 싫어하는 신으로 조롱과 풍자가 전문이며 인간과 살아가려는 다른 신들에 의해 신전에서 내쫓긴 상태이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혐오하며, 따라서 신 중에 닮은 신은 ‘쫓겨난’ 신 모모스 를 닮았다는 의미이다. 전쟁의 와중에 두 석학의 이 같은 비공식적인 고담준론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꽤나 깊은 울림을 준다. 세상의 폭력은 내면의 폭력을 치유하는 과정이 전제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 인간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한 내면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않는 한 세상의 모든 잘못을 계속해서 이어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무신론자인 프로이트와 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루이스가 합의해 가는 내용이다. 프로이트는 루이스와 헤어지면서 친구라는 표현을 쓴다. 프로이트는 루이스의 저서 『순례자의 귀향』을 루이스에게 선물로 주는데 거기 첫 장 서명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러면 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실제로 만났는지는 역사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는 대목이다. 이 영화는 순전히 상상력의 산물로 두 인물의 사상을 접목시켰을 때 어떤 논쟁이 벌어질까를 생각하고 개발한 대본이자 시나리오이다. 영화와 연극이 해낼 수 있는 상상력의 극치이다. 이런 걸 두고 흔히들 ‘예술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안토니 홉킨스의 명불허전 연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루이스 역의 매튜 구드 연기도 그 못지가 않다. 저렇게 수많은 대사를 어떻게 외울까 싶을 정도로 달변의 연기들을 선보인다.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에서의 ‘세션’ 열기는 실로 불꽃이 튀긴다. 두 사람의 연기와 그것을 잡아낸 연출(감독 맷 브라운) 덕이다. 대화 장면은 커트 수를 잘게 나누지 않고 대체로 길게(롱 테이크로) 찍었다. 영화의 시작과 후반에는 『천로역정』의 문구가 쓰인다. 1678년 존 번연이 쓴 성서소설이다. 영화 오프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세상의 황야를 거닐다가 / 한 동굴이 있는 장소를 발견하곤 / 몸을 뉘어 잠을 청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후반에는 루이스가 집 앞에서 만난 프로이트의 딸 안나와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이 분노와 눈물의 땅 너머로 / 공포의 그림자만 어른거리지만 / 세월의 협박은 지금도 앞으로도 / 날 두렵게 하지 못하리.” 한 사람에게 동굴은 정신분석학이었고 또 한 사람은 성서였지만 세상의 공포가 자신을 두렵게 하지 못한다는 것에 합의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상 최고로 미스터리한 논쟁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논쟁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이 가르쳐 주는 궁극의 대목이다.
놀랍게도 한국영화 중 독립운동을 그린 영화는 그리 많은 편수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툭하면 벌어지는 역사 논란들이 영향을 줬기 때문일 수 있다. 이상한 논란에 휘말리거나 공격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제작자나 투자자를 지배할 수도 있다. 홍범도 장군의 위대한 쾌거의 독립운동 전투 ‘봉오동 전투’(2019)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절묘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이다. 이 영화를 요즘 같은 때에 다시 본다면 어떨까 싶다. 영화 ‘파묘’가 아무리 일부에서 반일 좌파적 영화라며 국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영화라는 식으로 떠들어 댄다 한들 관객 천만을 훌쩍 넘기는(11,913,519명) 대성공을 거둔 것은 어리석은 정치가 역사를 놓고 ‘대중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 정부와 국방부는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는데 홍범도 장군이 고려공산당 활동 전력을 문제 삼았다. 대중들은, 그렇다면 장제스와 마오쩌뚱의 1,2차 국공합작(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일시적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한 것) 역시 장제스의 공산당 활동 전력으로 봐야 하느냐는, 기이한 역사 해석을 요구 받는 셈이라 느꼈다. 홍범도 흉상 철거 문제를 놓고 대중들의 정서적 반발은 컸다. 그 효과가 영화 ‘파묘’에 모인 것이다. ‘파묘’의 천만 관객 돌파를 정부 당국자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바라 봐야 하는 이유이다. 그냥 영화 한편이 엄청난 돈을 번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허투루 하게 바라 볼 얘기가 아닌 것이다. 2021년 복잡한 외교 절차를 거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귀국할 때의 감동을 사람들은 여전히 잊지 못하고 산다. 배우 조진웅이 국민특사였다. 장군의 유해와 조진웅이 탄 비행기가 한국 영공으로 들어섰을 때 공군 전투기가 옆에 붙었고 파일럿의 무전 음성의 내용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여기는 대한민국입니다. 장군님. 이제부터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배우 조진웅은 백범 김구의 초기 독립운동 시절을 그린 ‘대장 김창수’에서 김구 역할을 했다. 조진웅은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격하시키려는 정치권 일부의 움직임에 대해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우 최민식은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해 ‘영화 ‘파묘’가 반일 좌파 영화라면 ‘명량’은 뭐가 되냐?’고 반문했다. 정치인들이 배우보다 못해도 훨씬 못한 세상이 됐다. 그건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곧 안중근의 거사를 다룬 ‘하얼빈’이 개봉된다. 현빈과 박정민 조우진 유재명 등 호화 캐스팅이다. 이 영화 역시, 예상컨대, 수많은 관객들을 모을 것이다. 역사 문제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 무엇보다 우리의 자랑스럽고 가슴 아픈 독립운동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대중들의 인내가 임계점을 넘어 섰기 때문이다. 영화 ‘하얼빈’은 그렇게 역사에 화답할 것이다. 과거 빌 클린튼의 대통령 선거 구호를 빗대어 사람들은 지금 이렇게 소리치고 있다. 바보들아. 문제는 역사야!(It’s the history, stupid!)
김포소방서는 대전현충원에서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추모식을 거행했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에는 조종현 소방행정과장을 비롯해 10명의 동료 소방공무원들이 참석해 고인들의 넋을 기리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묵념과 헌화, 분향의 순서로 진행됐다. 조종현 소방행정과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소임을 다하다 순직한 동료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라며 “그들의 헌신적인 정신을 본받아 김포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故 오동진·심문규 소방관은 지난 2018년 8월 12일 한강 김포대교에서 구조 활동 중 구조보트 전복 사고로 안타깝게 순직했다. [ 경기신문 = 천용남 기자 ]
한국에서 가장 과작(寡作)의 감독 군에 속하는 오승욱 감독이 9년 만에 세 번째로 내놓은 신작 ‘리볼버’는 필름 누아르에 정통한 감독과 제작자(사나이 픽처스 한재덕 대표)답게 어두운 욕망과 비정한 관계, 하드보일드한(hard-boild : 냉혹한) 액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세간의 평가는 저점을 오가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자로서의 짐작으로는, 극의 결말 부분에서 감독과 제작자, 배우의 의견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관객들도 그 부분에서 영화에 대한 전체 반응이 엇갈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영화의 완성도가 어떻다느니, 배우들의 연기가 어떻다느니 하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저급한 인상비평에는 동조하기가 어렵다. ‘리볼버’는 잘 만든 영화이고 나름 숨이 막히는 서스펜스가 있으며 이런 류의 영화 치고 속도도 빨라서 오히려 감독이 느린 작가주의 풍을 따라가지 않고 상업주의 영화의 흐름을 타려고 했다는 생각마저 갖게 만든다. 이 정도면 흔히들 ‘재미가 있다’고들 말한다. 게다가 조영욱의 음악은 ‘올드 보이’나 ‘신세계’ 때처럼 자신의 강점과 특성(클래식과 재즈를 오가는 크로스 오버 풍의)을 잘 살려 내고 있어 극적 긴장감을 배가 시킨다. 영화는 모자란 틈이 별로 없다. 아마도 일부 저널에서 야박한 평가가 나오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극중 인물인 ‘황정미’라는 존재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주인공인 하수영(전도연)은 정마담이라 불리는 정윤선(임지현)의 도움을 받아 황정미의 존재를 좇는다. 황정미가 자신이 간신히 (돈을 착복해) 마련해 놓은 아파트와 7억이라는 돈의 행방을 알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정미는 이스턴 프로미스라는 위장 조직의 본부장과 그레이스라는 총수 여인(김종수, 전혜진)에 의해 살해 당한 채 화종사(충남 청양의 화정사)에 묻혀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비밀은 한때 하수영의 애인이자 선후배 경찰 사이였던 임석용(이정재)이 알고 있었는데 임석용 역시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한 후 자살로 위장 처리된 상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임석용의 부사수 형사였던 신동호(김준환)이다. 여기에 그레이스 동생으로 잔혹한 짓을 일삼은 양아치 조폭 앤디(지창욱)까지 나온다. 영화의 기둥 줄거리는 외견상 하수영 대 앤디, 곧 덜 악한 자와 아주 악한 자의 대결로 구성된다. 바야흐로 영화 ‘리볼버’는 인물 관계가 씨줄날줄로 엮여 있어 다소 따라가기가 힘들 만큼 복잡하다. 극 중에서도 정 마담과 하수영의 대화가 이를 보여 준다. 정윤선이 말한다. “(설명하기가) 좀 복잡해요.” 하수영도 말한다. “그래. 복잡하네.” 하수영과 임석용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부패 경찰이었다. 유흥업소의 뒤를 봐주며 돈을 챙기다가 거기에 마약 거래까지 포함된, 비교적 큰 혐의의 범죄를 저지른 인물들이다. 당연히 수사망에 잡혔고 하수영은 7억을 받는 대가로 입을 다물고 모든 걸 혼자 다 뒤집어쓴다는 조건을 걸고 2년을 복역한다. 당연히 경찰복은 벗었다. 하수영은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을 몰락시켰다는 데 대한 분노와 원한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그를 완전히 미워하지는 못한다. 그녀는 외롭고 화가 나 있으며 돈 때문에 절박하다. 한편으로는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한데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하다. 게다가 자신이 애지중지했던 아파트는 임석용이 정윤선, 곧 정마담에게 증여를 했지만 정작 소유주는 황정미란 여인의 것으로 돼있는 상태이다. 그녀는 정 마담을 옆에 두고 황정미를 찾아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사람들의 불만은 이 황정미가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으며, 또 왜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오승욱이 정작 노리고 있는 건 바로 그 혼선과 모호함이다. 황정미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맥거핀(Macguffin)은 영화에서, 일종의 눈속임 장치로 관객의 관심을 극대화하지만 결국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존재나 사건을 의미한다. 영국 출신의 유명 감독이자 서스펜스 영화의 대가인 알프레드 히치콕이 종종 사용했던 영화 기법이다. 그러니 황정미란 존재가 실제로 존재했든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황정미는 무당(김혜은)의 신(神)딸로 돈이 엄청 많은 남자를 낚아 스위스 어딘 가로 도피해 있는 것으로 슬쩍 언급된다. 이스턴 프로미스 총수 그레이스 역시 무당의 또 다른 신딸이었으며 이 두 명이 조직을 놓고 경쟁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그레이스는 나중에 큰 비밀을 안고 있는 여자임이 드러난다. 어쨌든 황정미는 중요하지가 않다. 극중 인물들 모두 황정미를 좇고 있는 것이 중요하고 그중에서 결국 누가, 과연 누가, 그 실체를 깨닫거나 알게 됐는지, 그래서 돈 7억과 아파트를 차지하게 됐는지가 더 중요하다. 주지하건대 필름 누아르는 진실보다 욕망이 더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계열의 작품들이다. 누가 무엇을 저질렀든, 그리고 주인공이 누구를 사랑했든, 결국 각자의 욕망을 얼마만큼 실현했고 또 거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타협해 갔는가가 중요하다. 정의는 아예 없다. 정의로운 인물도 없다. 그래서 이런 하드보일드 누아르 영화는 비정하고 냉혹하다.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이 있을 뿐인데 그게 오히려 더 지금의 사회를 현실적으로 반영해 그려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리볼버’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리얼리즘의 영화인 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황정미의 존재, 그 실체를 알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에둘러서 말하자면 황정미는 임석용의 ‘사랑’이다. 그는 하수영을 걱정했고 사랑했으며 미안해했다. 그래서 그는 황정미란 ‘존재’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황정미를 그쯤으로 정리해 내면 영화 ‘리볼버’의 모든 줄거리는 단박에 이해가 간다. 그래도 불만인 관객들은 있을 수 있겠다. 현대 영화는 질문이 정확하고 답변이 명쾌하며 인물들 간 행동 동기가 뚜렷해야 하는 것이 철칙처럼 돼있다. 아마도 오승욱은 늘 그런 상궤(常軌)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연출자이고 바로 그런 점이 그로 하여금 첫 작품(‘킬리마낮로의 눈’)이 나온 후 15년 만에 두 번째 작품(‘무뢰한’)을 찍게 하고 또 9년 만에 이번 세 번째 작품을 찍게 만든 요인이 됐을 것이다. 영화를 대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작자 입장에서는 오승욱 감독은 통제하기 힘든 인물일 것이다. 이번 ‘리볼버’가 그의 영화 미래의 분기점이 될 듯싶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말 잘 듣는 감독이 될 것인가, 계속 고집스러운 연출자로 남을 것인가. 대중 입장에서는 이래도 피곤하고 저래도 피곤할 수 있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사실 하수영이 아니다. 정 마담이다. 이 여자야말로 누아르 영화의 필수 요소인 팜 파탈 역이다. 정윤선은 한편으로는 하수영을 돕지만(아마도 하수영이 감옥에 있을 때 임석용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이고 두 여자는 한 남자를 고리로 감정이 엮여 있는 셈이다.) 이스턴 프로미스 본부장의 하수인으로 일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신 형사의 정보원이기도 하다. 정 마담은 양 다리가 아니라 세 다리를 걸친다. 화종사에서 극중 모든 인물이 모이는 이유 역시 다 이 정 마담, 곧 정윤선 때문이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녀는 하수영에게 또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언니. 나는요 언니가 요~만큼만 믿을 수 있을 거예요.” 이래저래 정윤선의 역할은 크다. ‘리볼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서브 텍스트들, 주변 인물들이 좋다. 임석용 역의 이정재도 사연 있는 눈빛 연기를 선보인다. 매력적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임석용의 선배로 지금 지병으로 죽어 가고 있는 전직 형사 민기현 역의 정재영이다. 민기현과 임석용은 한때 둘도 없는 짝이었고 그 사이에 하수영이 끼어들고, 또 게다가 둘이서 부패 경찰 짓을 해 먹었으니(민기현은 임석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여자에 대한 욕망에 눈이 멀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기현은 하수영을 미워한다. 그러나 하수영이 출소 후 돈을 찾고 임석용이 왜 죽었는지, 그것을 파헤치는 전체 전략을 짜는 데 있어 민기현은 ‘뒷 배’ 역할을 한다. 임석용이 죽을 때 쓰였던 리볼버 권총을 하수영에게 전달하는 것도 민기현이다. 리볼버는 복수와 비밀의 실체를 상징한다. 더 중요한 것은 리볼버 안에 세 발의 총알만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세 발. 임석용의 죽음에 간여한 인물들은 세 명이거나 세 명 군(群)일 것이다. 그런 상징과 은유가 넘치는 작품이 ‘리볼버’이다. 잘 따라가야 한다. 영화는 종종 사람들의 뇌를 빠르게 회전시킨다. 뇌 회전만이라도 사람들은 건강해진다. 무슨 말인지, 어떤 까닭인지 다 모르겠다 한들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세상이란 해법 없는 질문과 사건이 연속되는 곳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드 보일드, 필름 누아르 영화를 즐기는 방식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미국産이다. 넷플릭스 재팬이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워낙 사무라이 색채가 강하고 다수의 일본인들이 제작에 참여해서 마치 일본 작품처럼 느껴진다. 한국에서 지난해 11월 첫 공개됐을 때 그다지 큰 반응을 얻지 못했던 건 일본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반감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이 애니메이션은 국내에서 폭발적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지만 비교적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세계 반응도 비슷해서 인구에 회자되는 빈도가 높아지고 결국 넷플릭스가 올해 말 시즌 2를 내놓을 예정이다. 시즌 1, 에피소드 8편 마지막이 얘기의 매듭을 짓지 않기도 했다. 완연하게 시즌 2를 예고하는 끝맺음이었던 셈이다. 주인공이자 혼혈 사무라이 검객인 미즈(타무라 무츠미)는 자신의 원수 중 한 명인 어바이저 파울러(타키 사토시)를 죽이지 않는 대신 그를 앞세워 영국 런던으로(혹은 어디엔 가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가는 것으로 끝난다. 미즈는 사실 여자인데, 푸른 눈을 가졌고, 자신의 생모가 어바이저 파울러를 비롯해 백인 남자 넷에게 겁탈을 당해 자신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미즈는 그래서, 매우 불행한 어린 시절과 인생을 살아왔고 자신을 혼혈 괴물로 만든 백인 넷을 반드시 죽여 없애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대 배경은 막부 말기이되 쇄국이 한창이던 때이다. 어쨌든 백인 남자 넷을 죽인다는 설정이 이 애니메이션의 가장 주요한 설정이다. 좀 말이 안 된다. 결국 생부를 찾아서 죽이되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니 유린의 당사자 넷 모두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서구식 살부(殺父)의 이데올로기, 곧 아버지(같은) 존재, 물리적으로 진짜 아버지를 얘기할 수도 있지만 아버지와 버금가는 가부장 제도, 그것을 떠받치는 부권 사회, 그 시스템, 국가를 살해한다는 의미 그러니까 그것을 없애거나 전복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인공 미즈가 여자라는 것, 그녀가 하이브리드, 곧 변종이자 이종(異種)이라는 것,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변방과 비주류의 존재라는 것, 그럼에도 외국 세력을 처단하려 한다든지 하는 민족적 폐쇄성을 담고 있다는 것 등등 여러 가지로 깔아 놓은 서브(sub) 텍스트들이야 말로 이 애니메이션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표방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다만 언뜻 보면 주인공 미즈의 행동 동기가 다소 황당해 보일 뿐이다. 모든 영화는 그 텍스트 안을 들여다보고 좀 더 깊게 파 들어가 봐야 한다. 생각과 의미가 어떻든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주인공 미즈의 사나운 ‘칼질’로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피가 분수처럼 터진다. 목과 몸이 날아간다. 잔인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쾌감이 만만치가 않다. 오랜만에 만나는 19금이다. 그중 에피소드 4의 ‘기이한 욕망’편에서는 일본 사회의 기괴한 성적 기행들마저 펼쳐진다. 드라마에는 ‘마담 카지’라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현대로 얘기하면 SM 클럽을 운영하는 여자이다. 이 마담 카지를 통해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애니메이션의 상상력 역시 베드신과 섹스 신에서도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 준다. 강력한 성인 취향의 얘기들이고 이 4번째 에피소드야말로 이 드라마의 인기를 폭발시킨 요인이다. 주인공 미즈는 검부(劍父), 곧 검을 만드는 눈먼 도공 에이지(타다노 요헤이)에게서 쇠를 담금질하고 명검을 만드는 법을 배운 뒤 무예를 익힌다. 미즈는 최고의 검객까지는 아니어도 무시할 수 없는 기량을 갖춘 무사가 된다. 무엇보다 그녀가 가진 칼은 사람들이 쉽게 갖지 못하는 에이지의 명검이다. 미즈는 이 칼로 사람들을 삭둑삭둑 해치운다. 마담 카지의 부탁으로 갱단 무리의 한 변태성욕자를 죽인 후 조직 모두와 한바탕 싸움, 일대 백의 칼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이 애니메이션의 압권이다. 미즈는 거의 죽을 뻔하지만 마담 카지도 지키고 자신의 오랜 적수인 또 다른 무사 타이겐(모리타 료스케)의 여자 아케미(타게 우치 에미코)도 지켜낸다. 미즈는 칼에 찔리고 베이지만 백인 넷에 대한 복수로 죽을 수가 없다. 사부이자 도공인 에이지는 그런 미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복수는 금과 같지. 녹이 스는 법이 없어.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8부작 애니메이션 ‘푸른 눈의 사무라이’에는 금과옥조의 대사들이 차고 넘친다. 극중 러브 라인도 만만치 않다. 미즈는 여자이고 약간은 에이 섹슈얼(a-sexual)이다. 연애와 섹스를 하지 않는 무성욕주의자이다. 근데 그렇게 되기까지 사연이 있다. 그녀는 한때 잠깐이나마 여자로 살았고 퇴락한 사무라이 남자와 지냈는데 겨우 그를 사랑하게 될 즈음에 자신의 검술 실력을 시기한 이 남자가 자신을 고발하는 배신을 겪는다. 그녀는 결국 남자를 죽인다. 남자는 이미 미즈의 엄마조차 죽게 한 상태이다. 미즈의 눈에는 이글이글 횃불이 타오른다.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한없이 증오할 뿐이다. 그런 미즈의 상대 라이벌 사무라이는 타이겐이고 이 타이겐을 사랑하는 여자는 아케미이다. 타이겐은 평민 출신이고 아케미는 다이묘를 아버지로 둔 공주이다. 당연히 둘 사이에 사랑은 이루어지지가 않는데 아케미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 타이겐과 동침을 한다. 영주인 아버지는 아케미가 그런 딸인 줄 모르고 (아니면 모른 척하고) 쇼군의 둘째 아들과의 정략결혼을 서두른다. 재미있는 것은 아케미가 1)이 수렁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고 2)연인 타이겐을 끝까지 찾아 나서며 3) 그 일환으로 마담 카지의 변태 술집에서 몸을 팔려고까지 하다가 4)주인공 미즈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 싸움에서 간신히 살아 남지만 5)결국에는 그렇게나 싫어하던 쇼군의 둘째 아들에게 몸과 마음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캐릭터가 바로 아케미이며 처음엔 사랑을 추구하는 척, 사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진정한 야망의 소유자임을 드러낸다. 아마도 시즌2에서 아케미는 말더듬이인 쇼군의 둘째 아들을 뒤에서 섭정하며 권력을 차지하는 여인으로 나올 공산이 크다. 결론적으로 보면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화려한 채색감과 일본식 2D 애니메이션이 지니는 뛰어난 입체적 질감을 넘어 영화가 지녀야 할 기본 덕목, 곧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매우 탄탄한 작품이다. 캐릭터가 펄펄 살아 뛰어다닌다. 에피소드별 연결고리와 그 컨티뉴이티(continuity)가 뛰어나다. 대본 자체를 워낙 잘 쓴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건 할리우드가 가장 잘하는 일이고 그게 그들의 진정한 경쟁력이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미국 작품임에도 역설적으로 일본 콘텐츠의 재 부상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서구식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지니고 있는 할리우드와 유럽 감독들 중 상당수는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로망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프랑스에서 일었던 오시마 나기사 열풍도 그랬고 미국 아카데미상이 구로자와 아키라에게 공로상을 주며 그의 세계 영화사적 업적을 기린 것도 그랬다. 오즈 야즈 히로에게 늘 오마주를 바치던 독일 빔 벤더스 감독이 이번에 ‘퍼펙트 데이즈’를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로야마 상의 야쿠쇼 코지는 지난해 5월 칸에서 어김없이 남우주연상을 탔다. 일본 영화, 일본 드라마가 다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좌이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사무라이 영화가 꽤나 난폭한 재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나름으로 속 깊은 의미를 주는 장르의 작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 준 셈이다.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모든 건 이야기의 흐름,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이야기를 잘 짜야 한다. ‘푸른 눈의 사무라이’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정말 재미가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성인 애니메이션의 시즌 2가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솔직히 억울한 사람은 소유진일 것이다. 그녀는 최근 이진숙 신임 방송통신위원장 내정자의 이전 발언 탓에 다시 한번 우파 연예인으로 분류 낙인 찍혔다. 과거 이명박을 지지하는 연예인 명단에 이름이 들어 있어서 였는데, 그것도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 불분명한 상태의 얘기이다. 이런 게 잘 확인이 안되는 이유는, 연예인들로서는 누구에 대한 지지선언을 했네 안했네, 식의 논쟁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자신의 연예계 활동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배우 자신보다도 소속사가 그런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 이른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긍정도 부정아닌)전법이다. 해당 연예인에게 철저히 함구령을 내리고 일체 노 코멘트로 일관하게 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유야무야 된다고 본다. 소유진 측으로서는 그렇게 됐을 법한 시간이 지났는데 이 얘기가 다시 불쑥 튀어 나온 것이다. 최근 그녀의 남편인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MBC가 새로 시작한 손석희 앵커의 새 프로그램 ‘질문들’에 출연한 것도 아내에 대한 우파 논쟁을 희석화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정우성과 박찬욱 권해효를 오랫동안 지켜 본 사람의 입장에서 이들을 좌파로 ‘낙인’찍는 일부 정치권 인사들의 인식 및 그 두뇌 구조 역시 심히 불쾌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박찬욱 등은 아무리 뜯어 봐도 리버럴리스트(자유주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에게는 좌우 이데올로기 모두에 대해 비판적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생각이 침해되지 않는다는 전제해서, 잘 구분하고 살아갈 뿐이다. 이들이 북한 체제를 옹호하는 걸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북한을 봉건독재국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권해효가 일본 조선학교에 오랜 시간 빵을 보냈던 것도 순전히 인도주의적 차원의 일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놓고 자꾸 편을 가르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권해효의 홍상수 영화 출연을 막고 정우성의 회사 아티스트 컴패니에 대한 압수수색을 하겠다는 것일까. 이러다 박찬욱은 아예 할리우드로 이주해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로서는 가뜩이나 미국에서의 촬영과 제작이 늘어나고 있는 시기이다. 그러니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이런 식이라면 ‘인천상륙작전’에 출연한 이정재는 우파 배우인가. 게다가 그는 한동훈 국민의힘 당 대표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기사까지 난 상태다. 그럼에도 이정재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은 우파라고 말한 적이 없다. 사람들을 이데올로기의 통발로 낚아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는 순간 이정재가 출연한 할리우드 대작 ‘스타워즈’ 흥행도 영향을 받는다. 그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다. 좌우 선긋기는 매우 소모적이고 불필요하며, 있어서는 안되는 행동이다. 이진숙 내정자 같은 사람들 때문에 현재 심각하게 위축돼 있는 국내 영화와 드라마 산업이 더욱 쪼그라들지 않게 될까 우려하는 시선이 많다. 히틀러의 나치 역사를 공부할 때 암기해야 할 이름이 파울 요세프 괴벨스(국민계몽선전장관)이다. 물론 하인리히 힘러도 있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도 있으며 헤르만 괴링도 있다. 이진숙 방통위원장 내정자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같은 영화를 보고 어떻게 얘기할 지 궁금해진다. 보기나 할까.
영화가 사람처럼 의도된 가벼움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면 그런 작품은 ‘핸섬 가이즈’가 될 것이다. 일부러 궁색하고 못나게 군다. 작정하고 사람들을 웃기려고 한다. 넘어지고 자빠진다. 이런 시대, 이런 시절에는 이렇게라도 웃고 넘어가자며 허허실실 댄다. ‘핸섬 가이즈’의 두 남자 재필(이성민)과 상구(이희준)는 핸섬한 남자들이 아니다. 그저 ‘못생겼다’의 차원도 아니다. 극중 파출소장(박지환)은 이 둘이 자신의 마을을 범죄의 소굴로 만들 것이라 생각한다. 소장과 부하 경찰(이규형)은 이들이 흉악범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는 재필과 상구의 외모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그들이 전혀 잘못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도 다소 어폐가 있다. 한국 같은 비뚤어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못생긴 것은 죄다. 그들은 1차 용의자로 오해받아도 싼 것처럼 취급받는다. 영화 ‘핸섬 가이즈’는 구르고 넘어지며 사람들을 몸으로 웃기려고 애를 쓰지만 그 안에서는 우리 사회에 대한 기묘한 ‘돌려 까기’가 느껴진다. 우리는 지금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재필과 상구는 죽마고우에 가까운 선후배 관계이다. 공사판 노동자들이다. 오랜 노동으로 돈을 모았고 시골집을 샀으며 이제 막 이사를 가고 있는 중이다. 스스로들은 빠지는 게 없고 차도 있고 집도 있는 버젓한 존재들이 됐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그 둘, 특히 형 뻘인 재필만의 생각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영락없는 루저들, 낙오자들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을 마주치기만 해도 섬뜩한 두려움을 느낀다. 소리를 지르고 무슨 괴물이나 병균이 옮는 것처럼 군다. 시골 별장에 놀러 온 다섯 명의 ‘싸가지’ 없는 남녀 5명이 특히 그렇다. 그들은 오로지 유흥과 섹스, 약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리더 격인 성빈(장동주)은 멤버 중 한 명인 보라(박정화)가 데려온 순진한 여자 친구 미나(공승연)를 잠깐 데리고 놀 궁리로 한창이다. 성준 등 5명 무리들의 못된 계획은 핸섬 가이즈 두 명의 일상과 조우하면서 끔찍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죽음을 이어 가게 된다. 몸에 구멍이 나고 머리에 대못이 박히며 불에 타고 분쇄기에 몸이 갈려 죽는다. 모든 죽음의 책임은 재필과 상구에게 몰리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 마을에 있는 악마가 문제다. 66년 전 이 마을의 천주교 교구에서는 염소 형상을 띠고 있는 악마를 성당 지하에 봉인한 상태다. 그런데 미나를 꼬드긴 5명 악동들의 벤츠 차량이 산길 국도에서 염소를 치어 죽인 후 버리고 간다. 그걸 또 재필과 상구가 이를 자신들의 새 집 앞에 묻어 주게 되면서 악마가 깨어나게 된다. 성경의 외전으로 악마를 다룬 경전에는 다섯 명의 악인이 염소 귀신을 깨우고 세 명의 의인(재필과 상구, 미나)이 이를 막아 낸다고 쓰여있다. 이제 이들 모두가 벌이는 소동극은 천주와 악마, 세상의 선과 악, 삶과 죽음의 일대 혈투로 변하기 시작한다. 영화 ‘핸섬 가이즈’는 못생기고 무섭게 생긴 두 남자의 해프닝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못생겼다는 것은 못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계급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 그것도 일용직 하층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영화는 무산계급과 유산 계급의 갈등, 그 대립을 유쾌한 소동으로 그려 낸다. 그 일시적 반란이 주는 기묘한 쾌감이 ‘핸섬 가이즈’의 진정한 흥행 포인트이다. 사람들은 지금 웃으면서 혁명을 하고 싶어 한다. 자신들을 오해하고 비웃으며, 편견으로 몰아세우기 일쑤인데다 돈과 학식, 불로소득으로 얻어 낸 것들(부동산, 주식, 코인 등의 막대한 수익)을 앞세워 억압하려는 자들, 그런 기득권의 악마들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싶어 한다. 1929~1939년 세계 대공황이 들이닥치고 나치즘이 횡행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찾았던 영화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넘어지고 자빠지는 식의 슬랩스틱 코미디(클라크 케이블 주연의 1934년작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이거나 필름 누아르처럼 아예 어두운 작품(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1946년작 ‘빅 슬립’) 들이었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내몰리고 정치사회적으로 억압받을 때 역설적으로 웃음을 찾는다. 차라리 웃자고 얘기한다. 웃으면서 고통을 잊자고 말한다. 이는 거꾸로 현재 어떤 유형의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모으느냐를 잘 살펴보면 지금 사회가 어떤 형국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핸섬 가이즈’는 개봉 2주 만에 130만 관객을 모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BEP를 넘겼다. 이런 B급 영화가 100만을 넘기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꼽힌다. 이건 역설적으로 좋은 신호가 아니다. 불안한 측면이 있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 여러 불길한 징조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투자하고 제작한 사람들은 흥행의 성공에 만족하고 좋아할 수 있어도,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야 한바탕 웃고 떠들 자격이 있지만, 이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평단과 저널까지 부화뇌동 해서는 안 될 일일 수 있다. 영화는 종종 그 사회에 시그널을 주고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법이다. 그 경고를 잘 읽어내야 한다. ‘핸섬 가이즈’는 변종의 장르이다. 코미디와 공포, 엑소시즘, 오컬트 장르를 합쳤다. 우리 영화 ‘시실리 2Km’란 영화에 할리우드 영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와 ‘엑소시스트’를 섞은 느낌을 준다. 그것도 일정한 법칙 없이 의도적으로 엉망진창으로 섞고 비벼냈다. 어울리지 않는 장르를 결합하면서 불시의 웃음을 유발한다. 기묘하면서도 약간은 음흉한 웃음, 내면의 변태스러움을 자극하는 기운을 불러낸다. 가진 자, 당신들이 그토록 엉망인데 우리라고 이 정도야 괜찮지 않겠느냐는 식의 속내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아주 빵빵 터지는 수준은 아니다. 세대 간 차이가 좀 있다. 중장년 층은 다소 씩 웃거나 그저 킬킬 거리는 수준이다. 노년층은 아예 안 보거나 보더라도 무표정한 태도들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세대 간 차이를 극명하게 갈리게 하는 측면도 있다. 이런 변칙의 영화들은 기성세대들이 만든 질서와 규칙을 깡그리 무시하고 싶어 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기존의 질서를 타고 넘어가고 싶어 하는 앙팡테리블(반항아)의 내면을 지닌다. 그건 이래야 해, 라는 요구에 그게 꼭 왜 그래야 해, 라는 반문을 담는다. 이런 영화일수록 영화적 법칙과 연기의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자재의, 발군의 연기자들이 큰 몫을 하기 마련이다. 이성민과 이희준은 다시 한번 스스로들이 매우 뛰어난 배우들임을 입증했다. 조연배우들 박지환과 이규형도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낸다. 상업영화 쪽으로는 신인 급인 공승연도 장단을 척척 잘 맞춘다. 공승연은 독립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로 2021년 청룡영화상에서 신인여우상을 탄 바 있다. 이들 연기자들의 합을 연출로 잘 끌어내고 합치게 한 감독 남동협은 비교적 ‘듣보잡’이다. 영화 ‘핸섬 가이즈’는 신인들 천지이고 그런 새로움들이 이성민 이희준 등 깨어 있는 기성 배우들을 만나 흥미로운 작품으로 탄생한 결과이다. 영화는 늘 새로워야 하며 변칙적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핸섬 가이즈’는 그 모범을 보여 준다. 영화가 어떻게든 사회를 생존해 가게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B급 영화가 성공하고 있는 시그널을 너무 쉽게 읽어 내서는 곤란하다. 그 위기의 경고음을 잘 알아채야 한다. ‘핸섬 가이즈’의 성공이 이 혹독한 시기에 꽤나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불길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프렌치 수프’는 무려 30년 전 ‘그린 파파야의 향기’와 ‘시클로’를 만들어 주목을 받았던 베트남계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홍의 뒤늦은 신작이다. 그는 중간쯤인 2009년에 이병헌, 기무라 다쿠야, 조시 하트넷을 주연으로 내세워 ‘나는 비와 함께 간다’라는 영화를 찍었지만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실패했다. 그 직후인 2011년에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상실의 시대’를 영화로 만들었고 수작이었지만 역시 흥행에서 실패하면서 오랫동안 메가폰을 잡지 않았다. 젊은 관객들에게 이제 트란 안 홍은 새로운 인물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제목과 달리 프렌치 수프만 만드는 얘기는 아니다. 프랑스 요리, 그것도 만찬을 즐기는 미식가와 요리사, 그 파트너십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 도댕(브누아 마지멜)은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 불릴 만큼 음식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요란하고 까다로운 입맛을 20년 동안 채워주고 만족시켜 준 요리사는 여인 외제니(줄리엣 비노쉬)이다. 이 둘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하며 살아가는 연인이다. 둘은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긴 했지만 이제 막 결혼을 하려 한다. 도댕이 줄기차게 결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외제니는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도댕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나는 당신의 요리사인가요, 당신의 아내인가요?” 도댕은 과연 무어라 답할 것인가. 영화가 시작한 후 30분간 외제니의 조리 과정이 이어진다. 15분은 순수하게 외제니와 그녀의 조수인 비올레트가 주방에서 요리하는 과정이, 또 다른 15분은 도댕이 자신의 친구들, 역시 미식가들인 남자들과, 외제니의 음식을 먹고 품평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외제니가 만든 음식으로 만찬을 하기 전 도댕은 견습생으로 들일까를 생각 중인 폴린이라는 소녀에게 부르기뇨트 소스를 한 입 먹게 한 후 무슨 맛이냐고 물어본다. 소녀는, 마치 모짜르트가 세 살 때 절대 음감을 가졌던 것처럼 절대 미감의 특출함으로 하나하나 얘기하기 시작한다. “소갈빗살이 들어갔고요, 훈제 베이컨도요. 그리고 홍피망하고 버섯, 회향 맛이 나요. 토마토와 오렌지, 와인과 파슬리, 타임과 월계수잎, 커민이 들어갔어요. 노간주 나무 열매와 정향도 들어갔네요.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도댕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폴린의 말을 잇는다. “파프리카와 코냑이 들어갔단다. 까치밥나무 열매와 젤리도 들어갔고. 모두 와인의 산미를 잡기 위해 필요한 거였단다.” 부르기뇨트 소스가 어떤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식재료로 무려 17가지가 쓰였으며 영화의 첫 장면은 외제니가 그 많은 재료를 썰고, 다듬고, 으깨고, 끓이고, 굽고, 볶고 하는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이처럼 복잡하고 오묘해 보이는, 풍미와 절대적 맛이 가득한 요리를 만드는 내용이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롭고 탐미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한가하고 ‘재수 없는’ 내용으로 비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냐는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 궁극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어떻게 구현됐느냐에 따라 선택이 좌우될 것이다. 도댕과 그의 친구들은 만찬을 즐기기 전 마치 정식 요리 코스와 같은 현란한 수사들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와인은 만찬의 정신이고 고기와 채소는 물질이지, 라든가 인간은 갈증이 없어도 마실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등등의 얘기들이다. 남자들은 주방에 있는 외제니가 함께 즐기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외제니는 당신들에게 나간 모든 음식은 이미 자신의 혀 속에, 눈 속에, 마음속에서 다 맛을 본 것이라 답한다. 외제니는 어린 폴린이 자신이 만든 오믈레트 노르베지엔(노르웨이 식 오믈렛)을 맛본 후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에 이 아이가 특별한 재능을 지녔음을 감지한다. 그녀는 연인 도댕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건 그들이 먹은, 무언가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트란 안 홍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에는 분명한 것 몇 가지가 눈에 보인다. 일단 그가 요즘, 아니 오래전부터 음식을 만드는 것, 음식을 만든다는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해 있거나 매우 탐닉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음식을 모르면, 요리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이런 고급 레시피의 만찬이 준비되는 영화를 찍을 수 없다. 그러니 트란 안 홍은 스스로 요리에 미쳐 있을 것이다. 둘째는 그가 복잡하고 정교한 요리를 완성하거나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요리를 만든다는 것과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다르지 않거나 그 차원을 넘어 매우 흡사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요리라는 특수한 분야는 영화라는 또 다른 특수한 분야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고 그 둘의 공통점은, 심지어 남녀의 20년 연애나 사랑과도 같은 맥락일 수도 있다는 철학적 통찰로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수가 보편을 만들고 보편을 통해 특수를 더욱 깊고 넓게 만드는 변증의 사고를 이뤄 나갔을 것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따라서, 절대로 프렌치 수프를 만드는 얘기가 아니다. 프렌치 음식을 만드는 얘기 만도 아니다. 이 영화는 인생과 사랑을 요리하고 그 맛을 알아 가는 과정에 대한 얘기이다. 트란 안 홍은 이 영화의 소재가 어떻게 자신이 추구하는 주제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에피소드를 만들어 나간다. 그 매개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과 파트너십이다. 20년간 계속돼 온 둘의 신뢰는 사랑 때문에, 혹은 요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둘 다일 것이다. 다만 선후는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요리사인가, 아니면 당신의 아내인가는 무엇이 먼저인가를 묻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어느 것이 먼저라 해서 그것이 자신들 관계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감독이 작품을 만들면서 영화와 관객의 우선순위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것과 같은 흐름이다. 영화가 먼저인가, 아니면 관객이 먼저인가.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다. 때론 영화가 먼저인 작품을 만들 수도 있고 때론 관객만을 염두에 둔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본질은 그 둘의 관계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불란서 식 메뉴와 그 레시피가 줄줄이 이어진다 해서 겁먹거나, 기피하거나, 예단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건 마치 양념과 같은 것이다. 다만 영화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많은 부분 유리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일 수 있다. 시대 배경은, 유라시아 왕자가 나오는 걸로 봐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일부가 남아 있는 때를 삼은 만큼 1800년대 후반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공화국 혁명과 왕정, 나폴레옹 식 황제의 통치가 엎치락뒤치락 했던 혼란의 100년이 이어진 직후일 것이며 러시아에서는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가 이루려는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가 넘쳐나던 시기였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 모든 시대의 공기를 배척하려는 듯이 느껴진다. 트란 안 홍의 생각에, 사람들의 삶은 궁극적으로 거대담론의 수레바퀴에서 벗어 날 수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체제나 이데올로기와도 비껴가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며 어느 쪽으로 살아갈 것인가 역시 인간의 절대적 자유의지일 수 있다는 점에 모아져 있다. 가장 순수한 생각의 결정체가 어쩌면 가장 이념적이거나 사회적인 무엇일 수 있다는 셈이다. 비정치적이므로 해서 가장 정치적일 수도 있다는 이 같은 반어적 사상은 현재의 세상이 그만큼 오염되고 타락했으며 극도로 혼란해 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런 얘기 역시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건 어디까지 이 영화에 대한 각자의 해석의 차이일 뿐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패스트 푸드가 넘쳐나는 인스턴트 시대에 맛과 풍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느끼게 해 준다. 매우 뛰어난 수작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통찰의 무엇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음미할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영화 ‘원더랜드’가 좋은 영화라는 것, 박찬욱 감독의 대표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송강호가 신하균에게 하는 대사, 곧 “나 너 착한 거 안다”처럼 따뜻하고 착한 작품이라는 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또 동의하는 내용이다. 게다가 할리우드 전설의 영화감독 하워드 혹스가 얘기한 대로 좋은 영화란, 좋은 장면 세 개쯤이 있는 작품이라는 원칙 아닌 원칙을 적용할 때 ‘원더랜드’는 세 개 정도는, 아니 그 이상의 좋은 장면으로 차고 넘치는 작품이다. 그 점에 대해서도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17일 현재 전국 570,347명을 모은 수준으로 이 정도면 시쳇말로 ‘폭망’ 수준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원더랜드’의 이야기 축은 세 개이다. 아니 네 개이다. 중심은 해리(정유미)와 현수(최우식)가 이끄는 AI 여행사 원더랜드 팀이다. 이 둘은 죽어 가는 사람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그들 존재가 지닌 모든 정보를 사이버 상에 심어 놓고 앞으로 그를 그리워할 사람들, 그의 존재를 여전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 모두와 소통할 수 있도록, 그것도 쌍방향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도록, 고도의 대화 능력을 엔코딩하는 일을 한다. 영화 ‘원더랜드’는 AI 정보 커뮤니케이션 사설 업체 원더랜드의 작업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를 그린다. 해리-현수 팀이 관리하는 AI 존재는 세 개이다. 하나가 바이 리(탕 웨이)이다. 그녀는 매우 바쁘게 살았던 회계 변호사였고 하나 밖에 없는 딸 아이를 엄마(鲍起静, 파우 희 칭)에게 내팽겨쳐 둔 채 살다가 후회 끝에 사망한 상태이다. 바이 리는 현재 아이의 태블릿 안에서만 존재하며 이제는 고고학자로 살아 간다. 바이 리의 어릴 때 꿈이 고고학자였다. 또 한명은 정인(수지)과 태주(박보검) 커플이다. 둘은 스튜어디스와 스튜어드이다. 무슨 일 때문인지, 태주는 현재 식물인간, 코마 상태이다. 정인은 그런 그를 인공지능으로 만들어 놓고 매일 아침 그가 깨우는 알람 소리에 일어나 AI 태주와 함께 일상을 보낸다. 스마트 폰 안의 태주는 우주 비행사이다. 그가 돌아 오지 못하는 이유는 장기간 동안 우주 정거장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돼있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은 진구(탕준상)란 젊은이이다. 갓 청소년기를 지난 진구도 죽었다. 그를 혼자 힘으로 키운 할머니(성병숙)는 AI가 돼서도 끊임없이 못되게 구는 손자의 뒷바라지를 이어 나간다. 할머니는 손자가 살아 있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샌다. 김태용 감독은 이야기의 중심을 탕 웨이 쪽에 기울여 놨다. 나는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결정적 패착이라고 봤다. 영화 전체를 주도하는 것은 수지-박보검 에피소드가 맞았을 것이다. 그들이 젊어서도 아니고, 스타급 배우들이 보여 주는 러브 스토리가 애틋해서도 아니며, 수지와 박보검이 초절정 인기를 모으는 스타들이어서는 더욱 아니다. 이 둘이 그려 나가는 이야기야말로 어쩌면 AI 시대의 모든 난제이자 궁극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제인 ‘미래 인간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정확하게 묻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자 정인이는 실제 남자 태주가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AI 태주와 연애와 사랑을 이어 나간다. 물론 그녀는 그의 손길이 그립고 그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거나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싶은 실제적 욕망에 시달리지만 그를 매일처럼 손아귀에 쥐고 살 수 있다는(그녀는 태주를 핸드폰 안에서 넣어 놓고 늘 꺼내 본다.) 현실을 넘어 서지 못한다. 정인이의 일상을 뒤흔드는 화산 폭발과도 같은 일은 병실에서 코마 상태였던 태주가 깨어난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제 정인에게는 태주가 둘이 된다. 자 그렇다면 정인은 깨어난 인간 태주를 새롭게, 더욱 열렬히 사랑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다소 손쉽고 편리한 AI 태주와의 일상을 더 귀중하게 생각할 것인가. 어쩌면 영화 ‘원더랜드’가 이 이중배상과 같은 문제, 곧 현대인이 지닌 정체성의 근본적인 문제에 집중했다면 보다 더 놀라운 작품이 됐을 공산이 크다. 김태용은 작가주의적 상업영화 감독으로 다시 한번 우뚝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부분에 ‘베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건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하는 투자와 제작자 쪽에서 안전한 영화를 요구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대중들은 복잡한 생각을 요구하는 작품을 싫어한다고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분명 생각을 비비 꼬이게 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귀신같이 ‘고급스러운’ 내용은 알아본다. 대중은 무식한 척 꽤나 지식인스러운 면을 지니고 있다. 대중관객들은 늘 앞으로 나아 가고 있으며 ‘원더랜드’는 오히려 관객의 의식 수준보다 한 걸음 더 처진 행보를 보인 셈이 됐다. 그것이 실패의 이유이다. 영화의 심도를 더 깊게 하는 방법으로는 AI 존재가 실제 인간 존재를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얘기까지 이어 가게 하는 것이다. 태주가 태주를 만나면 세상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공지능의 존재가 그 인공의 지능이 과다하게 많아지게 되면 어떤 일을 벌이는가는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2004년 영화 ‘아이, 로봇’(2004)에서 이미 한번, 그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보여 준 바 있다. 사실 ‘터미네이터’ 시리즈도 그러한 얘기를 기반으로 한 전쟁 액션 영화일 뿐이다. 알렉스 가랜드가 만든 수작 ‘엑스 마키나’(2015)도 AI 지능이 인간보다 높아졌을 때의 불안하고 불길한 이야기를 펼친다. 이 모든 것은 위대한 과학철학자이자 SF 소설가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의 이론을 영화로 구현한 것이다. 로봇 3원칙이란 “첫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하거나, 해가 되는 상황을 방치하면 안 된다. 둘째, 로봇은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복종한다 셋째, 로봇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이다. 간단한 문제 같지만 이 세 가지가 섞이면 매우 이상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을 해할 수 있게 된다. ‘원더랜드’가 그런 얘기까지 해냈다면 엄청난 능선을 넘어서는 작품이 됐을 것이다. 적어도 탕 웨이의 AI는 태블릿 밖으로 나와 홀로그램 정도로라도 구현됐었으면 좋았을 법 했다. 홀로그램 인간은 영화 리들리 스콧 영화 ‘블레이드 러너2049’에서 그 레퍼런스(일례)를 선보인 바 있다. 주인공 K(라이언 고슬링)는 집으로 오면 자신의 지친 몸을 AI로 만들어진 매혹적인 여성 조이(아나 데 아르마스)에게 맡기고 위로를 받는다. ‘원더랜드’의 바이 리도 딸아이에게 홀로그램으로 등장하거나 아예 로봇으로 나오는 것이 더 그럴 듯했을 것이다. 한국계 미국 감독 코코나다의 2022년 영화 ‘애프터 양’은 인공지능 로봇으로 가정교사이자 베이비시터인 양이란 존재(저스틴 H. 민)가 노후화되고, 고장을 일으키면서 겪게 되는 한 가정의 이야기였다. ‘원더랜드’는 다른 영화들이 거기까지 확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소 ‘아웃 오브 데이터’의 얘기로 일관했다. 세상 인식에 대한 오류, 그 부조화가 이 영화와 관객을 더 적극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한 셈이다. 평론의 3원칙 중 하나는, 평론은 감독에게 해를 가하거나, 해가 되는 상황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이 그 원칙을 지켰기를 바랄 뿐이다.
슬쩍 극장에 나타났다가 겉치레로 상영을 하는 둥 마는 둥 사라진 영화 '할리우드 살인사건'은 애당초 목표가 부가형 서비스 윈도우(VOD나 케이블TV, OTT)였을 것이다. 이제는 극장 상영작이 아닌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저어하거나 마다할 이유가 없는 세상이 됐다. 극장이든 비극장이든, 결국엔 어떻게든 모든 영화와 드라마를 만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전에 이런 영화가 있(었) 다는 것 정도 알고 있는 것은 손해 볼 일이 아니다. 물론 '할리우드 살인사건'은 매우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나중에 VOD나 OTT로 보기에, 그렇게 시간 때우기용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떨어지는 작품도 아니다. 영화는 종종 재미로, 쉬기 위해, 그래서 일상의 활력을 얻기 위해 보는 것이다. '할리우드 살인사건'은 그렇게 머리를 쉬고, 리프레시(refresh) 하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 '할리우드 살인사건'은 우리말 제목의 느낌대로 할리우드, 곧 LA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한 사립 탐정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립 탐정은 뉴욕 같은 동부보다 LA, 캘리포니아가 많다. 미국의 동쪽은 춥고 서쪽은 따뜻하며 사람들이 친절하고 '루스'하다. 특히 할리우드는 돈과 욕망이 넘쳐 난다. 이런 곳에 불륜이 많은 이유이다. 당연히 치정에 얽힌 사건, 심지어 살인사건까지도 많은 지역이다. 남녀 간의 문제는 공식적으로 경찰력이나 검찰권이 관계하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 사립탐정 이야기가 LA, 할리우드에 집중되는 것에는 다 까닭이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주인공 찰리 왈도(찰리 허냄)가 꼭 사립 탐정이란 얘기는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경찰이다. 왈도는 원래 LAPD, 곧 로스앤젤레스 경찰이었다. 오래전 자신이 잡아넣었던 범인이 진범이 아니었고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살해당하자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경찰복을 벗은 인물이다. 그는 현재 LA와 어바인 사이의 작은 산골 마을인 아이딜 와일드(Idyllwild)에 은둔해 살아간다. 수염을 잔뜩 길렀으며 매일 아침 트레일러 너머로 뜨는 해를 마주 앉은 채 요가와 명상을 한다. 그는 은둔 생활에서 소지품을 딱 100개만 유지하려 애쓴다. 그런데 그 소지품에는 라디오가 있고 태블릿 PC가 있으며(그는 이걸로 책을 읽는다.) 꺼놓은 스마트폰도 서랍 속에 가지고 있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최소한이라도 유지시킨 것이 그나마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로레나(모레나 바카린)가 찾아와 엘리스테어 핀치 사건을 의뢰했을 때 단박에 알아들은 이유이다. 핀치(멜 깁슨)는 유명 배우이고 특히 그가 오랫동안 출연 중인 리얼리티 쇼 '조니의 재판'은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는 텐츠이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이고 스타 연예인이 늘 그렇듯이 막무가내에 난폭하기까지 하다. 그는 점심시간이 지나서까지 촬영이 이어지면 막내 스태프를 패기까지 한다. 이 습성을 알고 있는 제작자는 현장에 스턴트맨을 배치해 '맞는' 역할을 하게 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내인 모니카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건 당연해 보인다. 911을 부르고 경찰에 문을 열어 준 당사자임에도 아내가 둔기로 살해당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당연히 고주망태로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단박에 살인 용의자로 몰렸고, 결국 구속됐으며, 2천만 달러라는 거금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상태이다. 자, 찰리 왈도 전 형사, 현 사립탐정은 스타 배우 핀치가 진짜 살인자인지 아니면 진범은 따로 있는지를 가려내야 한다. 정의와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런 살인사건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수수께끼의 본체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거 당연한 얘기 아니냐고 하겠지만 2시간 가까운 동안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파놓은 함정이 하도 여러 가지인지라 본 사건에 매달리지 않고 다른 요소에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종의 맥거핀 효과 때문이다. 맥거핀은 쉽게 말해서 눈속임 장치이다. 본래 벌어진 사건이 있는데 극을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앞이나 옆, 뒤로 잔뜩 다른 사건까지 늘어놓고 겹쳐 놓는다. 이제 사건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세 개가 되고 심지어 그 모든 것이 다 연결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똑똑한 관객들이라면 그 곁가지 사건들을 다 걷어낼 줄 알아야 하며 그래서 진범을 관객 스스로가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근데 그럴려면 이런 류의 영화를 한 천 편쯤은 봐야 한다. 영화 ‘할리우드 살인사건’은 마치 1940년대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이자 사립탐정인 필립 말로우의 이미지를 따라가는 척 사실은 현대 작가 마이클 코넬리가 창조한 해리 보슈 형사 시리즈의 얘기와 분위기를 차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차이가 있다면 해리 보슈는 비교적 잘 싸웠지만 이 영화의 왈도 전 형사는 매일 얻어터진다는 점이다. 과거의 형사 동료들에게든, 아니면 지역의 깡패들에게든 매일 같이 쥐어 맞는다는 면에서는 1940년대의 탐정 필립 말로우을 닮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클래식 영화와 요즘의 TV 시리즈 캐릭터를 이리저리 합치고 꿰매어 만든 헝겊 인형 같은 느낌을 준다는 얘기다. 구차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런 ‘오마주’가 귀엽게 느껴진다. 핀치 살인 사건은 곧 로레나 실종사건으로 확대된다. 조용히 살아가겠다며 로레나의 사건 의뢰를 거절했던 왈도가 탐정으로 나선 이유는 자신을 만난 후 로레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전 동료이자 상관인 LA 경찰에 따르면 로레나는 살해됐고, 시체가 불탄 채 발견된 것으로 추후 알려진다. 찰리 왈도는 광분한다. 로레나의 살인에는 펠리세이즈라는 이름의 갱단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고 워렌 고메즈라는 미스터리한 인물, 다리우스 잠시디라는 할리우드 미디어 업계의 거물도 여기에 뭔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핀치는 살해된 아내와의 사이에 어린 딸을 두고 있고 주인공 왈도는 죽은 여자가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었다는 점을 고려해 그녀까지 탐문하기에 이른다. 자 여기에 맥거핀은 무엇이고 또 몇 개나 있는 것일까. 다시 한번 주지시키지만 모든 살인사건 영화에서 사건은 단 하나, 핵심은 단 하나이다. 다른 것은 눈속임이다. 심지어 거짓말이기도 하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로레나가 왈도에게 사건을 의뢰한 것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가 이미 한물간 형사여서가 아니었을까. 곧 그건 사건의 진실을 찾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고, 덮고, 왜곡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핀치는 자신이 결코 아내를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 죽인 것은 아닐까. 죽였는데 술이 너무 취해서 기억을 못 하는 것 정도만이 아닐까. 이 영화의 원제는 ‘라스트 룩스(Last Looks)’이다. 마지막 목격자가 아니라 목격자들, 복수이다. 아내가 죽을 때를 본 사람은, (곤드레가 됐든 아니든) 핀치 혼자였을까. 그때 그 집안에 있었던 사람은 또 누가 있었을까. 영화 ‘할리우드 살인사건’은 원제에 치중하면 비교적 쉽게 범인을 찾을 수 있다. 이 글 도입부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들 하시는가. 할리우드, LA, 캘리포니아에는 사립탐정이 많다. 근데 그게 왜라고? 거기는 불륜과 치정의 도시이다. 이 영화는 결국 치정 살인극이다. 치정의 대상,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여자를 찾아 내시라. 그리고 수수께끼를 풀면서 머리를 한번 식혀 보시기를 바란다.
세상이 점점 더 일본사회를 닮아 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일본은 자민당 보수 정부가 장기 집권을 하면서 정치사회 구조와 국민들의 삶이 유리돼 온 역사를 갖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일본 사람 개개인은 조용하고 선한 사람이 많은 데다 매력적인 문화 양식이 많이 발전했음에도 정치 사회의 상부 구조는 여전히 군국주의적 사고 방식에 의해 지배 받고 있는 것 같다고. 독도 문제에 대해,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 난징 대학살이나 관동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그들, 일본 정부나 사회의 상층부는 여전히 침묵하거나 거짓으로 강변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와 주변 국가들로 하여금 일본을 가상의 적으로 간주하게 하고 그들 일부를 적대시하게까지 만든다. 한일 축구나 한일 야구 경기에 과도한 응원 열기가 모아지는 이유이다. 이번 네이버 라인 사태만 봐도 그렇다. 한국 사회도 요즘 정치사회적 이슈와 문화적 현상에 깊은 골이 생기고 있다. ASEAN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 유럽의 나라들, 중남미 사람들에게서는 한국 문화에 대해 일종의 존경심까지 생기고 있다. 그들은 앞다투어 한국 영화제를 만들거나 자신의 영화제에 코리안 섹션을 신설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우디네 영화제가 그렇고 피렌체 한국영화제, 런던 동아시아영화제, 상 파울로 한국영화제 등등이 그렇다. 베트남 호치민국제영화제는 아예 부산 국제영화제를 벤치마킹 한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김동호 전 이사장이 호치민 영화제의 자문위원장으로 전체 행사의 초기 세팅을 지원했다. 현재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제77회 칸영화제에는 다소 논란이 있긴 하지만, 김동호 전 이사장의 영화 업적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소년, 동호’가 칸 클래식 섹션에 초청돼 있다. 역시 비경쟁 부문인 미드나잇 섹션에는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가 나가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퓨리오사 : 매드 맥스 사가’의 감독 조지 밀러는 지난 달 22일 있었던 ‘푸티지 상영회(영화 기자 등 소규모로 선정된 관객들을 대상으로 영화 일부만 공개하는, 일종의 마케팅 행사.)’로 내한했을 때, ‘한국 영화의 진짜 파워는 영화제에서 온다. 세계에서 최다의 영화제를 가진 나라가 한국이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정작 지금의 집권 여당은 국내 지원 영화제를 40개에서 10개로, 무려 30개나 중단시켰다. 문화적 기류와 그것을 운영하는 정치사회적 주체가 완벽하게 따로 노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문화계, 영화계 인사들은 지금의 정부가 전혀 예술적이지 않되 일부 미술 전시 정도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라며 비판 섞인 눈으로 바라 보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한국의 영화와 문화는 2~3년 안에 급격하게 후퇴하고 퇴행하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우려에 대해 지금의 정부가 ‘전혀’ 신경 따위 조차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계, 특히 영화계는 상당 수의 좌파에 의해 장악돼 있는 분야인 만큼 차제에 좀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최근의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위원들 교체, 인사가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DJ 대통령의 문화적 화두는 전설이 된 지 오래이다. 지원은 끊되 간섭은 철저하게 해야 한다,가 새로운 모토인 세상이다.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을 보거나, 악마와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방송사가 시청률을 원하는 것이다. 신문사가 더 많은 광고 수익이 들어 오기를 원할 때이며,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만의 관객을 원할 때이다. 곧, 모두들 매명 욕에 사로잡힐 때이다. 유명 인사를 따라다니고, 그의 뒤를 캐고, 가짜 뉴스들을 스스럼없이 만들고, 그래서 자기도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 시달릴 때이다. 그런 방송, 그런 언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 그 자체가 악마이다. 영화 ‘악마와의 토크 쇼’가 얘기하려고 하는 건 바로 그것이다. 최근 극장에서 개봉됐지만 ‘범죄도시4’의 기세와 스크린 독점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정말 악마가 뭔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아 어쨌든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끌지는 못한 척한 작품 ‘악마와의 토크 쇼’는(20일 현재 7만 5919명을 기록했다. 놀라운 성적이다.) 매우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작은 영화이다. 일종의 독립영화이고 그래서 꽤나 발칙한 느낌을 준다. 재미있다.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모티프이지 실제 그대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1977년 한 TV 토크 쇼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 그보다는 기상천외한 쇼가 만들어 낸 소동을 그렸다. 실제 벌어졌음직한 일, 실제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사건을 그대로 보여 주는 척, 사실은 메타포(은유와 주제의식)가 가득한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일종의 다큐드라마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헷갈리게 된다. 어쩌면 그 혼란과 혼돈이 이 영화의 궁극의 주제일 수 있다. 인기 토크 쇼 진행자 잭 델로이(데이비드 다스트말치안)의 ‘올빼미 쇼’는 1971년에 첫 선을 보인 후 5년 넘게 인기 가도를 달렸지만 그의 아내 매들린(조지나 헤이그)이 폐암으로 사망한 후 잠깐 잠적을 했고 이후 곧 복귀는 했지만 시청률이 예전과 같지 않은 상태다. 당연히 토크 쇼가 방송되는 UBC와 잭 델로이, 이 프로그램의 프로듀서, 심지어 보조 진행자 거스(리스 오테리)까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할 태세이다. 마침 할로윈 데이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청률 집계 기간이라는 것이다. 방송은 1970년대이든, 온갖 유튜브와 OTT가 난무하는 2024년 현재이든 시청률, 조회수, 좋아요와 구독자 수에 목을 맨다. 1977년 시청률의 위기에 몰린 잭 델로이 쇼(이 쇼는 단 한 번도 NBC의 ‘쟈니 카슨 쇼’를 이겨 본 적이 없다. 만년 2위의 수준이었으며 이런 상황이 이 토크 쇼를 만드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 동기를 만들어 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 ‘악마와의 토크 쇼’는 호주産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호주와 미국의 방송 프로그램 산업을 섞어 脫 국적화, 가상화 시켰다.)는 스튜디오에 유령을 불러들이기로 한다. 첫 번째 초대손님은 스스로를 영매라고 부르는 인도계 크리스투(파이살 바지)이고 두 번째는 마술사 카 마이클 헤이그(이안 블리스), 그리고 세 번째는 초심리학자인 준 로스 미첼(로라 고든)이다. 크리스투는 영매를 불러들이려고 시도하다가 스튜디오에 오물을 토하고 실려 나간다. ‘초자연국과수연(초자연현상을 조사하는 국제 과학 수사 연맹)’ 지도자인 마술사 카 마이클 헤이그는 이 모든 것이 잭 델로이의 쇼라고 생각한다. 그는 ‘올빼미 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상한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쇼가 진행되는 내내 초자연 현상의 조작설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걸 도와주는 사람에겐 50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그러니 방청객 여러분들 중 누구라도 휩쓸리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고 그는 말한다. 준 로스 미첼 박사는 1974년에 있었던 아브락사스 제일 교회 사건의 피해자 소녀 릴리(잉그리트 토렐리)가 겪는 빙의 현상을 연구한다. 아브락사스의 교주인 샌더 디아보는 납치와 어린 소녀들을 제물로 받친다는 혐의를 받고 FBI의 추적을 받던 중 스스로 교회에 불을 질러 교인 모두를 몰살 시켰다. 릴리는 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다. 준 박사와 릴리는 잭 델로이 쇼에 나와 빙의를 통해 유령을 불러들인다. 스튜디오에는 이상 현상이 속출하기 시작한다. 전기장이 일어나고 유리잔이 박살 나는가 하면 릴리가 앉은 의자가 공중으로 부양되기도 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일일까. 진행자 잭 델로이와 출연자 카 마이클 헤이그는 열띤 논쟁을 벌이고 급기야 좀 전에 나간 방송을 한 프레임 한 프레임 되돌려 가며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조작인지, 환상인지, 집단 최면의 결과인지를 알아 내려 애쓴다. 그리고 곧 믿기지 못할 사건이 터지고 잭 델로이를 둘러싼 비밀이 드러난다. 근데 이것 또한 진짜일까 가짜일까. 영화 ‘악마와의 토크 쇼’는 토크 쇼가 벌어지는 스튜디오 무대와 그 무대 뒤의 풍경을 오가며 지금 여러분이 보는 드라마가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영화가 갖는 최대의 장점 중의 하나는 모든 상황과 모든 인물을 그럴듯하게 그려 내는 데 있어 거의 최고급이라는 것이다. 프로듀서들은 저렇게 행동하고 말할 것 같으며, 토크 쇼 기획자들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진행자들을 저렇게 부려 먹을 것 같은 데다, 진행자의 겉과 속, 시청자들에게 보이는 얼굴과 무대 뒤에서 보여 주는 초조함은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공동 감독인 캐머런 케언스, 코린 케언스의 작품 장악력이 뛰어나고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디자인해 냈음을 보여 준다. 연출의 힘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있을 법 하지 않는 상황을 그럴듯하게 연기해 낸, 곧 ‘연기 혼에 빙의된’ 배우들의 연기력도 한몫을 당당하게 해 낸 작품이다. 특히 릴리 역의 잉그리트 토렐리의 빙의 연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부분이다. ‘악마와의 토크쇼’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이 영화가 허구, 가짜임을 잘 안다. 그러나 소녀가 빙의 되는 모습에서는 살짝 속게 되거나, 더 나아가 정말로 저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자발적 착시’에 빠진다. 관객 역시 스스로의 관객을 원하고 거짓이 진짜이길 원하게 된다. 그걸 원할 때 만들어지는 기이한 최면의 환각 상태를 즐기고 싶어 한다. 아브락사스 교회 사건은 아마도 1993년 미국 텍사스 주 웨이코 시에서 일어난 다윗파의 집단 자살 사건을 가져 온것으로 보인다. 다윗파의 교주 데이비드 코레시는 교인을 살해하고 폭행한 혐의부터 미성년자 강간 및 마약 공급 혐의까지 등등으로 ATF(Bureau of Alcohol, Tobacco, Firearms and Explosives : 주류 담배 화기 및 폭발 물 단속반)의 기습 체포 작전에 놓이자 자신을 따르던 신도들과 저항하다 교회에 불을 질러 집단 자살을 했다. ‘악마와의 토크 쇼’ 자체도 호주의 한 심야 토크쇼에서 벌어졌던 일, 그 소동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영화 ‘악마와의 토크 쇼’는 시청률이라는 악마, 조회수라는 악마에 사로잡힌 현대 매스미디어의 폐해에 대해 얘기한다. 방송(언론)은 혼돈을 즐긴다. 혼란이 돈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 혼돈을 정리하고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해 오기도 했지만(베트남전의 진실이나 흑인 인권운동의 의미를 알리려 했던 CBS TV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처럼) 점점 더 정치사회적 아수라장을 조장하는 가학성을 보여 왔다. 영화는, 거짓이 돈이 된다면 가짜 뉴스라도 만들라고 난리를 치는 허위 방송의 시대를 빗댄다. 기가 막힌 것은 1977년 때나 2024년 지금이나 그 난장이 전혀 정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무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언론은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악마화 되어 왔다. 세상은 진화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다. 늘 악마와 토크를 즐기려는 세상이 문제다. 악마를 불러들이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예전에 꽤나 잘 나갔거나 잘 만들어졌던 영화를 몇 부작 드라마로 만드는 것이 대세가 된 요즘이다. 거꾸로 옛날 드라마를 영화 한 편으로 만드는 것은 그래서 이색적이다. 최근 개봉된 ‘스턴트 맨’이 그렇다. 리 메이저스(그 유명한 ‘6백만 불의 사나이’의 주연배우)가 주인공 역으로 나온 드라마 ‘더 폴 가이(The Fall Guy)’는 1981년~1986년까지 ABC TV의 인기 드라마였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TV 시리즈였다. 이 드라마를 영화 한 편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 바로 지금의 ‘스턴트 맨’이다. 영화의 원제는 옛 드라마처럼 ‘더 폴 가이’ 그러니까 ‘추락한 남자’지만 개봉 과정에서 제목을 한국 관객들이 알기 쉽게 바꿨다. 눈이 좀 어두운 관객들은 이 영화가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이다. 온통 클리셰(cliché)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건 순전히 스토리 구성 탓이다. 영화 ‘스턴트 맨’은 당연히 ▲스턴트 장면을 ‘과하게’ ▲액션만을 ‘중점적으로’ ▲스턴트 장면을 기대하고 온 관객만을 철저하게 고려하여, 영화 구성을 짜야 했기 때문에 스토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작품이다. 스토리’따위’에 신경 쓸 틈이 없다. 얘기는 가장 단순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스턴트 액션에 더 신경을 쓰며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감독인 데이비드 리치는, 충분히 짐작했겠지만 실제 스턴트 맨 출신이다. 그는 브래드 피트의 대역 스턴트를 오래 했고 아주 오래전에는 장 클로드 반담의 위험한 역할을 대신했던 그의 얼터 에고였다. 데이비드 리치는 개인 배우의 대역 스턴트를 오래 한 경력을 바탕으로 스턴트 감독 자리를 거쳐 결국 액션 영화감독까지 됐다. ‘존 윅’ 1 편에 감독 자리에는 그의 이름도 올라 있다. 영화 ‘스턴트 맨’의 주인공은 콜트 시버스(라이언 고슬링)이다. 그는 조감독인 조디(에밀리 블런트)와 연인 사이이다. 콜트 시버스는 가장 뛰어난 스턴트 맨이고 현재 할리우드 스타인 톰 라이더(애런 테일런 존슨)의 대역 스턴트를 한다. 콜트는 이번 촬영을 끝내면 조디와 밀월여행을 떠나려 한다. 고층에서 추락하는 장면이다. 이미 촬영이 잘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배우인 톰 라이더와 톱 스타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영화의 제작자 게일(해나 워딩엄)은, 콜트의 얼굴이 슬쩍 나온 것 같다며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찍자고 한다. 갑이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건 스턴트 맨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시 한번 고층 건물 세트 위에 올라 와이어를 매고 아래로 뛰어내리지만 이번엔 큰 사고로 이어진다. 허리 부상을 크게 입은 콜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채 1년 8개월을 잠적한다. 그리고 조디의 감독 데뷔작인 ‘메탈 스톰’의 스턴트 연기자로 복귀하지만 모든 것이 다 변해 있는 상태다. 특히 조디와는 이미 서먹해진 관계가 됐다. 프로듀서 게일은 콜트에게 약물 파티 이후 사라진 배우 톰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사실은 그것 때문에라도 콜트를 불렀다고 말한다. 톰을 찾아 나선 콜트는 그가 주로 난잡한 파티를 벌인 호텔 룸에서 미상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때부터 스턴트 가이 콜트 시버스의 일생일대 소동극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콜트는 ▲사랑하는 여인 조디를 되찾아야 하고, ▲그녀의 감독 데뷔작을 성공적으로 완성시켜 줘야 하며, ▲사라진 톰 라이더를 찾아오고, ▲호텔의 살인범을 추적해야 한다. 이 모든 걸 동시에 다 해 낼 수 있을까. 의외로 모든 건 단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음모극이었음이 드러난다. 써보고 나서 읽어 보면 아주 재미있는 얘기 같지만 이건 할리우드 액션 영화 백 편중 아흔여덟 편 정도라면 갖고 있는 이야기 구조이다. 너무 뻔한 스토리여서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뻔해 보인다. 라이언 고슬링과 에밀리 블런트 같은 고(高) 개런티 배우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둘의 ‘돈 액수’ 때문인지 둘 외에는 이렇다 하게 이름있는 배우를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스턴트 연기자들이 수배, 수십 배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여기까지라면 더 이상 쓸 말도 없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작품 전체가 유명 액션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를 뜯어다가 그걸 스토리로 연결시킨 구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비틀스의 노래 33곡의 제목과 가사를 이어 붙여 영화의 이야기를 꾸민 줄리 테이머 감독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08년작, 에반 레이첼 우드, 짐 스터게스 주연. 주인공 이름이 루시와 주드인데 각각 비틀스의 노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와 ‘헤이 주드’에서 따 온 것이다.)와, 장르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아주 닮아 있는 꼴이다. 이런 류의 영화들은 미술로 얘기하면 일종의 콜라주(collage : 질감이 다른 여러 재질의 소재를 이리저리 합치고 접착해 만든 작품. 피카소 등 입체파 화가들이 주로 썼다.) 기법의 작품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이야기가 천편일률적이고 ‘단순무식’한 것이 이해가 간다. 이 영화는 유명 장면을 이어 붙이는 부분의 이음새 그 링크만을 위해 스토리를 덧붙인 작품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스토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액션 영화 패러디 장면과 그다음 장면이 잘 이어지는지 그렇지 않은 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자 이러면 영화를 보게 되는 시점과 시각에 큰 차이가 벌어진다. 예컨대 첫 장면, 콜트가 고층 빌딩에서 추락하는 스턴트 액션 장면은 톰 크루즈 주연의 ‘미션 임파서블 4 : 고스트 프로토콜’에서 이단 헌트가 두바이 빌딩에서 떨어지는 장면과 비슷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액션 스턴트는 빈 디젤과 드웨이 존슨 주연의 카 레이싱 영화 ‘분노의 질주’에서 가져온 것이다. 차가 전복하는 회전이 8바퀴 반이 나와야 하는데 헬기 카메라까지 총 7대의 이동 카메라가 질주하는 차량을 찍는다. 영화 속 감독인 조디는 스턴트 맨이 콜트인 줄 모르고 디렉팅을 해 댄다. 그녀는 그에게 앞의 차에 달려 있는 카메라에 보다 바짝 다가서라고 말한다. 콜트는 마땅치 않아 하면서도 감독 지시대로 차를 밀어붙였다가 비싼 카메라를 깨 먹는다. 카메라가 깨지면서 화면이 부서지는 장면은 고스란히 영화에 사용된다. 모두 ‘분노의 질주’에 나오는 실제 장면들이다. 특히 차가 8바퀴 반 뒤집히는 장면을 다시 한번 연출해 낸다. 콜트가 톰의 초호화 숙소에 들어갔을 때 그를 공격하는 여자 인기 스타(테레사 팔머)와 싸우는 장면은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 ‘킬 빌’에서 가져온 것이고, 콜트가 건물에서 갱단들을 피해 호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기 전의 신은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라스트 모히칸’에서 가져왔다. 콜트가 악당들에게 의자에 묶여 고문당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보트 추격전은 ‘007 카지노 로얄’의 것이다. 쓰레기차를 쫓고, 이어서 그 차에 올라타고, 급기야 쓰레기차 안에 싸움을 벌이거나, 차가 뒤집어져 길에 미끄러지면서도 주고받는 격투 신은 딱 ‘제이슨 본’ 시리즈의 장면들이다. 그것마저 지루하다고 느껴지면 그 액션의 장면들마다 마다에 1980년대 록 음악이나 발라드 송을 덧칠했다. 오프닝에 그룹 키스의 ‘I was made for loving you’가 꽝꽝대고 콜트가 문밖에서 악당들과 싸우는 것도 모른 채 그가 자신을 또 떠났다고 생각하며 축 처진 조디가 스태프들과 함께 가라오케에서 부르는 노래는 필 콜린스의 ‘Against all odds’이다. 콜트가 조디의 마음을 잃게 된 것을 슬퍼하며 차 안에서 혼자 듣는 노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All too well’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떤 관객들에게는 즐거운 백화점식 구성이라며 열광할 만한 일일 것이다. 어떤 관객들에게는 ‘심하게’ 진부한 구성이라 받아들여질 것이다. 아마도 세대에 따라 평가의 차이가 극명한 영화일 수 있겠다. 당신은 지금 무슨 세대인가. 이른바 MZ 세대가 아니면 주의 경보를 내릴 영화이다. ‘스턴트 맨’은 철저하게 MZ 세대를 위한 팝콘 영화다. 젊은 세대들을 위한 쉬운 팝콘 영화 한 편쯤은 있어야 한다. 와이 낫!(Why not?). 그게 뭐 그리 큰 문제인가.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러시아 영화(이건 순전히 감독 이름과 배우 이름이 입에 쉽게 붙지 않아서인데 예컨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같은 감독 이름은 도통 외워지지가 않는다. Tchaikovsky도 그렇다. 차이코프스키인가 차이콥스키인가. 이것도 오랜 세월 영어교육 대미 의존도가 강했던 문화 탓이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차이콥스키 얘기이긴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 그러니까 그의 『백조의 호수』나 『비창』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음악회나 연주회, 발레 장면도 이렇다 할 게 나오지 않는다.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완벽하게 그의 아내 얘기이다. 영화는, 차이콥스키의 성적 취향에 따라 철저하게 버림받고 처절하게 유린됐던 아내 니나(안토니나 밀류코바)의 얘기를 담는다. 총 143분 러닝타임 중 절반이 지난 82분쯤 그 이유가 나온다. 차이콥스키(오딘 런드 바이런)의 여동생인 사샤(바르바라 시미코바)는 올케 안토니나 밀류코바(알리오나 미하일로바)에게 자신의 오빠는 ‘부그르’라고 고백한다. 니나는 부그르가 뭐냐고 묻고, 잠시 머뭇거리던 사샤는 이렇게 말한다. “오빠는 여자를 안 좋아해. 평생 여자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 오빠는 남자를 좋아해. 그것도 어린 남자 애를.”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이자 그것도 페도필(소아성애자)이라는 사실을 아내인 니나가 처음 인지하는 순간이다. 그리스 정교의 교리대로 순진하고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왔던 니나는 새로운 성(性)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영화는 이때부터 약 1시간 동안 급전직하의 절벽을 타고 넘기 시작한다. 니나, 곧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이후 원치 않는 남자와 성관계를 맺고 애를 세 번이나 갖는다. 애들은 다 고아원에 보냈으며, 그런 와중에 동시에 여러 명의 남자와도 관계를 맺는 그룹섹스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차이콥스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절대로, 절대로 그와 이혼하지 않는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차이콥스키와 밀류코바가 처음 만난 1872년과 결혼을 했던 1876년, 그리고 둘이 헤어진 1877년과 그 이후 니나가 파국의 인생을 살았던 1917년까지의 삶을 다룬다. 그 사이인 1893년에는 ‘위대했던’ 음악가 차이콥스키는 콜레라로 세상을 뜬다. 영화의 인트로는 1893년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이다. 니나는 그의 영안실에 마치 타인이 가듯이 조화를 들고 가는데 그전에 조화의 문구를 쓰느라 애를 먹는다. ‘가장 위대한’, ‘사랑하는 이에게’ 등의 어휘에서 헤매던 그녀는 이렇게 쓰기로 결정한다. ‘그를 추앙하던 그의 아내로부터’. 영화는 한 위대한 예술가와의 삶이란 것이 사랑인지 추앙인지, 아니면 그 사이에서 변질된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애증의 예술사이자 예술이 가져가야 할 진정한 가치, 사람들이 예술을 추앙하고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와 의미에 대해 묻는다. 어떤 게 진짜 사랑이냐고 묻는다. 그 과정, 2시간이 넘는 영화 시간 동안 사람들은 마치 심신이 짓이겨지는 듯한, 그래서 마치 도살자에게 다져지는 육고기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예술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저렇게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하는 것인가. 소아성애자였던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성벽(性癖)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한 여인의 일생을 저렇게까지 망가뜨려도 되는 것인가.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결국 차이콥스키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은 후 창녀(같은 존재)가 됐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니나의 극도의 결벽증 같은 스토킹, 곧 차이콥스키는 절대로 자신을 떠날 수 없다는, 오직 자신만이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광기 어린 집착이 차이콥스키를 1년도 안 돼 지치게 만든 요소일 수도 있겠다. 니나의 사랑은 미친 것일 수도 있다. 사랑은 늘 광기와 정상 사이를 오가게 마련이다. 이 둘의 사랑은 따라서 둘의 무릎 맞춤의 진술이 필요한 것이며 어느 한쪽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쉽게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두 사람 모두 비교적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며 사랑은 어쩌면 이 같은, 극히 비정상의 일상에서 잠깐 동안 반짝 타오르기 마련인데, 그걸 어떻게 자신들의 삶 속에서 정상적 궤도로 재 진입시켜 평생을 애정의 관계로 유지하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예술적 교감이라는 또 하나의 층위가 생기면 얘기는 좀 더 복잡해진다. 예술가들, 특히 음악가들은 종종 자신의 작품을 위해 사랑 따위는 중요하지 않거나, 사랑이 아닌, 보다 변칙의 삶이 필요하다는 이기주의에 휩싸이게 된다. 한 명의 예술가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축적돼야 한다. 그것 참 이상한 법칙이지만 대중들은 종종 예술을 위해 그 기이한 룰을 받아들이곤 한다. 지금도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무덤에 던져 버리는 사람은 없다. 그건 마치 영화계에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차이나타운’이나 ‘로즈메리 베이비’를 여전히 애호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 로만 폴란스키는 아동 성폭행 범죄를 12건이나 저질러 유럽에서 도피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72년~1917년은 러시아가 혁명으로 들끓던 시기이다. 특히 1872년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48년 칼 마르크스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을 '공산주의 선언'으로 바꿔 출판해 대중적 선동의 기치를 내세운 해였다. 미하일 바쿠닌이 이끄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 부패한 러시아 귀족사회인 로마노프 왕조를 연일 공격하던 시기였고 피폐한 민중의 삶은 급속도로 추락하던 때였다. 한편에서는 지식인들 그룹인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이 민중을 의식화시켜 제정 말기를 붕괴시키려 애쓰던 때였다. 차이콥스키는 이런 시기에 음악을 만들었으며 이런 시대에 소아성애에 집착했고 한 여인의 순종적 사랑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2시간이 넘는 시간 내내 비교적 차이콥스키의 ‘위대한’ 음악적 업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시대의 희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음을, 민중의 삶, 구체적으로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과는 유리돼 있었음을, 비교적 비판적 시선으로 이어가고 있다. 인물 구도와 비중에 있어 차이콥스키 대 밀류코바를 거의 7대 3비율로 구성한 것,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한 번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 등은 감독의 그런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안토니나 밀류코바의 구애 공세를 보여주는 영화 초반부는 눈물겹다. 여인은 예수에게 자신의 남자를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고 남자가 자기 것이 되게 해달라고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기도에 기도를 거듭한다. 남자에게 팬 레터를 보내고, 그에게 다가서기 위해 음악원에 들어가고, 결국 남자가 자기 집에 오게 하기 위해 편지에 편지를 쓰기를 반복한다. 남자가 방문하는 날 그녀는 온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가장 순결해 보이는 옷을 입고, 가장 예쁘게 차려입은 채 그와 마주 앉아 이렇게 말한다. “처음 뵈었던 날부터 제가 바랐던 건 한 가지예요. 선생님을 안고 키스하는 거 그리고 평생 함께 하는 거요. 그럴 자격이 없겠지만요. 정신 나간 팬은 아니에요. 이제 어떤 다른 남자에게는 끌리지 않아요.” 이런 고백을 하는 여인을 남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랑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한 가지나 몇 가지 법칙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매우 복잡 미묘한 것이며 늘 추앙과 비난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고 한참이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차이콥스키를 비난하지 않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둘의 만남은 애초부터 잘못됐던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사랑은 어렵다. 어려운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은 참담해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잔혹한 러브 스토리가 사람들을 성장시킨다.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던지는 궁극의 메시지이다.
영화계의 중진으로 비교적 큰 영화사의 임원까지 지냈던 R씨는 요즘 주말에 택배 일을 한다. 은퇴 나이를 훌쩍 넘겨 영화 일을 그만 둔 지는 꽤 됐지만 노후를 위해 돈을 모아 두지를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현재 매달 나오는 국민연금은 턱도 없는 얘기이다. 소일 거리라도 하며 주변 사람, 경조사 비용이라도 보탤 겸 하는 심정으로 그는 얼마 전부터 K 배달 업체 엡을 깔고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잘 연결되면 주말 하루에 10만 원 정도 벌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영화 배급 전문가인 A씨는 요즘 풀 타임 택배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 간다. 영화계에서는 그가 일 할 공간은 이제 거의 없다. 그는 배급 마케팅 베테랑이다. 그의 오랜 영화산업의 경험과 지식은 외면 받고 있다. A씨는 야구 모자를 쓰고 다닌다. “나는 괜찮은데, 혹시 영화 쪽 아는 사람을 만나면 상대가 민망해 할 것 같아서”라고 그는 말했다. 이런 사례는 무수하게 많다. 영화 현장 미술 스태프로 일했던 M씨도 요즘 편의점 심야 알바로 생계비를 번다. “일이 전혀 들어 오지 않는다”며 그는 한숨을 쉰다. 나이가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리 운전을 뛴다. 유명 영화에 나왔던 조단역 배우들은 “어차피 얼굴도 못 알아 본다”며 자조 섞인 웃음을 띈다. 홍준표 대구 시장은 연예계가 좌파 일색인데 지난 총선 유세를 도왔던 일부 연예인들에게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다. 연예계, 특히 영화계가 좌파인 이유, 반 정부적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홍준표 시장은 지나가는 얘기처럼 했지만 누구에게는 곱게 들리지 않는다. 보편적 복지 운운하면 지금의 집권당이나 강남 3구, 송파 사람들은, 당장 빨갱이 운운하지만 영화 일 같은 프리랜서 노동의 상황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영화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다. 물론 끈덕지게 영화 한편을 개발하고 그게 요행으로 흥행에 성공해 큰 돈을 벌 수 도 있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백 만분의 일, 천 만분의 일 확률이다. 평소 제대로 된 월급이나 자녀 학비를 벌어서 가정에 가져다 주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영화와 정치는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주변에 세가지 요건이 있어야 하는데 영화나 정치를 하려면 내가 돈이 있거나, 집안에 돈이 있거나, 친구가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흙수저 출신, 배경이 없는 사람은 영화를 하면 안된다. 기본 생계비를 보장받지 못한다. 한국영화인복지재단이라는 단체가 존재하지만 주 업무는 장학사업이다. 대체로 원로 영화인들에게 수혜가 돌아 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의미에서 김종대 전 정의당 의원이 말한 것처럼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은 비정규 노동자, 프리랜서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중심으로 재편돼야 한다. 영화계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국 사회주의자 영화감독 켄 로치의 영화 중에는 ‘미안해요, 리키’라는 작품이 있다.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이다. 의역하면 ‘문 앞에 물건 놓고 갑니다.’이다. 택배 일을 시작한, 리키라는 이름의 중년 실직 노동자 남자의 얘기이다. 그의 고된 일상을 종종 어린 딸이 동행한다. 그 어린 손으로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는 집 앞에 ‘부재중 배송’이란 의미의 글을 쓰는 아이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진다. 대통령은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하기 전에 이런 장면을 떠올렸을까. 그런 ‘깜량’이라도 되는 사람인가. '나오느니 한숨이로소이다'이다.
프랑스 출신의 촬영감독인 브누아 델롬의 첫 장편 연출작 ‘마더스’의 영어 원제는 마더스 인스팅트(Mothers’ Instinct)이다. 어퍼스트로피 s가 앞이 아니라 뒤에 찍혔다. 그러니까 엄마의 본능이 아니라 엄마들의 본능 혹은 엄마들의 직감이라는 뜻이겠다. 극 중 엄마가 복수하는 얘기이고 제목만으로도 두 엄마의 갈등, 음모, 범죄의 느낌이 나되, 그게 다 엄마 곧, 모성애의 발로나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2018년 올리비에 마셰 드파스가 만든 ‘뒤엘(Duelles, 대결)’을 리메이크한 영화이다. ‘마더스’는 제목을 원래대로 했다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를 수 있는 작품이다. 데미언-셀린 부부와 사이먼-앨리스 부부는 이웃간이다. 데미언(조쉬 팔스)은 제약회사에 다니고 사이먼(앤더슨 다니엘슨 라이)은 회계사이다. 셀린(앤 헤서웨이)은 예전에 간호사였고 앨리스(제시카 채스테인)는 기자였다. 네 사람 모두 40대 초반들이고(넷은 어느 날 케네디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가 너무 젊다고 데미언이 얘기하자 사이먼의 아내 앨리스는 "케네디는 43, 당신은 42이라며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중산층이며 막 상류층으로 갈 수 있을까 말까, 그 중간쯤 서 있는 화이트칼라 집안들이다. 이런 이웃일수록 당연히 아내끼리 친한 친구가 되는데 셀린과 앨리스는 각각 맥스와 테오, 8살짜리 동갑내기 아들을 키우며 더욱 더 가까워진 관계이다. 둘은 번갈아 가며 아이들이 하교할 때 데리러 갈 정도의 사이이다. 맥스와 테오, 아이 둘도 더없이 막역하게 지낸다. 문제는 사고가 터진다는 것이다. 셀린의 아들 맥스가 어느 날 새집을 나무에 건다며 2층 발코니 난간에 올라 섰다가 추락사한다. 이웃의 앨리스는 아이가 난간에 올라갔던 바로 그 순간을 목격했고 옆집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다. 엄마인 셀린은 아래층에서 전기 청소기로 청소를 하고 있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셀린이나 앨리스나 두 사람 모두 이후 슬픔과 죄책감이라는 두 감정 사이의 골짜기에서 기이한 증오와 분노에 시달리게 된다. 셀린과 앨리스는 맥스가 죽은 것이 서로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또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라며 이성적인 생각으로 돌아와 서로를 위안하기 일쑤이다. 왔다 갔다의 싸움을 반복하는 사이 두 집안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잇따른다. 앨리스의 시어머니가 정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가 하면 셀린의 남편 데미언은 결국 자살을 한다. 워낙 신경쇠약증이 있었던 앨리스는 이 모든 일이 셀린이 꾸민 일, 자신에게 왠지 아들 맥스의 복수를 하려는 계획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셀린은 셀린대로 앨리스가 점점 더 과대망상증이 심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여자의 '뒤엘' 곧, 대결이 시작된다. 누구의 짓일까. 앨리스의 정신이상일까. 셀린의 교묘한 범행일까. 원작은 2018년 ‘뒤엘’이라고 했지만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샤론 스톤과 이자벨아자니가 나왔던 1996년작 ‘디아볼릭’과 1974년 존 바담 감독이 만든 ‘애증의 덫’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조 격인 1955년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릭’을 닮아 있다. 물론 ‘마더스’는 이들 작품과 이야기와 줄거리가 전혀 다르지만 서스펜스, 곧 그 극적 긴장감의 분위기를 닮으려 했다는 점에서 드라마의 주조(主潮)를 ‘디아볼릭’에서 가져오려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예컨대 이런 서스펜스의 분위기를 말한다. 앨리스는 셀린이 차를 몰고 외출하는 것을 창 밖으로 지켜보다 그녀 집의 열쇠를 갖고 이웃집으로 몰래 들어 간다. (둘은 집 키를 서로 나눠 가질 만큼 친한 사이였다.) 앨리스는 셀린 집 지하에 가서 약품함을 뒤지려 하지만 잠겨져 있다. 그때 셀린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지하에 있던 앨리스는 황급히 불을 끄고 계단 밑으로 몸을 숨긴다. 셀린은 지하로 가는 문이 약간 열려 있는 걸 보고 의아해 한다. 셀린은 지하로 내려가지만 몸을 숨긴 앨리스를 보지 못한다. 관객 눈에는 지하 차창으로 들어오는 불빛으로 앨리스의 얼굴 일부가 보이지만 정작 셀린은 알아채지 못한다. 셀린은 다시 1층으로 올라가고 앨리스는 조금 후 안도의 한숨을 쉰 후 올라가지만 막상 1층에서 기다리던 셀린에게 들키고 만다. 둘은 심한 말싸움을 벌인다. 둘의 말싸움은 이후 점점 더 심한 몸싸움으로 이어지게 된다. 둘의 대결은 심해진다. 영화 ‘마더스’는 엄마 둘, 여자 둘의 대결, 그 결투가 점점 더 선을 넘게 되는, 그 점층법의 서사가 잘 짜인 작품이다. 엄마의 본능, 직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엄마는 아이가 아프려고 하면 이미 그 전조를 몸으로 감지한다. 아이들과 정신이 연결돼 있는 엄마들에게 자식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험과 같다. 아이가 죽으면 엄마는,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를 대체할 무엇, 대신할 누구를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종종 그것은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한다. 모성애는 때론 너무 지나쳐서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파국으로 만들 때가 많다. 영화 ‘마더스’는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두고 43살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인 1960년인 것으로 보인다. 케네디는 61년에 대통령이 됐다. 60년 현재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었으며 공화당 정부가 집권하던 시절이다. 케네디는 ‘뉴 프론티어(새로운 개척 정신)’을 내세우며 대선 캠페인을 성공시켰다. 당시 미국은 2차 대전과 한국 전쟁 등을 딛고 일등 국가로 올라서고 있을 때로 셀린-앨리스 집처럼 신흥 중산층들이 양산되던 때였다. 그러나 곧 케네디의 암살을 전후해 60년대 미국 사회는 극도의 분열과 갈등으로 접어들게 되고 결국 이들 중산층 사회가 몰락하게 되면서 미국은 계급의 양극화가 점점 더 심화된다. 지금 미국의 문제는 바로 이때, 60년대 형성된 진보적 중산층 가정의 붕괴와 분화로부터 시작된 셈이라는 것이다. 모성의 가치가 언제부터 변질됐는가, 언제부터 정신 이상적이 되어 갔는가를 지켜보는 건 다소 아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모성애가 이상성을 지니게 된 이상 가정과 사회는 복원되기가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브누아 델롬 감독이 그런 고차 방정식까지 고려하며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감독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정치사회학을 스스로의 작품에 배태(胚胎) 시키곤 한다. ‘마더스’에는 그런 사회성이 담겨 있다. 제스카 채스테인과 앤 해서웨이의 연기 대결은 거의 불꽃이다. 채스테인은 77년생이고 해서웨이는 82년생이다. 여전히 뛰어난 미모를 유지하면서들, 연기력은 보다 더 고급스러워지고 지적이면서, 매력적이고 육감적이 됐다. 둘 다 연기력 면에서 지금이야말로 전성기임을 보여 준다. 두 여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찾아볼 만한 작품이다. 지난 3일 개봉됐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60년대 초 미국의 한 가정사를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갖는 위기의 정서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불안하고 불길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가 무너지면 가정이 붕괴한다. 모성이 왜곡되면 사회가 망가진다. 그건 언제 어디서나 다른 말로도 적용되고 응용될 수 있는 명제이다.
넷플릭스가 3월 초 공개했던 송중기 주연의 영화 ‘로기완’은 대단히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잘못 만든 작품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이한 소재의 영화였고 북한, 탈북, 난민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새로웠다. 배우들도 안정적이다. 특히 조연들, 서브 텍스트 인물들이 흔들리는 드라마 전체를 탄탄하게 받쳐 낸다. 로기완 삼촌 역의 서현우와 엄마 역의 김성령은 일단 이 영화의 시작을 좋게 만든다. 연변 여자로 로기완의 고기 공장 선배 격인 선주 역의 이상희는 늘 그렇지만 연기가 최고 급이다. 변호사 역으로 나온 강길우, 여자 주인공 마리의 아버지 역으로 나온 조한철도 영화 전체를 안정적으로 받쳐 준다. 심지어 마리의 죽은 엄마 역의 이일화도 나쁘지 않다. 이 영화는 어쩌면 캐스팅이 살린 작품이다. 여주인공 마리 역을 맡은 최성은은 잘 하지도 못하지도 못했다. 그건 순전히 이 마리라는 캐릭터가, 당초 영화가 추구했던 작품의 방향(그런 게 만약 있었다면)에 비해 지나치게 과장되게 ‘운행됐기’ 때문이다. 그녀는 갱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격 도박판의 선수이다. 마리는 술과 약물, 무엇보다 폭력에 휩싸여 살아가는 위험한 상태의 여자이다. 그럼에도 배역을 맡은 최성은(‘시동’ ‘젠틀맨’)은 최선을 다한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로기완 역의 송중기는 오랜 경력의 배우답게 부드럽고 순조롭게 연기를 이어 간다. 다소 ‘쉽게 간다’는 느낌까지 줄 정도이다. 이 영화의 최대 실수는 결말이다. 감독 김희진의 선택인지, 제작사 용필름의 임승용 프로듀서의 결정인지, 아니면 넷플릭스의 압력이었는지(넷플릭스는 최소한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모르겠으나 마지막을 꾸려 간 서사의 방식은 전형성의 식상함을 벗어나지 못해 인상을 찌푸리게까지 한다.(풀 샷 화면 양쪽에서 달려오는 두 남녀의 씬이란...70년대 한국 영화 화법이다.) 무엇보다 앞의 서사와 역설적으로 충돌하는 선택이기도 했다. 주인공 로기완은 살아남는 것 외에는 모든 게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현재적 삶의 조건이 그런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마지막 결말은 그가 그렇게 얘기했던 사치의 극단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많은 관객들, OTT 시청자들이 이 영화의 결말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평자의 입장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로기완의 남한식 이름은 노기완이겠다. 1990년 12월 1일 생이고 북한 자강도(과거의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의 일부를 통합한 구역) 우서군 출신이다. 그곳 하상협동농장 관리위원회 제7작업실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슨 일엔가에 연루돼 북한을 탈출했으며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로기완은 탈북자 신분으로 벨기에에 왔지만 도통 정치적 난민의 자격을 얻기가 쉽지 않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국가가 지원하는 생활비를 얻을 수 있다. 거주민 자격을 얻으면 취직도 가능하고 여러 합법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정치적 망명자들이 난민 자격을 따내려고 애를 쓴다. 경쟁이 이만저만 치열한 것이 아니다. 그 자격을 얻기까지 많은 난민들은 불법체류의 노동에 시달린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당 국가 내의 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해당 국가 공권력의 행사 때문에 빚어지는 일일 수도 있지만 가장 심한 것은 자국 노동자들의 차별 때문이다. 자국 노동자들은 난민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그들은 불법 이주자들을 걷어차고 침을 뱉으며 (얼마 되지도 않는) 가진 걸 빼앗아 가려 한다. 그리고 늘 이렇게 얘기한다. “니들 나라로 돌아가!” 난민들이 가는 나라마다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이유이다. 로기완도 이런 폭행을 수없이 겪는다. 영화 ‘로기완’은 유럽의 한 탈북민이 겪는 처참하고 치열한 생존기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탈북자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 역시 꽤나 양가적(兩家的)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탈북자들에 대해 모순과 이중적 감정을 지녀 왔다. 하나는 강고하고 지독한 북한식 사회주의 독재(조선왕조 공산주의)에서 탄압받았던 약자의 인물이라 해서 동정하고 지지하는 반면 또 한편으로는 이들이 남한 내에서 극우적 정치인이나 극보수의 기독교도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편승해 우리 사회 내 사회민주화를 방해하는 기회주의적인 인물들로 치부하곤 한다. 영화 ‘로기완’은 탈북민들에 대한 우리의 위선적이고 중첩된 시각을 비껴가게 한다. 탈북민은 어떤 지옥에서라도 살아남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고 세상은 늘 지옥에서 살아 남는 자들이 지옥을 만든 자들을 이기는 법이다. 로기완의 엄마는 죽어 가는 와중에 너는 죽지 말고 어떻게든 꼭 살아남으라며, 여기 말고 어디 좋은 데로 가서 인간답게 살다 죽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로기완은 어머니의 시신을 시체 해부용으로 병원에 판 돈으로 지옥의 땅을 벗어 난다. 엄마의 몸뚱이를 판 돈으로 그는 자유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건 로기완의 나중에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깨달은 사실과 맥락이 같은 것이다. 자신과 같은 (정치적 난민은) 벨기에(같은 국가의 땅에서) 살 권리도 없지만 떠날 권리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어머니의 돈으로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정치적 자유가 곧 정신적 자유까지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는 오랜 기간, 상처(그의 왼쪽 손목에 나있는 면도날 자국)와 트라우마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로기완’은 따라서, 그런 처절하면서도 절절한 비극적 정서에 좀 더 몰입되어야 했던 작품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져가야 했을 주조(主潮)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제 북한이니, 탈북이니 하는 얘기의 영화는 성공 가능성이 없다. 제작사 용 필름(‘뷰티 인사이드’ ‘독전’ 등)이 걱정했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을 것이다. 원작에는 거의 없는 캐릭터 마리가 과도하게 증폭된 이유이다. 제작자와 감독은 이 영화를 대중적인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로맨스와 액션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넣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너무 나갔다. 둘의 연애가 너무 달콤하고 순진하며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다소 갑작스럽다. 특히 마리가 아버지에게 엄마의 안락사 과정을 추궁하는 장면은 식상함의 극치이기도 하다. 마리는 오랜 투병 생활을 한 엄마의 죽음을 오직 아빠의 책임으로만 묻는다. 그녀는 엄마의 추도 모임에서까지 약에 취해 난동을 피운다.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지는 장면을 더러 넣은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편집에서 과감하게 들어냈어야 옳았다. 원작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는 탈북자 로기완을 만나기 위해 벨기에에 온 한 르포라이터 작가인 김 작가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그녀, 김 작가는 로기완을 만나지는 못하지만(그는 이미 영국으로 떠났다.) 박이라는 사람을 통해 그의 일기장을 전해 받는다. 원작에서 아내가 안락사로 숨을 거두는 사람은 바로 이 박이라는 한인공동체 봉사 요원이다. 김 작가는 한국 출판사에 자신을 연모하는 사람이 있지만 박을 통해 로기완과 교감하기 시작한다. 소설의 주인공 김 작가가 결국 깨닫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사실은 ‘난민적’ 존재라는 것이며 난민들이 정착을 원하듯 우리 모두도 (정신적) 정착을 원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영화 ‘로기완’은 원작의 모든 캐릭터를 병합하거나 분리하고,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원작과는 다른 선상에 놓일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주력한다. 결과는 원작과는 달리 다소 상업적이고 대중적이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 ‘로기완’이 아까운 것은 그 지점에 놓여 있다. 적절한 작품성과 문학성, 적절한 상업성과 대중성을 혼합해 균형을 맞췄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걸 보여 줄 수 있는 게 바로 엔딩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열린 결말로 가야 했을 것이다. 혹여나 마지막 장면(그게 설마 마다가스카르라고 얘기하지는 말지니)이 로기완의 상상이자 판타지였다고 말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제발 그거였으면 좋겠다. 평론가로서 진정으로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