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극장이 사멸중이다. 극장용 영화가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는 코로나 때부터 터져 나왔다. 포스트 코로나, 뉴 노멀 시대가 매우 불안하다고들 얘기했는데 이제는 정말 죽었다, 망했다로 귀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극장 티켓 가격은 최고치를 찍고 있다. 주말에는 1만6천원까지 받는다. 거기에 가계 대출금리는 오르고 모든 물가, 심지어 라면 값까지 올라 소비심리가 극도로 위축된 상황이다. 사람들이 제일 먼저 줄이는 게 문화 소비다. 엥겔 계수가 높아진다. 이런 와중에 주무부처의 장관은 유인촌이 됐다. 그는 강성의 자본주의자이다. MB시절이 학습효과를 생각하면 그는 선택과 집중 논리를 내세울 것이다. 되는 영화에만 지원을 하려 할 것이다. 이른바 낙수 효과 론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되는 영화만 지원한 결과 되는 영화까지 망하는 결과를 초래해 왔다. 이건 보수 정부, 진보 정부 가리지 않고 비판 받아야 할 대목이다. 어찌 보면 문재인 정부 때 최고의 기회를 놓쳤다. 문재인이 문화 정책을 우선시하지 않은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도종환-박양우-황희로 이어지는 장관 명단은 지금 봐도 그리 명석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정부의 박보균 – 유인촌 순번은 지나치게 정치적 판단에 입각한 인사로 보인다. 물론 영화는 지도급 인사들에 상관없이 스스로 생존해 온 측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극장용 영화가 망하고 있는 것은 이놈의 사회 탓일까 아니면 영화 스스로가 못나고 잘못한 탓일까. 국내영화산업이 ‘잘 나가던 때’는 1년 총 관객 수가 2억 명을 넘게 찍었다. 현재까지, 3/4분기까지의 추세를 보면 1억3000만을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반 토막이 났다. 지난 9월 관객 수는 추석 연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 수가 660만명에서 그쳤다. 최대 비수기라는 4월의 약 700만 관객 수에도 못 미친 수치이다. 한국 블록버스터급 흥행 영화의 창시자(?)였던 강제규 감독의 ‘1947보스톤’이 100만을 못 넘기고, 강동원이 나온 ‘천박사 퇴마연구소 : 설경의 비밀’도 BEP 한참 전에 무너졌으며,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은 영화적 완성도가 뛰어나고 송강호가 주연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30만(세상에!)을 넘기지 못했다. 오늘 내일 하던 극장이 이번 9월-10월로 사실상 뇌사 판정을 받은 셈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원인 분석이 정확해야 한다. 영화 배급유통 전문가 이하영 씨의 얘기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는 “1960년대 TV의 보급이 대중화 됐을 때도 극장의 위기는 찾아 왔었다”며 “그러나 10대와 20대들이 극장으로 돌아 온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OTT 탓만 할 것이 아니라 10대와 20대를 겨냥한 영화들이 기획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그는 내다 본다. 이들 연령층은 1960년대나 지금이나 부모 세대와 같이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같이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추석과 같은 주요 시즌에 있어 극장 소비의 중심은 팝콘과 콜라를 껴안고 극장 안에서 모임이나 데이트를 즐기는 어린 청소년들과 젊은 연인들이었다. 이하영 씨의 말 대로 이들에게 맞춤형의 영화(‘1947보스톤’보다는 ‘더 퍼스트 슬램 덩크’같은 것)가 없는 것이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지만 이들의 주머니가 텅텅 비어 있는 것, 거기에 물가는 천정부지의 수준이라는 것, 젠더 갈등의 심화로 남녀가 잘 만나지 않는 것, 마이너스 출산율에 따라 젊은 층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 등등 정치사회 현상 모두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건 빈곤의 악순환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니, 극장용 영화가 망하고 있는 것은 영화 탓이기도 하지만 사회 탓이기도 하다는 얘기이다. 그 솔루션은 두 가지 다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1차적으로는 큰 극장에 들어 갈 영화의 경우 정교하게 구분해 지원해야 할 것이다. 젊은 층을 끌어 낼 수 있는 영화들, 결국 청춘물이나 애니메이션들이 돼야 할 것인 바 이럴 경우 결국 일본 ‘꼴’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여기에서도 단계적으로, 균형 있게 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영화와 드라마 등등의 구별없이 콘텐츠라면 모두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새로운 감독과 제작자, 배우를 발굴할 수 있는, 산업저변까지 지원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큰 극장 시스템에 의존하는 정책은 버릴 때가 됐다. 독립영화 예술영화 작은 영화관, 개성있는 영화제에 집중하는 차별화된 정책을 펼쳐야 할 때이다. 이런 추세라면 체인 극장들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기업 영화사의 수직계열화(배급사와 극장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 문제,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단초이다. 전환기에 정책도 발상의 전환으로 맞서야 한다.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양적 확대이다. 영화와 문화산업의 성장을 위해서 지금은 돈을 풀 때이지, 선택과 집중이라는 허울 아래 돈을 묶을 때가 아니다. 그런데 유인촌 장관이 과연 그렇게 할까? 언감생심이다. 때문에 극장용 영화는 이제 곧 사망선고를 내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두려운 일이다.
지난 5월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된 영화 ‘화란’의 화란은 네덜란드의 한자어이다. 주인공 연규(홍사빈)는 야구 방망이로 폭력을 일삼는 계부(유성주)때문에 숨 막히는 가정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어 한다. 연규 집은 가난하다. 엄마는 치킨 집에서 일한다. 동네가 다 그렇다. 연규는 동네 깡패 치건(송중기)에게 거기(화란)는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산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연규는 영화 내내 네덜란드에 가지 못한다. 네덜란드 얘기는 영화 속에서 그렇게, 딱 한 번 나온다. 그러니까 영화 ‘화란’은 네덜란드와 사실 하등의 상관이 없다. 그건 영화 ‘암스테르담’이 사실은 암스테르담과 상관이 없는 것과 똑같다. ‘화란’은 액션 누아르이다. 손톱을 펜치로 뽑고 못을 뭉쳐서 얼굴을 후갈기는 등등 폭력이 난무하는 편이다. 동네 깡패들과 지역 정치권이 야합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에서 좋은 장면은 액션이 아니라 두 개의 대화 장면이다. 치건이 연규에게 너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연규의 온몸엔 학교 애들에게 맞은 구타 자국이 있고 그의 왼쪽 눈 옆은 아버지한테 맞아 죽 찢어진 상태다. 연규는 18살이지만 그의 삶은 마치 50년은 살아온 만큼 구겨지고 닳아 있다. 희망이 없다. 꽤나 절망적이다. 연규는 자신은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며 자기는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동네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러자 치건이 말한다. “그건 나도 그래. 근데 이 동네, 정말 X 같은 곳이란다.” 치건은 자기 밑에서 험한 일을 배우기 시작한 연규를 데리고 호수인지 저수지인지 모를 어딘 가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물 건너편 방갈로 같은 곳에서는 정치권 인사가 있고 치건 패거리는 거기에 돈과 젊은 여자를 보내 놓은 참이다. 치건은 자신이 어릴 때 낚시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물가에 갔다가 물에 빠졌고, 거의 죽다 살았으며, 그런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큰 형님인데 숨이 돌아오자마자 허겁지겁 아버지에게 가서 물어 본 말이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어요,라고 물었어. 근데 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치건의 아버지는 과거에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 뭔 일 있었니?” 치건은 덧붙인다. “그때 걔는 죽었어. 이미 죽은 거야.” 피가 낭자한 영화는 사실 속에 목적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낭자한 피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피를 낭자하게 흘리게 만드는 사회와 세상을 지목하고 싶어 한다. 영화가 폭력을 소재나 테마로 하는 이유는 개인의 폭력보다는 공간과 사회구조, 세상이 자행하는 폭력의 강도가 더욱 잔인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그것이야말로 상충되는 단어가 짝을 이룬 ‘폭력의 미학’이란 말의 의미이다. 샘 페킨파가 서부극에서 보여 준 발레 같은 총격 씬, 박찬욱이 보여 주는 극악한 폭력 심리 등등과도 다 연결돼 있다. 액션 누아르가 찌르고 베이는 장면 너머 뭔가를 지니고 있는가 여부는 작품의 완성도와 연결된다. ‘화란’은 그 지점을 찾아가고 돌파하려 애쓰고 어딘 가엔가 정서적 큰 덩어리를 만들려고 한다. 그 점을 높이 사야 하는 작품인 바, 더욱더 놀랍게도 감독 김창훈은 이번이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신인이 놀랄 만한 작품을 만든 셈이다. 영화 ‘화란’에는 두 가지가 부재하다. 하나는 부성이 없다. 영화 속에는 아버지란 존재가 없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있다. 그러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거나 아예 없는 것이 낫다. 그럼으로 부성, 그리고 흔히들 얘기하는 부성애가 없다. 부성만 있으면 기계적이고 폭력적인 가부장의 사회일 뿐이다. 올바른 가부장의 집안 관계, 아버지의 권위가 서 있는 가족이란 부성애가 진실되게 구현되는 관계를 말한다. 툭하면 애들을 때리고 패는 아버지 밑에서는 아이들이 온전할 리가 없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는 부성애가 없다. 진짜 아버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버지들이 아이를 구하기보다는 위험 지구로 내 모는 형국만 그려진다. 이런 세상은 살만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영화가 절망을 그리고 있다는 이유이다. 영화 속에서 또 하나 없는 것은, 그리고 이건 기이하게도 실재로 한 번도 극 중에서 드러나지 않는데, 공권력=경찰이란 존재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경찰이나 사법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경찰이란 실체는 어쩌면 사회 내에 작동하는 부성의 가치관을 대변할 수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의존성을 갖게 된다. 사람들도 사회 내의 권위적인 무엇(정치, 판사, 경찰 등)에 기대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건 것이 이 영화에는 없다. ‘화란’은 아예 그런 존재를 깔아뭉개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실제 사회에 그런 카리스마를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극 중 두 인물은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의사(擬似, 가짜) 부자 관계로 만들려고 한다. 치건은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연규에게 그렇게 부르지 말고 그냥 형이라고 하라고 한다. 이때부터 연규는 치건을 형이라고 부른다. 그건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두 단어의 어감 차이는 크다. 그건 애정의 밀도와도 관계가 있다. 치건은 치건대로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경험, 그래서 자신이 죽고, 거꾸로 아버지가 죽어 버린 인생에서 연규를 통해 유사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내려 한다. 자기 식의 부성의 회복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잃어버린 아버지를 되찾고 싶어 한다. 이 영화 ‘화란’은 결국 잃어버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얘기이다. 진정한 의미의 부성의 회복에 대해 얘기하는 영화이다. 영화가 어마어마하게 폼만 잔뜩 잡는 마피아의 세계를 그리는 것도 아니다. 볼 품 없는 지방(예컨대 지금은 지명이 없어진 마산 같은 곳)의 한 작은 동네, 거기서도 오토바이 수리점이나 카센터, 철물점 등이 모여 있는, 다소 빈궁하고 비루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치건 일당은 거기서 오토바이를 훔쳐서 돈이 궁한 자영업자들에게 되팔고 고리를 뜯는 일로 살아간다. 치건의 뒤에는 큰 형님(김종수)이 있는데 그래 봐야 동네 유지급 작은 세계의 조폭 두목일 뿐이다. 큰 형님은 지역 개발 과정의 이권에 개입하며 그걸 위해 오랫동안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이 될 인물을 키워 왔다. 작은 세계의 범죄이지만 그 룰과 법칙, 과정은 큰 세계, 큰 조직의 범죄, 중앙 정치권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영화는 늘 작은 세상으로 큰 세상을 보여 준다. 그게 맞다. 그게 더 예리하고 정확하며 작은 물이 큰 바다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화란’은 그 정서적 점층법이 좋은 작품이다. 모두들 송중기와 홍사빈의 연기를 두고 얘기하지만 일부 평자의 눈에는 정재광이 보인다. 혹은 정재광만 보인다. 압도적인 연기력을 보여 준다. 그는 치건 패거리의 2인자로 나온다. 살벌하다. 허구헌날 이자 납부 문제로 린치를 당하는 오토바이 일용 배달꾼 역의 홍서백이란 배우도 좋다. 그가 절룩거리며 걸을 때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절룩거리게 된다. 큰 형님 역의 김종수, 중국음식점 주인 역의 정만식 등등 서브 텍스트를 맡은 배우들의 연기도 한몫한다. 주 조연의 연기가 펄펄 난다. 송중기가 매우 차가운 이미지를 선보인다. 그의 대사가 자꾸 생각이 난다. “할 수 없어. 이건 해야 해. 해야만 하는 거야.” 부드럽지만 비정하다. 가장 무서운 폭력은 친절하고 무서운 법이다. 송중기가 보여 주는 새로운 세계이다.
영화의 화두는 시대에 따라 옮겨 다닌다. 한때는 정치적 난민 문제가 대세였다. 시리아 독재와 내전이 유발한 난민이 어떤 국제 분쟁으로 이어졌고, 자국 내 이민자 문제의 정치 쟁점화로 연결됐으며, 그로 인해 트럼프 식의 극우 정치집단들을 양산해 내는지를 다뤘다. 그러다가 또 언제부터인가 많은 관심이 환경 문제로 옮겨 갔다. 모두들 엘 고어 식 ‘불편한 진실’에 대해 얘기했다. 요즘의 메인 테마는 AI이다. AI 시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를 다룬다. AI라는 초유의 인공지능 기술이 신 제국주의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AI 기술이 앞으로 그야말로 인간 해방에 일조하는 장미 빛 미래가 될 것인지에 대해 분석하고, 걱정하고, 공감한다. 영국 가렛 에드워즈 감독의 ‘뛰어난 지능’이 돋보이는 영화 ‘크리에이터, The Creator’는 AI 얘기를 다룬 것 중 가장 혁신적이면서, 또 가장 정치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몇 가지 지점에서 깜짝 놀라게 되는데 1) 배경은 2066년이지만 실제 얘기는 1960년대의 베트남전이라는 것 2) 여기에 9.11 테러의 역사를 얹히되 부시-럼스펠드-딕 체니가 공모한 공작 정치의 이슈였던, 대량살상무기 색출 문제를 소환시켰다는 것이다. 또 3) 이걸 리들리 스콧의 1980년작 ‘블레이드 러너’의 분위기로 만들고 4) 또 여기에다 1979년작인 프랜시스 F.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의 전쟁 액션 영화 같은 분위기를 덧칠했다는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역사가 영화가 된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 의식과 관념의 싱크로율이 대단한 작품이다. 1975년생인 감독 가렛 에드워즈가 뛰어난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영화는 뉴스 릴이 아닌 (연출된) 뉴스 릴로 시작된다. 미국 합참의장인 듯이 보이는 고위급 군 인사가 미 의회 연단에 올라 말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10년 전 LA 핵폭탄이 터졌다, 인간을 보호해야 할 AI들이 저지른 짓이다, 우리는 끝까지 AI들을 색출해서 제거할 것이다. 또 우리는 얼마 전 AI들의 본거지를 찾아냈으며 곧 노마드(미국이 개발한 일종의 대형 전술핵미사일 시스템 및 무기)를 이용해 그곳을 섬멸할 것이다, 그곳은 뉴 아시안 지역이다, 강조하건대 뉴 아시안 지역에서의 전쟁은 AI를 없애는 것이지 그곳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 드린다, 등등이다. 뉴 아시안 지역은 AI와 시밀러(the similar, 곧 半인半로봇들로 피부 재생과 이식을 통해 얼굴과 외모는 사람 모습이다.)들 그리고 진짜 인간들이 공존하며 살고 있는 지역으로 설정된다. 영화는 종종 이곳을 부감 쇼트로 보여 주는데 마치 북베트남에 있는 하롱 베이처럼 보인다. 베트남이 요즘 할리우드 시각에서 확실한 이머징 국가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영화 속 도심은 중국 베이징과 도쿄 올드 타운을 뒤섞은 이미지를 연상시킴으로써 영화가 표방하는 범아시아적 특징을 나타낸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넘어 결국 미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경쟁 대립 관계를 상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인류의 희망은 미국이 아니라 아시아권에서 나올 것이라는 감독의 친 아시아적 특징을 드러내기도 한다. 게다가 주인공은 흑인인데 이름이 여호수아(에수)의 다른 말인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이다. 조슈아가 사랑하는 마야(젬마 찬)는 인도계 아시안처럼 느껴진다. 마야는 하웰 대령(앨리슨 제니)이 지휘하는 미 해병 특수부대원들이 그렇게나 색출해서 없애려는 AI의 정신적 지도자 니르마타이다. 니르마타는 힌두어에서 유래된 듯이 보인다. 둘의 사이에서 태어날 뻔하고 결국 마야가 자신의 아이를 대체할 AI 인간으로 재탄생시킨 알피(매들린 유나 보일스)의 이름이 지닌 의미도 히브리어로 신을 뜻한다. AI 병사들을 이끌고 있는 저항군의 지도자 하룬(와타나베 켄)은 종종 일본 말을 쓴다. 이 모든 것은 영화 ‘크리에이터’가 脫서구화, 비욘드(beyond) 미국화를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LA에 터뜨려 순식간에 100만 명을 살상하고 인류를 위협한 AI의 핵폭탄 공격에 대한 얘기나, AI들의 절대적 비밀병기이자 초능력자인 알피의 존재를 찾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벌이는 군사 행동은 과거 부시 행정부가 대량 살상(화학) 무기를 찾아내겠다며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부시의 정치군사적 목적은 미국 특히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미국식 자본주의를 이식시켜 경제적 이권을 챙기려는 것이었다. 그때도 내세운 슬로건은 군사공격의 대상이 독재자 후세인이지 이라크 민중은 아니라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라크 내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실상을 담은 영화가 폴 그린 그래스 감독이 2010년에 만든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그린 존’이다. ‘크리에이터’에서 AI의 저항군 지도자 하룬은 주인공 조슈아에게 하소연하듯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요. 서로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오” 조슈아가 사랑하는 여인 마야는 언제가 노마드의 공격으로 눈앞에서 부모를 잃은 AI 아이의 비참한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마야는 울먹이며 조슈아에게 말한다. “이제 이 전쟁을 끝내야 해” 조슈아는 니르마타를 잡기 위해 마야에 접근한 언더 커버다. 프락치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야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오로지 마야밖에 모른다. 니르마타는 잡더라도 마야는 데려오겠다고 생각한다. 순진하다. 잔혹한 하웰 대령의 군사작전에 참여하고 길잡이로 나선 것도 죽었다고 생각한 마야가 AI 지역 뉴아시아 본거지에 살아 있다는 첩보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 여자밖에 모르던 조슈아는 아이 알피를 만나고 하룬 등과 같이 저항군의 일원이 되면서(하룬은 조슈아에게 말한다. “당신도 이제 우리와 같아진 거야!”)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현실을 바꾸는 개혁에 나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현실 개혁은 그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현실은 개혁을 위해 존재하며 개혁은 현실 없이는 불가능하다. 변증법이다. 미군의 첨단 헬기가 뉴아시아 존을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는 모습은 ‘지옥의 묵시록’에서 나오는 헬기 장면, 바그너의 발퀴레 제3막 ‘발퀴레의 기행’이 깔리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지상에서 미군과 저항군이 싸우는 모습은 ‘스타 워즈’를 닮아 있다. 할리우드의 수많은 전작들에게서 가져온 엄청난 양의 레퍼런스들은 이 영화를 보는 묘미 중의 하나이다. 미국 영화로 미국 영화를 뛰어넘으려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새로운 미국 영화는 어쩌면 철저하게 미국적인 것을 답습하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다는 얘기이다. 미래 세계의 모습을, 베트남전 시대로 회귀시킨 역사의식도 남다르게 보인다. 월남전은 미국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이다. 미국은 공산 반군을 없앤다며 베트남 양민들을 학살했다. 영화 속에서 미 해병대들이 AI와, AI와 함께 사는 사람들(마치 1960년대 미국 내 유색인종의 인권을 돕는 백인들처럼)을 공격하는 장면은 거의 명백히 미라이 양민 학살 사건(1968년 캘리 소대가 베트남 미라이 마을 주민 500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올리버 스톤의 1986년 영화 ‘플래툰’의 소재가 됐다.)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크리에이터’는 AI 시대에 이르러서도 베트남전의 악몽과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역사적 의지를 보여 준다. 한편으로는 전쟁의 상처란, 족히 100년에 이를 수도 있음을 역설한다. ‘크리에이터’는 SF 영화가 역사영화가 될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한 작품이다. 미래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된다. ‘크리에이터’는 미래이자 현재이며 과거를 다룬 작품이다. 그 점이 좋은 작품이다. 그것도 아주.
다큐멘터리는 역설적으로 脫다큐적일 때, 다큐처럼 보이지 않을 때 생명의 리듬을 얻는다. 재미와 흥미가 배가된다. 물론 잘 만들었을 때에 한한다. 구성이 돋보이고 주제의식의 심층에 보편타당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무엇을 매달아 놓을 때이다. 요즘의 다큐는 드라마 타이즈 형식으로 전체를 구성하고 역사적 팩트에 대한 해석에 있어 주관적 시선을 강하게 개입시킴으로써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극영화에 가까운 작품일수록 청년 세대들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른바 비정통 다큐멘터리의 정통화인데 최근 개봉된 ‘킴스 비디오’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폭발적 재미를 준다. 동시에 세대 간 단절의 시대에 다리를 놓는다. 밀레니엄 이전과 이후를 이어 간다. 현재의 대중 상업영화가 1970~1990년대의 하위문화, 전위적인 것들과 뿌리를 같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킴스 비디오’는 보기 드문 다큐이다. ‘킴스 비디오’는 우리 말로 하면 김씨네 비디오 가게이다. 미국 뉴욕 맨하탄 이스트 빌리지에 있던 비디오 점이다. 세인트 막스 플레이스(Saint Mark’s Place)에 있었으며 지번으로는 8번가로 세컨드 애버뉴(2nd avenue)와 서드 애버뉴(3rd avenue) 사이이다. 온갖 해적판이 난무하고 칸과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 작품들을 다 모은….이 아니고 그런 작품은 오히려 구석으로 밀려난, 그보다는 듣도 보도 못한 세상 구석의 영화제 작품들, 이른바 B 무비로 불리는 모든 비주류 영화들, 아방가르드 작품들, 대학생 영화들로 가득 찼던 가게이다. 새로운 재미와 (세상과 예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영화들에 목말라하는 영화광들이 열광하는 비디오 가게로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비디오 대여점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코언 형제 감독이 단골이었던 곳이다. 코언 형제는 대여 연체료가 600달러나 쌓여 있다고 할 정도였다. 마틴 스콜 세이지, 로버트 드 니로도 자주 드나들었다. 킴스 비디오는 뉴욕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대표했으며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간 인기로 뉴욕 내에 체인 망 지점을 모두 11개나 열었던 적도 있을 정도다. 이중 몬도 킴스(Mondo Kim’s)가 가장 유명했으며 이 영화가 배경이 된 공간이다. 파트너 관계인 데이비드 레드먼과 애슐리 사번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한 다큐 ‘킴스 비디오’는 지금은 사라진 킴스 비디오와 이 가게를 만든 용만 킴(김용만)의 현재를 추적한다. 킴스 비디오는 어디로 갔는가. 그 많던 VHS와 DVD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엔가 소장돼 있는가. 아니면 다 소각되고 폐기됐는가. 양으로만 십 수만 장에 이른다. 그 많은 김씨네 비디오는 어디로 갔는가. ‘킴스 비디오’는 그 추적의 과정에 있어 모든 극영화의 장르적 기법을 동원하고 차용하고 훔쳐낸다. 이 다큐는 그래서 일종의 추적 스릴러이다. 중간중간 갱스터 무비의 분위기를 내기까지 한다. 서스펜스도 있다. 공포영화 같기도 하다. 레드먼&사빈 감독이 얼마나 영화광인지, 그들의 다큐가 얼마나 극영화의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둘은 자신의 다큐에 지금껏 나왔던 온갖 걸작급 명화(名畵)의 장면들을 영화 곳곳에 박아 놓는다. 그 레퍼런스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예컨대 영화의 시작은 빔 벤더스의 1984년작 ‘파리, 텍사스’이다. 데이비드 레드 먼이 어린 시절을 보여줌으로써 자신 스스로를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토브 후퍼의 1982년작 ‘폴터 가이스터’ 장면을 쓴다. 1977년에 나온 샘 워너메이커 감독의 ‘신밧드와 마법의 눈’같은 영화는 우리에게는 아니지만 미국의 영화광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고전이었을 것이다. 두 명의 감독은 이런 영화들을 즐비하게 언급해 가며 이 다큐가 자신들과 같은 영화광들에게 경배를 바치는 작품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아마도 이런 다큐의 경우는 원고와 텍스트를 미리 쓰거나 준비하고 뒤에 영상을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됐을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의외로 종종 꽤나 문어적(文語的)이며 고답적인데 역설적인 것은 사실 그런 방식이야말로 굉장히 재미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요즘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수 만장 적어도 그 일부인 5~6만 장의 비디오와 디비디의 행방을 이 다큐는 결국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소장품들 거의 전부가 엉뚱하고 기발하게도 이탈리아 시칠리 섬에 있는 살레미라는 지방 소도시의 성으로 옮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 그 추적과 추리의 얘기가 펼쳐진다. 현 이탈리아 문화부 차관(우리의 문화재청장) 비토리오 스가르비가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레드먼의 카메라는 이 부분에서 저널리스트의 끈질긴 투혼으로 전환된다. 스가르비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라는 희대의 이탈리아 총리의 정치적 계보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보이는 바, 베를루스코니가 집권과 실각을 오갈 때 잠시 살레미라는 지방 도시의 시장으로 재직했는데 끊임없이 중앙정치권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엉뚱하게도 킴스 비디오가 갖고 있던 장서급 분량의 비디오&디비디를 유치하게끔 하는 결과로 연결된 셈이다. 스가르비 차관 역시 베를루스코니나 다른 이탈리아 정치가 마냥 마피아와의 연결선도 있는 데다 장소가 시칠리였던 만큼 킴스 비디오를 ‘여기로 가져온 것’에는 어떤 흑막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데이비드와 애슐리의 카메라는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않거나, 아니면 그 얘기는 이번 다큐 이후의 다른 얘기로 남긴 것처럼 느껴진다. 근데 그 모호함마저 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킴스 비디오의 김용만 사장도 흥미로운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1979년 23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청과일 가게에서 일을 하며 뉴욕의 한 필름스쿨을 다니기도 했으며(그는 꽤나 수위가 높은 단편 ‘1/3’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세탁소를 사서 운영하다 가게 한 벽에 해적판 비디오를 팔기 시작한 것이 킴스 비디오의 시작이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레드먼 감독은 김용만 사장을 오손 웰즈의 걸작 ‘시민 케인’의 케인으로 비유한다. 김용만 사장은 2008년 모든 점포를 정리하고 사라졌으며 현재는 뉴저지에서 다른 사업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가 그로 하여금 다시 한번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다. 김용만 사장은 왜 자신이 5만 장이 넘는 작품들을 살레미로 넘겼는지 그 이유와 소회를 밝힌다. 이 다큐 ‘킴스 비디오’는 매우 충격적인 결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다큐가 주는 진정한 재미이자 한편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요소다. 킴스 비디오의 소장품 상당수는 뉴욕의 알라모 극장으로 돌아갔다. 이 과정을 보면서 다큐와 다큐를 만드는 영화감독이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가, 혹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다큐의 고전적 정신, 곧 ‘거리 두기’를 의도적으로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과 영화와 범죄에는 공통점이 있다. 예술엔 범죄가 가미된다. 짐 자무쉬는 말했다. “영감을 주는 모든 곳에서 도둑질을 하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고 또 무슨 의미일까. 반드시 영화를 보고 직접 확인할 일이다.
이 불우한 시기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1980년대 일본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모리타 요시미츠의 영화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과 같은 것이다.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 회고전은 지난 15일부터 열리고 있고 향후 24일까지 계속된다. 16일에 상영된 '하루'는 그의 1996년작으로 비교적 초중기작에 속하고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1998년에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영화로는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와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가 있다. 두 영화는 일본영화가 개방된 후 앞서거니 뒷서거니 들어 왔다. 국내 개봉 1호가 된 일본영화는 ‘하나비’였다. 모리타 요시미츠의 영화는 이상하게도 한국에서의 개봉이라는 ‘수혜’를 입지 못했는데 ‘하루’ 직후에 내놓은 ‘실락원’이 국내에서 개봉 불가 판정을 받은 것이 화근이 됐다. 표현 수위가 국민들이 보기에 적절치 않다는, 그야 말로 후진국적 ‘영화 심의’ 탓이었는데 당시 한국은 18세 이상 관람가의 일본영화는 2004년 이전까지 여전히 개봉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실락원’이 뭐 그리 대단한 수위의 작품도 아니었다. 흔한 정사 씬이나 베드 씬도 이렇다 하게 나오지 않는다. 다만 불륜 남녀의 러브 스토리이고 이 둘은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설국의 온천에서 동반자살한다는 내용이다. 근데 바로 이게 문제가 됐다. ‘실락원’은 초기에는 심의 탓에 나중에는 너무 늦은 영화인데다 흥행을 우려한 탓에 한국에서 2011년에나 첫 개봉됐다. 요시미츠의 또 다른 영화로 국내에 소개되지 못했던 영화 ‘하루’의 하루는 24시간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 이름 ‘하’야미 노보’루’(우치노 마사유키)의 첫 자와 끝 자를 따서 만든 PC통신 아이디이다. 일본어로는 ハル라고 쓴다. 이 ‘하루’는 PC통신으로 만난 ‘호시’라는 여자, 실제 이름은 후지마 미츠에(후카츠 에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둘은 오프 라인 상에서 딱 두 번 만난다. 한번은 스치듯이, 또 한번은 정면으로 겨우 만난다. 둘의 사랑은 철저하게 통신 상으로 이루어진다. 1996년에 공개된 이 영화는 사랑의 익명성이 지닌 놀라운 오묘함을 보여준다. 현대적 사랑은 어쩌면 半익명적일 때, 통신과 온 라인이 지금처럼 모든 걸 다 까발리기 전일 때, 그렇게 덜 진보적이고 미숙할 때 더욱 매력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랑은 모든 걸 다 보여주거나 모든 걸 다 줄 때가 아니라 반은 자기의 욕망으로 감추어 둘 때 진짜일 수 있고 더욱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증거한다. 그 뒤늦은 깨달음이 보석같은 작품이다. 사랑은 자기가 자기일 때, 적어도 반은 자기일 때 이루어지기가 더 쉽고 좋은 법이다. 일본영화는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보다 아름답고 진실되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영화와 문화로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게 옳은 길이다. 외교와 영토의 분쟁을 전략적으로 모호하게 놔 둘 수 있는 길은 문화적 접근이다. 영화로 서로를 호환하게 하는 길이 더 주단 길이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다. 군사적으로는 강박되고 문화로는 유리되고 있다. 양쪽 정치가 무식해서이다. 안타깝고 무서운 일이다.
강제규의 신작 ‘1947 보스톤’은 잘 숙성된 작품이다. 코로나 3년을 기다렸다. 영화는 보통 사과 같은 과일과 같아서 창고에 오래 두면 부패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1947 보스톤’은 먹기 좋을 만큼 잘 익은 영화가 됐다. 출하시기가 나쁘지 않았던 덕이다. 의외로 시대 상황과 잘 맞는다. 맞춤형 양복처럼 완성도도 좋다. 너무 요란하지도, 너무 투박하지도 않게끔 재단됐다. 테일러의 재봉질 솜씨가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단골손님들을 만족시킨다. ‘1947 보스톤’은 1947년 보스턴 국제 마라톤에 출전한 한국 선수 서윤복의 이야기이자 그를 훈련시킨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의 이야기이다. 손기정은 다 알다시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뛸 수 밖에 없었던 금메달리스트였다. 이때 남승룡은 동메달을 땄다. 손기정이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사건, 동아일보의 한 기자가 그렇게 ‘주도한’ 보도사진이 문제가 돼 이후 그는 영영 마라톤을 뛰지 못했다. 1936년은 중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고 일 제국주의의 군부는 눈이 미쳐서 돌아갔을 정도로 식민 통치를 강화했을 때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나라는 독립이 됐다. 손기정은 민족의 영웅이지만 여전히 마라톤을 뛰지 못한 한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 선생으로 살아가는 남승룡(배성우)의 제안으로 손기정(하정우)은 달리기에 천부적 소질을 선보이는 서윤복(임시완)을 키우게 된다. 셋의 목표는 그다음 해에 열리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무엇보다 참가 선수권 자격을 따야 한다.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비용의 참가비도 마련해야 한다. 마라톤 협회 같은 단체도 없었던 때이다. 모두들 못 먹고 못 살던, 빈궁한 시기였다. 훈련장, 훈련 시설은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저 고개 마루나 언덕을 다 헤진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게 고작이었던 때이다. 국제 마라톤 대회는 언감생심이었던 시대다. 저개발의 기억이 최고조였던 때이다. 1947년은 1948년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있기 전인 해이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남북한 모두 미국과 소련의 주둔군(군정)에 의해 ‘통치’되는 민족에 불과했다. 남쪽의 미 군정은 사령관 하지 중장이 통치했으며 남한은 아직 공식 국호가 공표되지 않아 여전히 조선이라 불렸다. 남한의 경우는 어쩌면 여전히 일본의 무단 통치가 연장되고 있었던 셈이다. 제주도에서는 4.3사건이 시작됐으며, 대구에서는 1946년 10월 1일에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나라가 말 그대로 흉흉하기 이를 데 없던 시기이다. 남한 지역은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 극심한 혼란을 겪던 때이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희망이 필요한 시기였다. 모두들 무엇인 가에 집중하고 매달려야 할 때였다. 현실의 시름을 잊을 수 있는 무엇인 가가 필요한 때였다. ‘1947 보스톤’은 영리하게도 불우하고 불행했던 시대의 이슈들을 영화 이야기의 외곽으로 빙 둘러 병풍을 치는 전략을 짠다. 스포츠 드라마가 갖는 ‘장르적 관습(상업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 구조)’을 앞으로 내세우며 시대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숨긴다. 사회 역사적 리얼리티는 아는 사람들만 알아듣거나 궁금한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가게끔 하게 만든다. 상업영화의 재미로 역사영화의 의미가 지닌 줄기를 더듬게 만든다. 강제규가 잘 하는 연출 수법의 장기이다. 그는 줄곧 전쟁 액션 영화의 방식으로 민족 분단의 이야기와 민족주의의 이슈를 건드려 왔으며(‘태극기 휘날리며’, ‘마이 웨이’) 가족영화의 틀로 분단의 아픔을 제기해 왔다.(‘민우씨 오는 날’, ‘장수상회’) 이번엔 스포츠로 민족과 민족주의의 얘기를 전개해 간다. 강제규의 민족주의는 일종의,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민족주의이다. 지나치게 인위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다. 박제화 돼 있지 않다. 그가 생각하는 민족주의는 살아 있는 것, 활기차고 재미있으며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 속에서 보이는 그의 미국관이 그렇다. 전후 세대인 그가 생각하기에, 미국에는 착한 미국인과 못된(차별주의자인) 미국인이 있다는 것이다. 극 중에서는 미 군정 사무국의 여성 스매들리(모건 브래들리)와 하지 중장(론 켈리)으로 대비된다. 스매들리는 차별적 시선 없이 마라토너 셋을 도우려 애쓴다. 하지 중장은 이들 셋에게 선수권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대한문(덕수궁) 앞에 보스톤 마라톤 출정식 겸 기념행사에 모였던 군중들은 그런 (미 군정 사령관의) 태도에 분노한다. 극 중에서 서윤복은 마라토너가 되기 전 온갖 허드렛일을 해 가며 살아간다. 그는 달리기를 잘하는 만큼 배달 일에 능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배달하는 음식점의 국수 한 그릇 제대로 사 먹을 돈이 없다. 그에게는 간질환에 걸려 죽어가는 어머니가 있다. 어린 서윤복의 삶은 궁핍하고 비참하다. 그는 종로 거리에서 음식 배달을 하다 부딪힌 미군과 시비가 붙는다. 그는 미군을 상대로 주먹을 날리며 저항을 한다. 그가 미군 얼굴을 한대 치고받을 때 이상한 쾌감이 느껴진다. 소극적인 에피소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들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했는지는 판단하기가 애매하다. 아마도 현대역사를 다룬 많은 영화들의 상당수가 그렇듯이 사실적 자료에 근거를 두긴 했어도 ‘윤색의 윤리학’을 지키는 선에서 살짝 만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건 감독의 시선이 담겨 있다는 얘기이다. 감독이 굳이 캐릭터의 대비(스매들리 여사와 하지 중장)를 만들거나 주먹싸움의 에피소드를 만든 건, 미국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우회적으로나마 담고 싶었던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1947 보스톤’이 적기에 출하된 과수원의 사과마냥 시대적 공기에 부합돼 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온다. 현재는 한미일 공조다 뭐다 해서 국가 정체성의 균형 추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다. 사람들은 ‘1947 보스톤’같은 역사 스포츠 영화에서 미국에 대한 정치적 시선까지 읽어 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손기정 등은 나라가 독립을 했으면 마라톤의 기록도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태극기 마크를 가슴에 달 수가 없다. 그들이 보기에 한국=조선은 여전히 독립되지 않았다. 셋은 가슴에 태극기 마크를 달기 위해 이국 만 리 먼 땅 보스톤에 절박한 호소를 쏟아 낸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고 자신들의 나라가 진정으로 독립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영화는 묘하게도 주인공 셋의 그 같은 간절한 소망이 지금 2023년에도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우리는 진정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일본으로부터 과연 진정으로 해방됐으며 미 군정의 종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가. ‘1947 보스톤’은 기묘한 방식으로, 그리고 돌고 돌아 우회적으로 바로 그 같은 정치적 질문을 쏟아 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 보스톤’은 영화 곳곳에 재미의 긴장을 마치 사슬의 이음처럼 단단하게 연결해 나가는 작품이다. 중간중간 이런 류의 영화가 갖는 특유의 장면들 마냥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의 민망하고 인공적인 에피소드도 있다. 대체로 그런 부분은 극 전체의 리듬감으로 드라마적 재미를 복원해 나간다. 그 톤 앤 매너가 좋다. 극 후반 30분 가까이 이어지는 보스턴 마라톤 장면은 한마디로 휘몰아친다. 무엇보다 매우 정직하면서도 정통의 기법으로 찍혀졌다. 배우 임시완과 배성우에게 주어진 주문도 서윤복처럼, 남승룡처럼 ‘그냥’ 달리라는 것이었던 셈이다. 후반의 마라톤 시퀀스는 마치 42.195㎞의 마라톤 실제 경기를 축약해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보는 관객들도 마치 자신들이 뛰고 있는 것 마냥 흥미롭다.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 장면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사명’에 충실한 영화이다. 마라톤 장면만으로도 충분한 볼 거리를 제공한다. 보스턴 마라톤이지만 호주에서 찍었다. 구간구간 보이는 1947년의 보스턴 거리 풍경은 죄 CG이다. 그 기술력과 디테일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프로덕션의 세 공력, 곧 미술과 소품, 의상 분장의 역할이 뛰어났다는 것, 그 전체를 디자인한 연출의 섬세함이 남달랐음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로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사소한 영화가 있고 사소하지 않은, 그래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비중이 높은 영화가 있을 뿐이다. 좋은 영화지만 사소할 수 있다. ‘1947 보스톤’은 좋은 영화이면서 동시에 사소하지 않은 영화이다. 역사적 진심이 담겨져 있는 영화이다. 누선(淚腺)을 자극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잘 우는 여배우는 안도 사쿠라이다. 그녀는 감정만 살짝 잡아도 눈물을 줄줄 흘리는 놀라운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영화 ‘한 남자’에서도 첫 장면부터 안도 사쿠라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영화 ‘한 남자’는 그렇게 시작한다. 일본의 미야자키(큐슈 내의 지역으로 일본 본토인 혼슈에서 꽤 떨어진 곳이다. 오키나와 다음으로 일본 최남단 지역으로 꼽힌다)에서 세이 분도(誠文堂) 문구점이라는 조그만 가게를 하며 살아가는 타케모토 리에(안도 사쿠라)는 비가 오는 날 가게에서 눈물을 흘리며 홀로 울고 있다가 한 남자 손님을 맞는다. 나중에 타니구치 다이스케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이 남자(쿠보다 미사타카)는 훗날 리에의 일생을 송두리째 흔들게 된다. 리에는 유토란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싱글맘이다. 유토 밑으로 료란 이름의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나 2살 때 뇌종양으로 죽었다. 둘째가 죽는 과정에서 남편과 이혼했다. 그녀는 죽은 아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허전하다. 그래서 종종 혼자 운다. 슬픔에 젖어 사는 리에의 빈 공간을 약간은 과거가 수상해 보이는 남자 다이스케가 스며 들어온다. 그는 주변 벌목 회사에 일하는 노동자이다. 벌목꾼이다. 리에는 다이스케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먼저 키스한다. 그녀는, 여자의 놀라운 직감으로, 남자가 자신처럼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간파한다. 리에는 다이스케를 안는다. 둘에겐 곧 하나라는 귀여운 딸아이가 생긴다. 다이스케는 의붓아들 유토에게도 지극정성이다. 그렇게 둘은 3년 4개월 동안 그 누구라도 부러워할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문제는 다이스케가 작업을 하다가 사고사를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상냥하고 사랑스러웠던 남편이 죽고 나자, 남편이 남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에 있다. 남편은 타니구치 다이스케가 아니었다. 다이스케는 딴 남자이다. 그는 미야자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군마 현(일본의 수도권 지역이다. 도쿄 위에 있다)의 아키호 온천家에서 살았다는, 사라진 둘째 아들이다. 리에가 오손도손 살았던 다이스케는 전혀 다른 얼굴의 남자다. 이건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리에에겐 다이스케의 생명보험 문제도 있다. 이카호 온천의 유산 문제도 있다. 리에는 남편 다이스케, 아니 이제는 누군지 모르는 남자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그녀는 첫 남편과의 이혼 때 자신을 도와줬던 인권 변호사 키도 아키라(츠마부키 사토시)를 찾는다. 아키라 변호사는 다이스케란 남자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엄청난 비밀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 엄청난 비밀이 대단한 음모나 공포, 미스터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삶의 진실에 가깝게 된다. 아키라 변호사는 다이스케를 찾아가면서 엉뚱하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아키라는 다이스케처럼 자신조차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음을 알게 된다. 그는 자이니치(在日. 일본 내 한국인 혹은 그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로 대체로 귀화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이다. 그의 장인은 그에게 종종 얘기한다. “자네는 다른 자이니치와 달라. 이 나라는 돈을 잘못 쓰는 게 문제야. 생활 보장 제도가 뭐냔 말이야?!” 늘 그런 식이다. 아키라는 그런 차별 아닌 차별에 묵묵부답 살아왔다. 일본 사회 곳곳에서도 혐오 시위가 한창이다. 그는 변호사로 일본 사회 한 켠에 편입하는데 성공했지만 왠지 아내조차 그런 그를 완전하게 신뢰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는 그에게 미야자키로의 출장이 진짜 일 때문이었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의부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남편의 여자관계를 의심하는 건지 아니면 민족성을 의심하는 건지 살짝 분간이 되지 않는다. 아내는 남편에게 줄곧 우월감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이니치는 결국 어쩔 수 없어,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야’, 하는 뒤틀린 심사 같은 것이다. 영화 ‘한 남자’는 중첩의 드라마이다. 영화는 곳곳에서 인물을 겹치게 하고 그 내면을 교차시키며 결국 의미를 포개어 나간다. 영화는 한 남자를 찾는 데서 시작해 일본 사회 차별 문제의 대표격인 자이니치 이슈로 나아간다. 그러나 결국 이 영화는 일본인들도 스스로들이 현재 혼미한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일본인 모두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은 지 오래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다 큰 주제로 밀고 나간다. 영화는 작은 우주에서 큰 우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구성될 때 이야기의 긴장감이 높아진다. 잘 짜인 이야기로 느껴진다. 작은 강물이 큰 바다를 만드는 법이다. 이 영화도 한 남자가 아니라 모든 남자=사람의 이야기로 흘러가며 결국 일본인 전체에 대한 얘기로 퍼져 나간다. 그 스토리의 점층(漸層)화, 세공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이 영화가 오프닝 장면으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금지된 재현’을 쓰는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이시카와 케이 감독은 영화 처음부터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간다. 인간은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가 없다. 거울 속에 비친 나(한 남자)의 뒷모습은 나의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인생은 예측 불가능한 일 투성이이며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간파할 수 없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진실은 그 일부일 뿐이다. 인간의 사회적 삶이란 그래서 늘 절대적이지 못하다. 상대적이다. 너는 너를 아는가. 나는 나를 아는가. 영화 속 착한 시골 여자 리에는 도시의 자이니치 출신 인권 변호사 아키라에게 묻는다. 저는 그동안 누구의 인생과 함께 살았다는 건가요. 아키라는 정보를 취득할 요량으로 오사카 감방에서 형을 살고 있는 호적 교환 브로커 오미우라 노리오(에모토 아키라)를 만나서도 비슷한 얘기를 듣는다. 오미우라 노리오는 변호사 키도 아키라를 유리 차단벽 너머로 두고 이렇게 이죽거린다. 그는 첫눈에 아키라가 자이니치임을 알아본다. 아키라는 귀화했다고 말한다. “흥! 자이니치답지 않은 자이니치군. 그건 당신이 바로 자이니치라는 얘기요.” 너는 너 자신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인 셈이다. 아키라가 이 범죄자 노인을 만나러 가는 감방의 복도는 긴 터널처럼 되어 있다. 아키라는 처음에 그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두 번 째 만남에서는 그 터널을 안에서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으로 설정된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극장을 통해 영화가 주는 진실의 안으로 들어가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진실을 깨닫고 극장 밖으로 나온다. 일종의 금기의 재현이다. 르네 마그리트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남자, 어떤 사람들과 살고 있는 것인가.
예상 밖 흥행 안타를 치며 여름 영화시장을 간신히 연장전으로 끌고 가고 있는 ‘달짝지근해: 7510’의 콘셉트는 의도된 시대착오성이다. 일단 7510이란 것도 주인공 남녀 이름의 발음에서 따왔다는데 이것조차 일부러 시대착오적인 척 구는 것이다. 주인공 캐릭터는 더할 나위가 없다. 차치호(유해진)는 방안에 수십 개의 자명종을 놓고 살아가는데 1시간 단위로 일정을 기억하고 소화하는 성격이어서 시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도 전자시계 카시오이다. 몰고 다니는 차 역시 단종됐어도 한참 전에 없어진 모 회사 브랜드 프라이드이다. 차치호는 과자 회사에서 과자 맛을 내는 연구원이며 집에서는 히키코모리, 회사에서는 ‘왕따’인 인생으로 살아간다. 차치호와 관련된 모든 것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대략 설명되며 영화는 보통 초반에 이야기에 나올 캐릭터를 설명하면서 작품이 나아갈 방향을 관객들에게 사전에 브리핑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 만들기의 제1 법칙이기도 하다. 이 영화 ‘달짝지근해: 7510’은 초반부만 보면 영화가 1970, 80년대 배경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공간도 약간은 ‘달동네스러운’ 곳이되 운치가 있으며 다소 서민적이지만 그렇다고 궁색하지는 않은, 그래서 예스럽지만 지금도 볼 수 있는 동네 같은 곳으로 설정하고 들어간다. 혜화동 위쪽 낙산 주변의 산동네로 보이는 영화 속 두 남녀의 공간은(둘이서 카풀 아닌 ‘밥풀’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사는 곳이 같은 동네라는 얘기다.) ‘올드&뉴’스럽고 풍족함과 결핍의 중간쯤이며, 행복과 외로움의 그 어디쯤으로 설명된다. 그렇게 공간을 슬쩍 뭉개 놓음으로써 감독과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자신들(감독 이한, 시나리오 작가 이병헌)의 이야기가 꽤나 (순정) 만화적이며 판타스틱하다는 암시 아닌 암시를 깔아 놓는다. 그러니 심각한 표정을 짓고 볼 필요는 없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결코 사회적 논쟁을 요구하는 작품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논쟁을 좀 피해 가자, 그럼으로써 사회적 피로도를 좀 가라앉혀 보자는 식의 주장을 우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종종 가치 지향성 보다 유용성으로 판단되기도 하는데 엄밀하게 적용하면 ‘달짝지근해 7510’은 뛰어나거나 문제적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논할 작품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시기에 이 영화가 왜 필요한 가, 그 쓰임새의 정도가 높으냐 낮으냐를 두고 판단할 영화인 셈이다. 대체로 앞에 부분은 평론이, 뒤에 부분은 대중들이 결정한다. 이 영화가, 이런 시기(한국 영화가 죄 실패하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에 100만 이상의 호조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일단 대중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크고 또 그건 그만큼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복잡하게 얘기할 것 없다. 영화는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재미’는’ 있다. 세대에 따라서 꽤나 킬킬대며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킬킬댐’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여자관계에 어설픈 차치호는 처음 만난 유부녀 아닌 유부녀, 나이 든 싱글맘(딸이 고등학교 사격 선수다.)인 일영(김희선)에게 이런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며 둘이 좋다고 웃어 댄다. 그것도 김밥 집에서. “김밥이 착한 일을 하며 가는 곳은 어디게요?” 나중에는 그 반대되는 질문도 한다. “김밥이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어떻게 되게요?” 힌트를 주겠다는 요량으로 차치호는 참기름을 사 와서 테이블에 놓기도 한다. 위의 에피소드는 이 영화가 꽤나 의도적으로 올드 패셔너블한 정서를 자극하고 있으며 그 브릿지, 다리를 통해 컨템퍼러리(comtemporary : 동시대적인) 한 정서를 사냥하고 싶어 한다는 의도를 드러 낸다. 이는 곧잘 만 하면 전 세대를 통틀어 관객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 것인 바, 그러기 위해 감독 이한은 더욱더 키치(kitch)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품위 따위는 벗어던지고 보다 장난스럽고 잔재미 위주로 가야 한다며 작품을 밀어붙였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배치된 것이 서브플롯의 캐릭터들, 조단역의 배우들이다. 동생을 뜯어 먹으며 살아가는 차치호의 형(차인표)이나 일영의 남자이자 딸아이 진주(정다은)의 아빠로 올림픽 기간마다 나타난다는 뱀 장사 남자(정우성)가 양대 산맥이다. 차치호의 회사 상사이자 인사부장 정도로 보이는 남자(진선규)를 비롯해 연구원 선배(이준혁), 영화 내내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과자회사 사장(김기천)도 뛰어난 감초들이다. 약국집 약사(염혜란)는 웃기고, 이웃집 ‘썸남’(임시완)과 ‘썸녀’(고아성)은 ‘차라리’ 웃긴다. 이들 모두는 차치호와 일영의 앞뒤를 ‘달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영화적 재미를 백업하려 애쓴다. ‘달짝지근해: 7510’의 진정한 페이스메이커들이다. 이 영화가 재미있어진 것은 순전히 이들 조단역의 역할이 컸다. 영화의 성공에는 물론 유해진의 바보스러운 연기와 김희선의 해맑은 표정이 주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상당히 ‘모험적’ 선택이었는 바, 영화를 본 100만 관객 이외의, 현재의 다른 잠재 관객들 중 상당 수로부터는 이 둘의 캐스팅이 정말 올바르냐고 묻는 질문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유해진과 김희선의 키스신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한 마디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생각에는 상당히 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하는 것인 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이 부분은 영화를 보면 금방 해소될 안건이긴 하지만 극장에 가기까지 꽤나 높은 ‘허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병헌-이한組는 젊은 감독답게 그야말로 ‘파격적인 파격’을 가져오겠다고 생각했고 그 실체가 두 남녀 배우가 갖는 이상(異常)스러운 이상(理想) 적 조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 결단은 옳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배우의 캐스팅은 결과적으로, 배우 유해진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가 빼어나게 잘 생긴 외모는 아니라는 점에서) 新 미녀와 야수 버전, 중년의 유부녀 미녀와 동정남 야수의 버전, 그리하여 아주 극한으로 밀어붙인 평범한 미녀와 야수의 버전 드라마로 만들어지게 했다. 그 실천적 평범함, 평범의 이데올로기가 나쁘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며 궁극으로는 이 영화가 꽤나 진지한 선(先)의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공유하게 한다.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갖는 최고의 미덕이다. 재미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음 얘기가 된다. 캐릭터 배치와 공간 컨셉의 설정에서 다소 억지도 있다. 이건 무리다 싶은 부분도 적지 않다. 일영이 일하는 직장은 무슨 캐피털 회사 같은 제2금융권으로 하루 일과가 추심 업무다. 일영은 직장 상사(윤병희)로부터 성희롱을 당하기까지 하는데도 회사의 분위기가 시종일관 밝다. 빚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회사, 그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차치호의 캐릭터도 너무 바보스러운 ‘영구’처럼 일관한다. 유해진의 연기가 다소 과장스럽게 보이는 이유이다. 톤 앤 매너의 조절이 필요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를 지지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당신 미쳤어?라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자신도 공감한다고 할 것이다. 앞뒤 사람들은 영화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어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앞의 사람들은 영화를 논할 때 ‘무엇을 위하느냐’에 비중을 두고 뒤의 사람들은 ‘지금 필요한 것’에 무게를 준다. 현재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극도로 피로한 시기이다. 어쩌면 지금은 영화가 위로와 휴식을 주는 무엇이 되는 때 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휴식 용이다. 그렇다면 ‘달짝지근해: 7510’이 그렇게 섬세하게 전략을 짰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코끼리가 뒷걸음질 친 면이 없지 않다. 뭐 어떻든 좋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 이상주의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일본 영화계의 이단아 급 감독인 미이케 다카시의 ‘무한의 주인 : 불멸의 검’은 사무라이 검객 영화이다. 한때 최고의 배우였던 기무라 다쿠야가 주연이다. 칸영화제가 공식 초청한 작품이었다. 칸 영화라고 해서 다 좋은 작품이거나 예술적인 무엇이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칸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상한 착시이다. 칸도 수백 편의 영화를 담아내야 할 컨텐츠 용기(容器)에 불과할 때가 있다. 게다가 감독 이름값이 높으면 무조건 선점부터 하려고 하는 나쁜 습성도 있다. 영화를 보지도 않고 무조건 낙점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 대체로 B급 영화들까지 칸에 가게 된다. 그리고 칸에 간 작품들은 언제부턴가 거의 전부가 부산국제영화제에 걸린다. 그때도 똑같은 논법이 적용된다. 부산에서 유명 감독의 영화가 상영됐다 해서 다 좋은 작품만이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이 영화가 칸과 부산을 거쳤으면서도 국내에는 수입되지 않았던 이유이다. 국내 미개봉작이었던 탓에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오면서 신작 느낌을 준다. ‘무한의 주인 : 불멸의 검’은 2017년 작이다. 주인공 만지(기무라 다쿠야)는 죽지 않는 불사신의 몸을 지녔다. 800년을 넘게 살아온 마녀 할멈이 그의 몸 안에 혈선충이라는 벌레를 넣어 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 현상금 사냥꾼 100명과 싸워 그들을 싸그리 처치해 버리지만 그도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이었다. 팔도 잘린 상태였다. 혈선충은 잘린 팔도 붙게 만든다. 검에 베인 상처 모두는 거의 곧바로 봉합되고 치유되지만 상처는 마치 꿰맨 것 마냥 깊게 남는다. 얼굴에 가로로 깊은 상처가 나 있고 눈도 한쪽은 잃은 상태이다. 어쨌든 이 ‘1 대 100’ 사건 이후 50년이 지났고 그 싸움은 전설이 됐다. 그는 검객들 사이에서 ‘백인 살인귀’라고 불린다. 당시 일본은 막부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들의 하급 무사 격인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일도류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난다. 주인공 만지는 어느 날 이 일도류의 당주 아노츠 카게히사(후쿠시 소타)에 의해 부모를 잃은 소녀 린(스기사키 하나)의 호위무사가 되기로 한다. 린을 위한 만지의 대리 복수극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만지가 이러는 이유는 린이 과거 자신의 어린 동생 마치를 닮았기 때문이다. 미이케 다카시 표 작품인 만큼 영화는 상당히 고어(gore)하다. 숭덩숭덩 팔과 몸이 잘려 나가고 피가 철철 흘러넘칠 만큼 낭자하다. 영화 속 악당이자 모사꾼인하바키(다나카 민)는 나중에 몸이 두 동강 나 하반신이 날아갔음에도 칼을 쥐겠다며 땅바닥을 기어다닌다. 다카시의 스크린은 이렇게 늘 잔인한데 이상할 이만큼 쾌감이 높다. 현실적 비현실성이 극대화된다. 그러니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정신을 차려보면 그냥 영화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 일이라는 안도감을 준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엔 마니아 급 관객들이 많이 붙어 있다. 이 영화 ‘오타쿠’들은 한편으로 보면 미이케 다카시로서는 일종의 혈선충인 셈이다. 이미 사그라질 만큼 사그라진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 투혼을 살려 내는 존재들이다. 영화 속 인물 만지가 불사신의 육신이 길어질수록 검술은 약화되듯 미이케 다카시 역시 매니아들이 계속 존재하면 존재할수록 작품 수준은 점점 빛을 잃어 간다. 기이한 싱크로율이다. 다카시 감독은 2년에 12편의 영화를 찍을 만큼 다작의, 광기 어린 감독이다. 1960년 생으로 아직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1991년 데뷔 이후 30여 년간 현재까지 100편이 넘는 영화를 양산했다. 1999년에 내놓은 ‘오디션’이나 2004년 작인 ‘착신아리’, 2006년의 ‘임프린트’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수많은 ‘쓰레기’들도 만들었지만 2012년에 만든 ‘할복 : 사무라이의 죽음’같은 영화는 다카시의 예술혼이 꽤나 본능적인 역사 감각을 지녔음을 보여 준 작품이었다. 일본은 사무라이와 주군, 주변 권력과 지배 권력, 지방과 중앙의 끊임없는 싸움, 투쟁으로 점철된 사회이다. 그리고 그 정신과 정서가 지배하는 사회이며 이른바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비뚤어진 계급 상승 욕망이 마치 가장 고귀한 것인 양 포장된 적도 있는데 그 궁극의 모습이 바로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급격한 중앙집권 국가로 변신한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일본 천황의 강력한 직접 지배 시기가 열린 셈이다. 그전까지는 막부, 다이묘(영주)라 불리는 지방 토호들이 전국을 분할 점령했다. 사무라이란 이 다이묘의 지배 시스템인 막부 내 가신들을 호위하는 무사들이다. 사무라이에게는 그 충성의 순서가 자신이 모시는 가신, 주군이 가장 먼저이다. 메이지 유신은 이들 막부 그룹을 극도로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체시키는 과정이었으며 당연히 맨 앞 총알받이로 처리된 이들이 바로 사무라이들이다. 그 잔인한 시기를 그려 낸 영화로 국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모은 작품이 바로 사토 타케루 주연의 ‘바람의 검심’이다. ‘무한의 주인 : 불멸의 검’의 주인공 만지도 사무라이다. 그가 외톨이가 된 것은 자신의 주군을 죽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주군을 배신한 자여서 할복을 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어린 여동생을 살리고자 억지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도 사무라이의 정체성이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이고 시대 배경은 메이지 유신이 점차로 가까워지던 때임을 짐작케 하는데 막부 연합(일종의 군벌 연합)이 린과 만지의 원수인 일도류 당수에게 종합 검술 학교의 설립을 제안하며 세력을 키워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막부가 관군(천황 쪽)과의 대결 구도를 염두에 두는 시기인 것처럼 보인다. 미이케 다카시는 역시 다카시인 양 이쪽도 저쪽도 아닌, 실존적 판단에 따라 자신이 검을 겨눠야 할 상대를 정하는 만지처럼(만지는 린에게 “누굴 죽여줄까”라고 묻고 린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지금 나를 해치려고 하는 사람이요”라고 말하는데 그때 그 상대는 당장의 원수를 죽이려 하는 다른 사무라이들이다. 그러니까 원수는 때론 원수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복합적인 정치관을 보여 준다. 다카시는 만지와 같은 비주류의 삶이 일본 사회를 이어가는 원동력의 실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원한 사무라이 정신이란 오히려 잘못된 주군을 베어버리고 불쌍한 어린 소녀를 지켜 주는 감상 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만지에게 혈선충을 주입한 요괴 할멈은 온갖 상처를 입고 끙끙대며 싸우는 만지를, 혀를 차며 바라본다. “영생의 삶을 그렇게 저주하며 죽고 싶어 하면서도 살려고 애쓴다”고 동정 어린 핀잔을 한다. 그 여린 마음 때문에 너는 계속 살아가는 셈이라고 말한다. 일본 사회가 아무리 군국주의의 후신들, 센 척하는 사무라이 정신 운운하지만 사실 저 사회의 저류에는 지독한 인간주의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일본의 진짜 얼굴은 거기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영화 ‘무한의 주인 : 불멸의 검’은 언뜻 일본에도 만지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래저래 일본 영화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 지금이 바로 그럴 때이다.
지난 5월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초청됐던 유재연 감독의 빛나는 데뷔작 ‘잠’은 여러모로 산뜻한 느낌을 주는 영화이다. 무엇보다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80만 명, 곧 제작비가 48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름 영화 시장에서 최대 650만 명을 모아야 ‘본전’을 맞추는 큰 영화들에 비하면 일단 마음을 편하게 한다. 게다가 영화의 완성도, 작품성까지 좋다. 이래저래 주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가뜩이나 한국 영화에 대한 위기설, 중병설이 크고 넓게 퍼져 있는 상황이다. 너무 돈을 많이 들이는 것에 비해 관객들이 적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가 지닌 본래적 기능들, 세상에 대한 독특한 해석,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무엇의 가치를 구현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잠’은 신선한 데뷔작이자 의외의 구원자 같은 느낌마저 준다. 한국 영화가 현재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침 같은 것을 준다. 영화는 역시 돈과 물질이 아니라 정신과 아이디어, 의지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잠’은 일종의 혼합 장르, 융합의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은 심리 스릴러이다. 중간쯤에는 전형적인 공포영화였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오컬트 영화(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 현상을 다루는 영화. 심령/무당/종교/빙의 영화)가 된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가족 드라마가 된다. 그 인간주의의 결론이 마음을 훈훈하게 만든다. 결국 이것저것의 기법을 뒤섞은 하이브리드(異種) 공포영화라는 얘기인데 그래서 이상하기보다는 오히려 재미가 더해진 작품이다. 기이하게 잘 비벼졌다는 느낌을 준다. 이게 뒷걸음질 치다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매 순간마다 연출과 기획이 그렇게 디자인을 한 것인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하겠으나 전체적으로 설득력이 주어진다면야 굳이 그렇게 뾰족하게 굴 필요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영화의 결론이, 주인공의 ‘인간적 선택’이 모든 것을 ‘용서하게’ 해 준다. 주인공 수진(정유미)은 막 출산을 앞둔 예비엄마이다. 대기업 유통 업체를 다닌다. 그녀의 남편 현수(이선균)는 연극배우이자 단역 배우이다. TV 드라마에서 아주 작은 역을 한다. 당연히 둘의 생계는 그리 풍족하지 않다. 하지만 수진은 둘이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좌우명, 가훈 아닌 가훈을 집안에 걸고 산다. 이제 곧 셋이 될 판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극복하지 못할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가난하지만 착한 남편이 밤마다, 그것도 자면서,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침대 끝에 우두커니 앉아서 눈은 반쯤 뜬 채 이렇게 중얼거린다. “누가 들어 왔어” 다음 날은 자신의 뺨을 피가 나도록 긁어서 큰 상처를 입는다. 어떤 날은 냉장고를 활짝 열어 둔 채 생고기를 우걱우걱 먹어 대지를 않나 급기야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 하지를 않나 점점 더 기절초풍할 일들을 벌인다. 현수는 곧 병원에서 진단을 받게 되는데 증상에 비해 극히 일반적인 몽유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현수에게는 잠이 문제다. 수면장애는 고치면 된다. 최소한 약을 먹으면 이런저런 이상행동은 완화가 된다. 적어도 누구를 해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수진은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애지중지 키우던 강아지 후추가 ‘참변’을 당한다. 수진은 태어날 아이 때문에 긴장한 상태이다. 결국 그녀는 출산을 한 이후부터는 자신 역시 일정한 노이로제 증상을 겪는다. 엄마란 존재는 아이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대상은 그 누구라도 적으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수진에게 현수가 점점 그런 존재가 되어 간다. 그녀의 눈에는 핏발이 선다. 이제 이 집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그 가공할 공포는 현수의 병에서 시작해 현수와 수진의 부부관계가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가장 신뢰하고 끝까지 함께 해야 할 관계, 곧 부부 사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며 균열을 전제로 한 계약 관계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관객들은 마음속에서 자신이 수진을 향해 외치는 마음속의 소리를 듣게 된다. ‘어서 집에서 애를 데리고 나와! 그에게서 떨어져!’ 근데 잠깐만! 이 모든 것이 다 수진의 환상이거나 수진이 교묘하게 남편 현수를 가스 라이팅 해 벌이는 음모이자 수작이라면? 그렇게 되면 얘기는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튀게 될 것이다. 영화 ‘잠’의 매력은 극을 따라가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스토리 라인으로 이런저런 상상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저거 여자가 다 꾸미는 거 아냐? 남자가 사실은 몽유병인 척, 여자를 죽이려고 저러는 거 아냐 등등. ‘잠’은 점점 흥미로운 이야기의 골짜기로 관객들을 몰아가기 시작한다. 그 점층과 점강의, 리드미컬한 전체 스토리 구조가 매혹적이다. 스포일러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팁을 노출시키자면 바로 저 대사, 그러니까 현수의 저 말, “누가 들어 왔어”에 많은 단서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짝, 그렇다면 저 ‘누가’는 과연 누구인가,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가 아니다. ‘어디에’이다. 무엇이든 누구이든, 어디에 들어왔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영화는 그 대목이 드러나면서부터 롤러코스터를 탄다. 어쩌면 사람이나 사회나 뭔가의 생각과 이즘(ism), 이슈와 어젠다, 이상한 사람(정치나 종교 지도자)이 잘못 들어 오(유입 되)면 일대 혼란을 겪게 된다. 일상이 악몽이 된다. 대부분의 공포영화가 그렇듯이 영화 ‘잠’ 역시 개인의 이상 행동을 통해 사회와 체제의 광기로 이어 가려 한다. 내 마음속의 공포는 어쩌면 사회와 구조에서 기인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내 안의 공포는 우리의 공포이다. 가장 익숙한 것, 낯익은 공간은 언제든지 적과 악마의 소굴로 바뀔 수가 있다. 공포는 늘 일상적인 것이라는 이 놀라운 자각은 모든 것에 대한 불신의 지옥으로 사람을 추락시킨다. 그렇다면 이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일밖에 남지 않은 셈이 된다. 불신지옥은 맹신 지옥을 부른다. 또 다른 잘못된 믿음을 불러온다. 이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알고 보면, 그리고 사실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랑이다. 모든 건 사랑 때문에 시작됐다. 영화에서 나오는 무당은 수진에게 쩔렁쩔렁 방울을 흔들며 이렇게 말한다. “두 남자와 같이 사는군.” 수진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냐는 표정을 짓지만 불길한 표정을 감추지는 못한다. 두 남자는 누구인가. 현수 말고 또 집안에 누가 있는가. 누가 그녀를 또 사랑한다는 말인가. 사랑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한 육욕인 것인가. 수진은 점점 미쳐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모든 공은 현수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다. 다소 뜬금없게도 ‘잠’은 2009년에 발표됐던 영화 ‘불신지옥’을 떠오르게 한다. 다른 듯 다르지 않고 같은 듯 전혀 다르다. ‘불신지옥’은 더 참혹했지만 이번 ‘잠’은 어렵사리 그 잔혹의 정서를 뛰어넘는다. ’불신지옥’의 이용주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명작 ‘살인의 추억’의 연출부 출신이다. 이번 ‘잠’의 유재선 감독은 봉준호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봉준호의 그림자가 10년 넘게 한국 영화계의 뒷배로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우리 사회에 누군 가가 들어왔다. 그 누군가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갓 태어난 아기가 있는 신혼집을 지켜야 한다. 젊은 사람들, 아기들을 지켜야 한다. 영화 ‘잠’은 현재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기이한 불안증과 그로 인한 공포를 다룬다. 특수가 보편을 규정한다. 특별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세계 어디서든, 또 누구이든 똑같이 겪는 불안함이다. 이 영화가 칸 비평가 주간을 비롯해 스페인 시체스 영화제 등 해외에서 주목을 받았던 이유이다.
김성훈 김독, 하정우·주지훈 주연의 영화 ‘비공식 작전’은 흥행 면에서는 치고 나가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첫 주 100만 안팎) 예상외로 활기찬 작품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이유는 1) 대체로 텍스트가 이해하기 쉽고 2) 1980년대 후반의 시대 묘사가 섬세하다는 점 3) 레바논 내전 당시 벌어졌던 실제 사건(도재승 서기관 납치 사건)을 드라마틱 하게 구성했다는 점 등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객들이 내심 이 영화에 크게 동화되고 있는 건, 1980년대 전두환 – 노태우 독재 시대 때 벌어졌던 국가적 사건과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 방식 등등이 2023년 현재의 정부 모습보다 훨씬 더, 백배 더 낫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 기이한 역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만약 지금 누군가, 재외국민이든 국내 해외여행객이든 납치나 재난을 당했을 때 현재의 국가나, 공무원 중 누군 가가, 영화처럼 구하러 나설 것인가. 과연 그럴 것인가. 영화는 종종 과거 일을 통해 현실을 일깨우게 한다. 기이한 깨달음을 준다. ‘비공식 작전’이란 영화 한 편이 지금 세상을, 전두환 시대 때보다 못한 현실로 깨닫게 할 줄은 이 작품의 감독이나 배우도, 이 영화를 만들게 한 많은 투자자, 그리고 제작자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86년 레바논 주재 서기관인 오재석(임형국)이 납치된다. 이유는 일본인인 줄 알고 몸값을 벌 요량으로 무장 분파 중 하나가 납치했으나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데다 내전이 복잡해지면서 1년 8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게 된 것. 한국 정부는 손을 놓은 지 오래지만 어느 날 이민준 사무관(하정우)이 오재석이 보낸 모스부호를 받게 된 후 직접 인질 석방에 나서게 된다. 몸값은 250만 달러. 문제는 이 몸값을 여기저기서 다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민준은 돈도 지키고 서기관도 구출해 내야 한다. 그러던 중 레바논에서 개인택시 영업을 하고 살아 가는 사기꾼 김판수(주지훈)가 이 위험한 사건에 우연찮게 개입하게 되면서 일은 더욱 꼬이게 된다. 이민준은 이제 김판수로부터도 돈을 지켜야 한다. 둘은 결국 힘을 합쳐 이 역사적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요약된 줄거리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단순화이다. 복잡할 만한 내용은 다 버렸다. 그것도 매우 과감한 수준으로. 예컨대 레바논 내전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그런 건 불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레바논 내전을 거의 단순하게 조직폭력배들의 싸움 정도로 격하시켰다. 그것도 좋은 편과 나쁜 편으로 단순 도식화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 단순 무식한 접근 이야말로 대중 관객이 이 영화를 보다 편안하게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요소로 작동한다. 아이러니한 효과를 가져온 셈이다. 레바논 내전은 1975년~1986년 집중적으로 진행됐으며 이 과정에서 중동의 파리로 불렸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철저하게 파괴된다. 베이루트를 장악함으로써 레바논의 지휘권을 차지하려 한 이스라엘과 시리아, 레바논 정부를 대표했던 기독교 민병대의 팔랑 헤 당, 무슬림 민병대를 대표하는 헤즈볼라 간 4파전이 전개됐다. 여기에 전통적인 종교 세력인 기독교와 회교 간 다툼, 곧 마룬 파와 시아 파의 갈등이 중첩된다. 모든 갈등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들을 강제로 몰아낸 데서 시작됐으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인 PLO가 본부를 요르단에서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옮기면서 본격화 한 것이다. 레바논은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에 놓여 있는, 우리의 경기도 정도의 규모의 지중해 연안 국가이다. 이 복잡다단하다 못해 처절할 정도의 갈등 구조였던 레바논 내전은 일반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비극들을 초래했는데 그 얘기는 캐나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2010년에 만든 ‘그을린 사랑’에 담겨 있다. 한 기독교도 여성이 내전에 휘말려 겪게 되는 상상하기 힘든 비극을 그린다. ‘비공식 작전’에는 그런 얘기가 단 1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영리한 선택이었던 셈인데 만약 그 ‘그을린’ 역사마저 보여주려 했다면 영화는 완전히 길을 잃고 헤맸을 가능성이 높다. 김성훈 감독은 ‘비공식 작전’을 인질 강탈 영화의 작법으로 구축하려 했으며 대중영화의 규칙을 지키는데 만족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중영화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지만 그것 때문에 영화의 내용은 대폭적으로 하향평준화됐다. 대신 재미와 롤러코스터의 액션 느낌을 살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됐다. 영화 만들기란 늘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 대신 김성훈은 1980년대 후반의 한국 정치 상황을 슬쩍 끼워 넣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의 정권 교체기, 의사(擬似, 사이비) 민주주의 사회 체제의 수립, 88 서울 올림픽 전야의 모습, 그 가운데 당시 외무부와 안(전)기(획)부의 주도권 경쟁 등을 알맞은 수준으로 펼쳐 보인다. 레바논 내전보다는 훨씬 더 이해가 쉽다. 우리 얘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이민준은 외부의 적(레바논 테러 단체)과 내부의 적(정부 부처 간 갈등, 안기부장의 횡포)과 동시에 싸워 내야 한다. ‘비공식 작전’은 그 중첩의 모순 구조를 풀어 나가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임순례 감독이 얼마 전에 내놓은 영화 ‘교섭’과 차이가 생긴다. 항간에는 ‘비공식 작전’이 ‘교섭’과 비슷한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두 영화는 ‘확실하게’ 다르다. ‘비공식 작전’이보다 선명한 텍스트 구조를 갖고 있는바, 우리 편과 상대 편이 분명하고 선과 악이 정확하다. 심지어 CIA 요원으로 나오는 카터(번 고먼)조차 매력적인 착한 인간으로 분장시킨다. 그 단순 대립이 이 영화를 ‘교섭’보다 성공의 위치로 끌어 올릴 것이다. ‘비공식 작전’은 조연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며 그 서브플롯이 잘 받쳐 준 영화이다. 안기부장 역의 김흥수, 외무부 장관 역의 김종수, 외교부 과장 역의 박혁권, 부장 역의 유승목 등이 모두 자기 역할들을 충실하게 해낸다. 이들 때문에 에피소드들이 풍부해졌으며 영화의 유머와 재미가 강화됐다. 외국인 배우들의 연기도 그간의 한국 영화가 보여 온 아마추어 수준을 완벽하게 뛰어넘은 것인 바, 번 고먼의 무표정 연기가 눈에 띄고 인질 협상 중재자이자 미술상 역의 마르친 도로친스키라든가 테러범 연기를 했던 다수의 모로코 연기자들도 영화의 동력을 이뤄내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비공식 작전’은 세트가 일품인 작품이기도 하다. 외교부 사무 공간의 디자인, 조명, 미술 소품 등은 이 영화가 지닌 디테일의 수준이 만만치 않았다는 점을 과시한다. 영화 ‘비공식 작전’은 거대담론에서는 철저하게 실패했거나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실패시킨 작품이다. 대신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방식을 따랐다. 국익이니 국가보다는 단 한 명의 사람을 구하려는 인간주의에 치중했다. 물론 그런 내용이 더 거짓말일 수는 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려는 것,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위해 자칫 내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은 지금 시대라면 판타지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 때가 지금보다 더 나았으며 더 인간적이었다는 자각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영화 ‘비공식 작전’은 그래서, 아픈 각성의 바느질 같은 영화이다. 영화의 역할은 늘, 그 정도면 되는 것이다.
한국 영화계의 ‘가장 영리한 아저씨’ 류승완 감독의 신작 ‘밀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저 없이 선택하게 할 작품이지만 어떤 사람들, 특히 류승완을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소 실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매우 대중적이고 상업영화답지만(티켓값이 전혀 아깝지 않지만) 류승완의 작가적 성향은 다소 숨이 죽은 느낌의 작품이다. 근데 그건 감독 스스로 다소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류승완도 때론 쉬어가고 싶은 심정일 테고 영화를 즐기면서 찍고 싶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밀수’는 최동훈이 만든 ‘도둑들’의 페미니즘 판 작품이다. 페미니즘 케이퍼 무비(Caper Movie) 혹은 여성들의 랫 팩(Rat Pack) 무비인 셈이다. 한 무리의 강도들이 범죄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전 과정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라는 얘기인데 그 주인공들이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지금껏 이런 유의 ‘강탈 영화’는 대체적으로 남자들이 주인공이었다. 가깝게는 ‘오션스 11’이니 ‘뱅크 잡’이니 하는 것들, 멀게는 숀 코네리 주연의 1979년작 ‘대 열차 강도’같은 것, 더 멀게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이 주연을 맡았던 작품으로 ‘오션스 11’이 리메이크했던 1960년작 원판의 동명 영화 같은 것, 그리고 아까 얘기한 한국의 ‘도둑들’같은 영화이다. 모두 다 리더 격 남자가 음모를 짜고, 전문가들을 영입하고, 대범하면서도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인 후(몇 겹의 속임수 장치를 써서) 유유히 돈을 챙겨 떠나가는 얘기들이다. 여자들은 거개가 미인계를 쓰거나 리더 남자와 러브 라인이 있는 ‘대상’으로 등장하기 일쑤다. 그런데 ‘밀수’는 그걸 완전히 뒤집고 있다. 그 점 하나만큼은 실로 류승완답다. 그런 점에서 새롭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흥행 면에서는 이 영화의 최대 약점이 될 수 있다. 소위 ‘이대남’들, 20대 남자들이 여성문제에 관한 한 다소 ‘비뚤어진’ 태도를 지닌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1974년쯤부터이고, 확실한 것은 얘기의 끝이 1979년이라는 것이다. 이건 영화 속 내내 흐르는 사운드트랙이자 70년대 노래로 컴필레이션을 한, 기발한 영화음악 구성(장기하)으로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영화의 앞뒤로 1974년 노래 김추자의 ‘무인도’가 흐르고 대체로 1977~1979년에 발표된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와 최헌의 ‘앵두’, 박경희의 ‘머무는 곳 그 어디일지 몰라도’가 주요 곡으로 사용된다. 음악으로 영화 속 이야기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영리하게 짰다. 그 영리함이야말로 류승완 답다. 가상의 섬 군천에서 밀수로 살아가는 어부들, 해녀들의 얘기다. 가상의 도시를 기점으로 하는 류승완 스타일은 2006년작 ‘짝패’에서 한번 쓰인 것이다. 그 영화에선 충남 온양(지금의 아산)을 온성으로 바꿨다. 이번의 군천이라는 지명은 아마도 군산을 염두에 뒀지만(알려진 바로는 류승완은 이 영화의 모티프를 군산에 있는 호남관세박물관에 갔다가 얻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일은 다 꾸며낸 얘기라는 듯, 배경은 부산으로 바꾸되 거기서 맞닥뜨리는 섬은 실제론 남동해 바다에서는 볼 수 없고 오히려 목포나 여수, 해남의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치장시키는 등등 공간을 마구 뒤섞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역설적으로 소격 효과(疏隔 效果)가 일어난다. 이건 영화일 뿐이라는 것인 바, 그러니 너무 심각하거나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한번 즐기라, 주인공들 마냥 한 판 놀자고 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군천의 해녀들은 먹고살기 위해 밀수에 나선다. 외항 어선들이 특정 지점에 물건을 던져 놓으면 물질이 장기인 그녀들이 바다로 들어가 그걸 건져 오는 수법이다. 위험하지만 아주 확실한 방법이어서 해녀들은 짭짤한 재미를 보게 되는데 그 중심인물이 진숙(염정아)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맹룡’호의 선장(최종원)이고 남동생이 같이 작업을 한다. 진숙은 밀수 일을 같이 하는 해녀들 중 춘자(김혜수)와 가장 친하다. 이들이 물질을 해서 건져 바다 위로 띄우는 밀수품들은 동네 건달 장도리(박정민)와 똘마니들이 배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한다. 이들은 척척 손발이 맞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일감을 물어다 부는 삼촌(김원해)으로부터 다이아와 금괴를 들여오면 떼돈을 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선장 아버지는 일이 너무 크다며 처음엔 반대하지만 진숙과 춘자는 그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이들은 평소대로 작은 밀수 일을 시도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금괴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곧 출동한 세관 경찰들에게 발각되고 그 과정에서 진숙은 아버지와 동생을 잃는다. 자신도 3년간 감방에 가느라 아버지의 맹룡 호까지 뺏기게 된다. 판은 커진다. 춘자는 대도시에서 전국구 밀수 왕 권상사(조인성)를 끌어들이고 이제 군천은 예전에 하수인에 불과했던 장도리가 접수한 상태다. 세관 계장 김 계장(김종수)의 악랄한 추적은 그 강도가 더 높아졌다. 아버지와 동생을 잃을 당시 그때의 ‘건수’를 누군가가 ‘찔렀다’고 해녀들은 생각하고 그게 바로 춘자라고 입을 모은다. 춘자만 도망쳤기 때문이다. 진숙은 춘자를 원수로 생각하지만 결국 먹고살기 위해 그녀와 힘을 합친다. 이제 권상사를 속이고 장도리를 따돌려야 하며 무엇보다 김 계장의 눈을 피해야 한다. 3각 4각의 사기극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영화 ‘밀수’의 핵심은 머리가 아니고 몸이다. 속고 속이는 두뇌싸움보다는 류승완 식 액션의 화려한 진열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이다. 그중 하나가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수중 액션 장면들이다. 해녀들이 물속을 오가는 만큼, 그 안에서의 추격전과 살인극이 이어진다. 심지어 상어의 습격도 있다. 입수 장면, 바다에서 나오는 장면, 헤엄치는 장면 등은 실제 바다에서 찍고, 수중 장면은 파주 탄현면에 있는 전문 수조 세트에서 찍었을 것이다. 실제 배우와 스턴트 배우의 액션을 엮고 이어 붙이고 상어를 비롯해 해초, 바위 등 일부는 CG로 처리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찍고 편집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자체를 상상해 내고 디자인 해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한국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밀수’로 또 한 번 진일보하고 진화하게 됐다. 역시 류승완답다. 중간중간 인물들 간 피 튀기는 액션 신이 원 신 원 컷의 롱 테이크로 찍힌 것도 이 영화가 지닌 아삼삼한 재미 가운데 하나이다. 박정민이 맡은 장도리가 자신들을 급습한 경찰을 막으며 고군분투, 망치와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사무실을 한 바퀴 도는 장면은 이 감독이 얼마나 액션을 잘 찍으며 그걸 넘어서서 얼마나 본인 스스로 액션 연기나 촬영, 그 디자인에 자신감이 있는지를 한 치의 유감없이 발휘한다. 권상사와 그의 부하 애꾸(정종원)가 호텔에서 벌이는 ‘칼부림’은 거의 무협이나 권법 영화의 활극을 연상시킬 만큼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다. 역시 액션은 류승완이다. 류승완답다. 올여름의 무더위는 유난히 폭력적이다. 영화를 보며 푹 쉬고 싶으신가. 류승완이 노린 건 바로 그 점일 것이다. 가뜩이나 짜증 나는 세상이다. 영화가 사람들을 쉬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전작 ‘모가디슈’나 ‘베를린’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이번 ‘밀수’는 생각이나 고민보다, 즐기게 하는 게 우선인 영화다. 그 배려심이 고맙다. 역시 류승완답다.
영화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라 비닐하우스에서 살아가는 한 여자의 어둡고 참혹한 이야기다.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은데 생각해 보면 정말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안다. 한 마디로 영화가 지닌 ‘비현실적 현실성’의 속성을 보여 준다. 그냥 영화에 불과한 얘기 같지만 알고 보면 이게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거나 최소한 그 같은 현실의 일을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현실성=리얼리티’가 배가된다. 이런 느낌의 반대가 ‘현실적 비현실성’인데 영화가 너무 현실 같아서 마치 다큐를 보듯 실제 같은 느낌을 받지만 그래도 결국 꾸며진 이야기라는 것이다. 많은 판타지 영화들, SF 영화들이 그렇다. 결국 영화에 불과하다는 소격효과(疏隔效果 :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서 중간중간 작품을 객관화, 대상화해서 보게 되는 과정)로 관객들은 더 큰 안심을 느끼게 된다. 지구가 재앙으로 멸망하는 과정 같은 것을 영화로 본 후의 느낌 같은 것이다. 이 역시 영화가 주는 리얼한 느낌을 역설적으로 증폭시키는 효과가 된다. 사람들은 언젠가 우리들의 운명이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영화 ‘비닐하우스’는 그냥 영화인 척 사실은 영화가 아니라 실제 현실을 그린 내용으로 보여 그 끔찍함이 더해진다. 주인공 문정(김서형)은 비닐하우스에서 산다. 아들은 소년원에 있다. 문정이 생계를 이뤄 나가는 방법은 치매 할머니를 돌보는 간병 보호인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집에는 시력을 잃은 할머니의 남편도 있다. 문정이 돌보는 치매 할머니는 폭력 증상이 심하다. 그녀는 툭하면 문정에게 ‘이 년이 나를 죽이려 한다’며 발악한다. 물건을 던지고 침을 뱉고 머리를 잡아당기기 일쑤다. 문정 그녀도 약간의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데 한 사회단체에서 무료로 운영하고 있는 집단 상담 치료에 다니는 중이다. 문정은 거기서 ‘얼마 전까지는 병원에 다녔었는데 돈이 없어서 여기로 왔다’며 창피해 한다. 같이 상담을 받는 사람 중에는 순남(안소요)같은 여자가 있다. 그녀는 매일같이 ‘선생’이란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며 살아 간다. 이 ‘선생’이란 작자는 사회복지사이고 그 인간은 종종 문정에게도 욕정을 푸는 ‘쓰레기’이다. 남자는 문정에게 ‘누나가 보고 싶었어, 누나하고 같이 살까?’ 등등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한다. 일종의 우회 폭력이고 잠재 폭력이다. 하지만 결국 강간이다. 문정은 과거에도 언뜻 실제 폭력 남편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건 그녀의 아들이 소년원 면회 때 한 말 때문에 짐작되는 일이다.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랑 사는 게 괜찮겠어? 아빠가 떠올라서. 내가 똑같이 생겼다며?” 문정의 삶은 고단함의 최고치이다. 그녀는 아이가 소년원에서 나오면 같이 살 집을 얻기 위해, 그 돈을 벌기 위해 현재 ‘무지하게’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유일한 목표는 아이와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인데 그 진정한 목적은 분명 아들이지만 이 모든 게 다 ‘그놈의’ 비닐하우스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 된다. 보다 정확하게는 ‘비닐하우스 같은 궁박(窮迫)한 현실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된다’라는 얘기다. 총 러닝타임 100분의 길이에서 영화는 40분이 넘어가며 롤러코스터를 탄다. 문정과 치매 할머니는 욕실에서 언제나 그렇듯 옥신각신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치매 노인은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건 아니고 정말 어쩌다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문정은 노인의 시체를 유기하고 집에는 자신의 진짜 치매 노모를 데려다 놓는다. 마침 집에 같이 사는 노인 남자는 실명을 한데다 그도 초기 치매 판정을 받기까지 한 상태다. 어쩌다 보니 모든 게 딱딱 들어맞게 됐다. 그러나 그게 영 불안하다. 간신히 사체를 자신이 사는 비닐하우스에 갖다 놓았지만 그 장면은 순남에게 들킨 상태다. 문정은 순남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내심 자기 편으로 만들 요량으로 그녀를 강간하고 있는 사회복지사를 죽여 버리라고 말한다. 간호 보조를 하는 집에서는 노인 남자가 점점 이상한 낌새를 차리는데 옆에 있는 여자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욕실에서 잘 연습해서 목을 맬 계획을 세운 상태이며 그 ‘거사’ 전에 치매인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일 생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아내인지 아닌지가 매우 중요하다. 영화 ‘비닐하우스’는 그냥 일반적인 드라마인 척 사실은 꽤 밀도 높은 서스펜스 스릴러로서의 이런저런 특질을 극 중반 이후 죽 풀어 놓으며 이걸 만든 신인감독 이솔희 감독이 스스로 장르적 장기가 만만치 않음을 과시한다. 미스터리와 달리 서스펜스란, 모든 얘기의 비밀,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사실들을 관객이 다 알고 있는 경우의 얘기를 말한다. 다만 극 중 인물들만 모를 뿐이다. 예컨대 관객들은 1) 맹인 남자가 집에 있는 치매 노인이 자신의 아내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것을 보게 된다. 2) 이 남자는 자신의 친구이자 의사를 집으로 부른다. 3) 남자 둘이 관련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사실은 문정의 실제 엄마로 대체된 치매 노인은 소파에서 등을 돌려 자고 있는 중이다. 4) 친구 의사가 막 할머니의 등을 돌려 얼굴을 확인하려 한다. 5) 그러나 정작 문정은 좀 전까지 이런 사실, 곧 맹인 노인의 친구가 집에 올 거라는 사실을 모른 채 새로 이사 갈 임대 아파트를 쓸고 닦고 하던 중이다. 6) 친구 의사가 할머니의 몸을 돌리려는 순간 문정이 집안으로 들어선다. 7) 문정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제지하고 위기의 순간을 모면한다. 이 시퀀스에서 관객들이 느끼는 긴장감이 만만치 않다.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 속으로 이구동성, 문정에게 소리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빨리 집으로 가야 해! 위험해!’ 이렇듯 ‘비닐하우스’는 서스펜스 드라마의 정통 기법이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작품이다. 참고로 미스터리는 서스펜스와 달리 극중 인물이나 관객들이나 수수께끼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경우의 이야기를 말한다. 살인사건 수사 드라마의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인물이나 관객이나 모두 맨 나중에 가서야 사건의 전모나 진범의 실체를 알게 된다. ‘비닐하우스’는 미스터리 드라마가 아니라 서스펜스 드라마이다. 문정의 행동을 두고 도덕적 잣대를 들이 대거나 법적인 판단을 하려 하는 것이 바로 지금과 같은 어리석은 세상의 행태일 터이다. 감독 이솔희의 목소리는 적어도 그 점을 뛰어넘고 있다. 영화는 도덕이 아니다. 종종 도덕과 윤리 이상을 지향한다. 문정의, 의도치 않았던, 범죄 행각은 과연 성공하게 될까? 성공하는 것은 과연 옳을까. 아니면 반대로 모든 것이 밝혀지는 것이 옳을까. 분명한 것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이걸 보는 관객들은 문정을 둘러싼 ‘많은 일들’이 아직은 잘 숨겨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차라리 판단이 유예됐으면 하는 것이다. 그녀가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앞이 안 보이는 노인은 중간에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아들과 손주에게 유언을 녹화, 녹음한다. 그는 말한다. “애들아. 삶을 만들어 나가는 건 언제나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단다.” 세상의 삶은 단순 명쾌하게 한 칼에 정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공정과 정의 역시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는 옳은 것을 선택하기 보다 인간적인 것을 선택해야 한다. 영화 ‘비닐하우스’가 궁극으로 얘기하고 있는 주제이다. 김서형의 연기가 놀랍다. 그녀는 시종일관 자신의 뺨과 얼굴을 후려치며 자학을 한다. 관객들도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싶게 만든다. 모두들 그러고 싶은 시대이다.
미디어의 확장성이 다소 떨어져서 그렇긴 하지만 글로벌 OTT 중 하나인 애플TV +는 종종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내놓는다. ‘파친코’가 대표적인데 요즘은 ‘사일로(SILO)’란 작품이 그렇다. 한국어 제목은 ‘지하창고 사일로의 비밀’이다. 제목을 이렇게 붙인 데는 사일로란 단어가 미국의 대평야 지대를 지나다 중간중간에 볼 수 있는 곡물형 창고의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곡식과 목초를 쌓아 두는 굴뚝 모양의 창고를 뜻한다. 10부작 드라마인 이 작품에서 사일로는 144층의 수직형 지하 건물로 나온다. 바깥 세상은 차단됐으며 140년간 사람들은 외부로 나간 적이 없다. 외부세계는 극도의 대기오염으로 나가자마자 사망하게 된다는 것이고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사례를 목격한다. 사일로 안 시민들은 역사 이전과 역사 이후 혹은 반란 이전과 반란 이후로 구분하고 살도록 주입됐다. 사람들은 반란 세력이 책과 정보를 모두 불태워 사일로의 역사는 남아 있지 않다고 배우며 살아 간다. 모든 것에 통제 아닌 통제가 이루어지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임신 허가제라는 것이다. 사일로 안의 모든 여성은 피임기구를 시술받고 임신 허가가 나오면 이 기구를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임신도 허가제이지만 연애도 허가제이다. 게다가 144층의 지하 건물은 층층이 다른 계급과 계층으로 구분되며 맨 지하층은 기계부로 하층 노동자들이 살고 중간 층에는 의사와 같은 중산계층이, 위로 올라갈수록 법무부 같은 상층부가 살아 간다. 사람들은 별 불만없이 나름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데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정말 바깥으로 나가면 사람들은 죽게 되는 가. 사람들을 전부 사일로 안에 가둬 두는 특별한 목적과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드라마 ‘지하창고 사일로의 비밀’은 명백히 봉준호가 2013년에 만든 ‘설국열차’에 네덜란드 감독 폴 버호벤이 1989년에 내놓은 ‘토탈 리콜’의 설정을 뒤섞은 것이다. 통제사회의 극단적 미래형이 어떠한 계급사회를 만들어 내고 또 어떻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이어가게 하는 가를 보여 준다. 과거의 두 작품이 역작이었듯이 이번 ‘사일로’도 업데이트된 수작이다. 지배층의 강고한 억압과 (자본 및 노동의) 수탈이 사실 얼마 만큼 층층히 수직계열화 되어 있으며 그게 너무 세분화돼 있는 탓에 차라리 그 착취의 구조를 깨닫지 못할 정도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계급사회를 만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최면화, 가스 라이팅의 시스템이 너무 정교하다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불순한(우리로 말하면 반국가적인) 사고를 지닌 인간들은 연애나 임신조차 금지시켜 싹을 잘라 내려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발본색원이다. 어디서 많이 본 얘기이고 앞으로도 어디서 많이 듣게 될 애기가 아니겠는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얼마 전 대한상공회의소가 제주도에서 주최한 한 포럼 기조연설에서 “이민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철저히 국익을 위해 미리 계획을 세우고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는 외국인은 받아들이고, 불법을 저지르는 외국인은 내쫓는 이민정책을 펴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서 코웃음을 친 기억이 난다. 코웃음. 맞다 비웃음이다. 이민자를 받아 들이겠다는 나라가 여전히 차별금지법을 두고 논쟁을 하고 있고 차별금지법을 금지하자는 쪽에 법무장관의 무게중심이 실려 있지는 않던가. 그런데 이민자를 늘린다고?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면 받아 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추방하겠다는 다소 무차별적, 선택적 사고에도 오싹한 느낌을 받는다. 아 사일로를 만들겠다는 뜻이구나, 꼬리칸과 황금칸이 있는 열차나 144층짜리 계급의 건물을 짓겠다는 얘기이구나 싶었다. 영화는 반란군이나 저항세력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어김없이 핍박받는다. 결국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들의 뜻이 어느 정도 관철된다. 근데 그 과정이 참으로 피곤하고 참혹하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일부 사람들이 상황을 꼭 그렇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배우면 시행착오가 좀 줄지 않을까. 그냥 너무 한가한 얘기가 되는 것일까. KBS 수신료 분리 징수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면서도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떠올려졌다. 그 작품에서 주인공 덴고의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이다. 그는 NHK 수신료 징수원인데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은 그로 인해 괴롭힘을 당한다. 사회의 스트레스 수치가 엄청나게 올라간다. 이 시행령 안을 통과시킨 방송통신위원회 위원들은 『1Q84』를 읽기나 했을까. 무식하고 한심한지고. 그리도 영화와 책에서 좀 배우라 했거늘.
토니 길로이, 아론 소킨, 폴 해기스 등과 함께 현존하는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소리를 듣는 크리스토퍼 맥쿼리의 ‘미션 임파서블 7 : 데드 레코닝’은 결국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미션’ 시리즈에서 맥쿼리는 자신이 갖고 있던 평생의 숙제 같은 얘기를 몽땅 욱여넣고 집대성한다. 일단 이야기 설정 자체가 그렇다. 뭐랄까. 상대를 너무 크게 잡았다. 인류의 미래를 바로 지금이라도 절대적으로 위협하는 존재가 주인공 에단 헌트(톰 크루즈)의 상대이다. 그 존재는 사실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진화하는, 일종의 AI 기술이다. ‘엔티티’로 불린다. 겉으로 보기에 에단의 상대는, 그 기술을 차지해 세계 권력을 쥐려는 악당 가브리엘(에사이 모레일스) 같지만 그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도 어쩌면 그냥 ‘가브리엘’ 곧, ‘4명의 천사장 중 한 명일 뿐이다’. 에단의 적은 가브리엘 같기도 하고 CIA 산하의 비밀 조직이자 자신이 소속돼 있는 IMF(Impossible Mission Force)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 수장인 키트리지 국장(헨리 체르니)이 적으로 배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에단의 적은 그냥 절대자로 치환된다. 그냥 의인화된 디지털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엔티티(entity)’, 곧 ‘본질’이란 뜻 그 자체가 된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절대 악인가 아니면 절대 선인가. 그것이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7’의 장대한 서사에서 첫 번째로 맞닥뜨리게 되는 딜레마이다. 이런 것이다. 인류의 생존 자체를 말살하게 하는 기술인 만큼 즉각 없애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통제권을 쥐면 세상의 권력을 얻는다. 전 세계 정보 조직이 딜레마에 휩싸이는 이유이다. 악당의 손에 들어가면 절대적으로 위험한 만큼 이단 헌트 같은 비밀 요원을 이용해 없애야 하는가, 아니면 그걸 통제할 수 있으면 오히려 세상을 지킬 수 있으니 그걸 없애기보다는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렇다면 그건 과연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것이다. 조직이든 사람이든 이제 그 실존적 선택을 해야 한다. 영화는 키트리지 국장의 입을 통해 그런 선택의 딜레마를 초반부터 깔아 놓는다. “우리의 삶은 모두 선택의 결과이고 그래서 우린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지. 이단 넌 이번 임무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고통스럽게.” 이번 7편은 ‘에피소드 1’ 곧 전편만을 공개했지만 분위기의 흐름상 누군가의 희생이 없으면 엔티티를 제거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건 곧 에단 헌트의 죽음일 것이다. ‘미션 임파서블 7 : 데드 레코닝’은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두 번째지만 가장 큰 딜레마를 관객들에게 안긴다. 에단 헌트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미션 시리즈를 끝낼 것인가 이어갈 것인가. 불현듯 에단 헌트 역의 톰 크루즈가 환갑을 넘긴 나이라는 점이 떠오른다. 007 제임스 본드도 죽었다. 심지어 존 윅도 죽었다. 할리우드가 다른 세대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이긴 하다. 할리우드의 딜레마이다. 영화는 딜레마의 철학을 곳곳에 심어 놓는데 서구인들이 갖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 곧 종교적 의미에서도 그 점을 드러낸다. 에단 헌트를 비롯해 모든 첩보원들이 기를 쓰고 추적하는 엔티티 구동의 열쇠는 십자가이다. 두 개의 십자가가 겹쳐져서 입체형 십자가로 돼야 작동이 된다. 근데 그 십자가 형 키를 처음에 손에 넣는 사람은 그레이스, 곧 은총이란 이름의 여자이다. 신의 은총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레이스(헤일리 앳웰)는 뛰어난 기술을 지닌 소매치기이다. 첩보전에서는 ‘듣보잡’이자 ‘갑둑튀’의 여자이다. 인물들의 이름이 지닌 종교성은 이 영화가 지닌 최대의 딜레마일 수 있다. 지나치게 전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피날레로서 그지 없이 좋은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의 대속(代贖)의 행위를 전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예수처럼. 아마도 크리스토퍼 맥쿼리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서구 합리주의 근대 철학)의 결합과 그 갈등의 축을 영화 전체에 풀어 넣으려고 애쓴 것처럼 보인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야말로 이번 영화의 키워드인데다 주인공 에단 헌트를 통해 니체의 초인(超人) 사상을 실현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에단 헌트는 엔티티를 뛰어넘어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수 있는 완벽한 자아이다. 그러나 그가 초인으로서 세상의 또 다른 절대적 권력이 될지(그게 과연 옳은지) 예수처럼 대속의 행위를 이어 갈지(그게 과연 현실적일지)는 현재까지의 이야기 전개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이러자니 논리가 안 맞고(니체의 얘기대로 괴물을 없애려고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저러자니(일종의 히어로물이 되니까) 너무 진부해진다. 한 마디로 딜레마이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쉴 새 없이 고민에 빠진다. 전 세계 정보조직의 거간꾼이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뛰어드는, 일명 화이트 위도우(바네사 커비)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엔티티의 키를 두 쪽 다 가지려 하고 그렇게 될 경우 그것을 어느 쪽에 넘길 것인 가를 놓고 고심한다. 한쪽(예컨대 CIA)은 그걸 가질만한 힘이 있지만 그 작동 방법을 모른다. 또 한쪽(예컨대 가브리엘이나 에단 헌트)은 엔티티의 구동 원리를 이미 알고 있거나 알게 되겠지만 믿을 수가 없다. CIA에 키를 넘기면 전 세계 다른 정보 조직에 쫓기게 된다. 가브리엘 등에게 넘기면 영원히 그의 하수인이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 가를 두고 영화는 등장인물들을 베니스의 한 호텔에 몰아넣는다. 그 장면은 이번 영화의 주제를 극대화하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심지어 에단 헌트는 여기서 자신의 현재 애인인 일사 파우스트(레베카 퍼거슨)와 새로운 여인 그레이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파우스트(고민을 하는 인간)냐 그레이스(신이 내린 존재)냐, 인 셈이다. 하지만 에단의 오랜 동지이자 둘도 없는 친구인 루터(빙 레임스)는 그에게 이런 식의 충고를 한다. ‘가브리엘을 죽여선 안돼. 그를 살려서도 안돼. 그냥 키만 갖고 도망쳐야 해. 해답은 거기에 있어.’ 에단 헌트도 위기의 순간 일사 파우스트에게 소리친다. 최대한 멀리 도망쳐! 일사를 보낸 후(버린 후) 그는 그레이스를 구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그레이스는 자꾸 그런 그에게서 벗어나려 애쓴다. 신의 뜻은 다른 것인가. 그 모든 복잡한 수사학에도 불구하고 딜레마의 주제의식을 액션 한방으로 보여준 씬이 바로 열차 폭파 신이다. 에단과 그레이스가 탄 열차는 노르웨이 어딘 가 절벽에서 철로가 가브리엘의 폭탄 테러로 끊기게 되고 차량 한 칸 한 칸 밑으로 수직 낙하한다. 두 남녀는 칸마다 뒤로 가야 살 수가 있다. 절벽에 세로로 차례차례 대롱거리게 되는 기차 차량 안에서 뒤로 간다는 것은 위로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존을 위해 전진하는 것의 방향성이 뒤틀려지게 된다는 것인 바 이건 마치 대형 크루즈였던 포세이돈호가 태풍으로 전복된 후 사람들이 살기 위해 오히려 뱃속, 배 밑바닥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 딜레마를 벤치 마킹 한 아이디어이자 설정이다. 이번 영화의 가장 짜릿한 액션 신이자 세트와 특수 촬영, 스턴트와 CG의 절묘하면서도 극상의 결합을 보여준다. 현대 할리우드 테크놀로지를 테크놀로지의 느낌이 아니라 인간 육질의 느낌으로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톰 크루즈의 장인 정신이 배어 있는 부분이다. 그가 독보적인 배우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이다. ‘데드 레코닝2’는 1편에 이어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에단 헌트는 목숨을 잃을 것인가. IMF는 영구 폐쇄되는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것인가. 벌써부터 호사가들의 예측이 난무하고 있다. 딜레마이다. 이러자니 너무 아깝고 저러자니 여기까지 온 얘기를 더 이상 정리할 수가 없다. 우리의 삶은 모두 선택의 결과이다. 정말 그렇다.
모든 것은 다 ‘그놈의’ 토드 때문이다. 토드는 강아지다. 유기견이다. 이런 강아지가 흔히 그렇듯 분리불안증이 심하다. 그래서 자주 짖는다. 동네 주민들이 난리다. 집 주인도 결국 방을 빼라고 한다. 견주인 존 체스터와 아내 몰리는 이사를 갈 바에야 아주 색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찾으려 한다. 바로 토드가 뛰어놀 수 있고 마음껏 짖을 수 있는, 그리고 온갖 동물과 식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다 함께 할 수 있는 농장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작은 농장’은 이처럼 존&몰리 부부의 불가능하고 무모한 농장 운영 도전기를 그린 내용의 작품이다. 존 체스터는 다큐멘터리 촬영감독이다. 주로 동물 다큐를 찍어 왔다. 몰리 체스터는 건강식 요리 전문가이다. 이 모든 일은 강아지 토드에게서 비롯됐지만 아내 몰리의 입버릇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건강한 요리를 위해서는 채소는 직접 재배한 것을 써야 한다고 말해 왔고 그래서 그녀는 늘 방울토마토부터 바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재배할 꿈에 대해 얘기해 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다큐의 제목은 몇 가지 점에서 의도적인 거짓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일단 ‘작은’ 농장이 아니다. 존&몰리 부부가 사들인 땅은 8만 헥타르, 곧 24만 평이다. 어마어마한 규모다. 영화는 제목만으로는, 그리고 내용의 아우트라인만으로는, 유쾌하고 귀여운 성공담을 담고 있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처음엔 즐겁게 시작하지만 중간에 매우 심각해지며 나중엔 진지한 성찰로 이끈다. 이건 성공기라기보다는 고난기에 가깝다. 가장 인상적인 존 체스터의 대사는 ‘타협 없는 이상주의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들 부부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였다. 아파트 베란다 화단 정도나 키우던 젊은 부부였다. 그런데 황무지를 농장으로 바꿔낸다고? 그것은 결코 이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곧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나무가 많아지면 새가 몰려들고 새는 과일을 죄 쪼아 먹어 대서 모두 못쓰게 만든다. 오리 수백 마리는 건기의 호수를 배설물로 채우게 해서 저수지의 물고기를 죽게 만든다. 숲이 우거지면 나무에 진드기와 달팽이가 들끓는다. 동물들이 많아지니 당연히 코요테의 습격이 잦아져 닭들이 거의 죽어 나갈 지경이 된다. 코요테는 존&몰리 부부의 캘리포니아 농장 ‘애프리콧 레인’의 유일한 생산품이자 자본의 동력이 되는 싱싱한 계란 매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 된다. 존 체스터는 결국 엽총을 든다. 타협 없는 이상주의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그가 코요테를 사살한 직후 그 사체를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다. 다큐 ‘위대한 작은 농장’은 어쩌면 1960~70년대 미국에 풍미했던 히피즘의 부활을 은밀하게 얘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기존 히피 운동에 환경과 동물보호, 생태계 복원을 덧붙인 일종이 뉴히피즘적 색채가 강하다. 기존 히피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며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적 가치에 무게를 둔 운동이었다. 종교적이면서도 정신적 해방과 이념적 자유, 문화적 생활을 꿈꾸던 일군의 젊은이들은 집단생활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히피들은 결국 과도한 약물 남용과 그룹 섹스 등 루저들의 문란한 집단생활로 변질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존&몰리 부부의 농장이 시도될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이 주장하는 생태환경론에 동의한 사람들, 곧 에인절 투자자들이 모였기 때문인데다 실질적인 농장 운영도 앨런이라는 이름의 생태 이론가가 멘토로 참여하고 다수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인 노동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다큐에는 잘 안 나타나지만 이들은 농장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존과 몰리의 농장은 결국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스템을 꿈꾸고 있는 셈이다. 다큐의 제작 방식과 제작 주체, 내러티브 구성과 서사가 돋보인다. 이건 다큐지만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마냥 탄탄한 스토리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8년간 틈틈이 찍어 내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놀랍다. 존 체스터는 동물다큐 촬영감독 출신답게 몰리가 땅을 사자고 할 때부터, 그리고 그들이 강아지 토드를 입양한 순간부터 애프리콧 레인 농장이 7년 만에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결국 이 모든 것이 궁극의 엄청난 ‘기록’이 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 컷 한 컷 장면을 찍어 놓았다. 그것도 그 무수하고 험난한 농장 일을 병행하면서. 엔드 크레디트를 보면 이를 위해 4명의 보조 촬영감독이 동원됐음을 알 수가 있다. 존 체스터에겐 한 마디로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제작의 단계와 과정도 매우 계획적이었는 바, 장편을 한꺼번에 편집하는 것보다 단편 하나하나, 곧 부분 부분을 완성해서 나중에 이를 모두 합쳐 장편으로 재 편집하는 방식을 택했다. ‘위대한 작은 농장’을 내놓기 전 ‘엠마 구하기’ 등의 단편을 발표하는 방식이다. 결국 하나하나, 차곡차곡 만들어 낸 다큐인 셈이다. 엠마는 존 부부가 처음으로 키운 암퇘지 이름이다. 엠마는 계속 새끼를 낳았는데 한 번에 17마리씩 낳았고 너무 번식력이 강해 그것이 어느 순간엔 존의 최대 고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위대한 작은 농장’은 결국 공존에 대한 얘기이다. 그런데 이 공존은 꼭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공존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적대 관계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공존은 평화와 전쟁이라는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의 기묘한 합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연 생태계에서라면 그것은 늘 합리적이며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것이다. 존 체스터가 결국 코요테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 모든 작물을 파먹는 포식자 쥐들을 위해 올빼미를 풀어 놓게 된다든지 하는 것, 모든 피복작물에 기생하며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달팽이들을 오리가 잡아먹게 한다든지 하는 것 등등이다. 올빼미 87마리가 두더지 1만 5천 마리를 없앤다. 오리는 거의 모든 달팽이의 포식자이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유기체는 죽음을 생명으로 재탄생시킨다. 자연과 동물은 수억 년 동안 그렇게 생태계를 유지시켜 왔다. 인간만이 그러지 못하며 산다. ‘위대한 작은 농장’은 동물을 사랑하고 그들을 살리려는 한 부부의 애처로운 노력을 그리는 것을 넘어 인간 사회에 대한 더 큰 메시지, 더 깊은 정치사회적 의미를 던지고 있다. 인간은 지금 당장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받아들이며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얘기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환경영화가 아니다. 매우 정치적 순도가 강한 작품이다. 서사의 구조도 매우 발칙하다. 영화는 남 캘리포니아 지역에 거대한 산불이 난 것으로 시작한다. 존이 몰리를 향해 워키토키로 외친다. 빨리 피해야 해! 다 버리고 집에서 빨리 나와! 그 직후 영화는 이들의 LA 도시 생활로 플래시 백한다. 토드를 입양하는 과정과 거대한 규모의 황무지를 매입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리고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뿔싸, 아까 첫 장면이 대형 산불 모습이었으니 이 모든 게 다 물거품이 된다는 얘기일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결국 언해피 엔딩이라는 얘기일까라는 생각도 갖게 한다. 그 미스터리를 앞단에 슬쩍 덫처럼 던져 놓은 이야기 솜씨가 돋보인다. 재미있게 그러나 진지하게. 자연은 늘 활력이 넘치지만 늘 겸손하고 성찰이 있는 노동을 요구한다. 바로 그 양가(兩價)의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얻는 것이 많다. 적어도 타협 없는 이상주의는 없다는 말 하나 정도는 남는다. 이상과 현실이 늘 부딪히는 것은 그 같은 깨달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회정치적 이슈의 해법은 놀랍게도 자연의 순환 법칙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 다큐가 전 세계에서 삽시간에 주목을 받았던 이유이다. 그런데 강아지 토드는 어떻게 됐을까.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 뉴욕 출신의 감독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유전’, ‘미드 소마’ 등)은 난독증의 필사본이다. 그의 최신작으로 국내에서 막 개봉될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절대 해독 불가 아리 에스터 월드’의 최고봉이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아리 에스터도 놀랍지만 이런 영화에 돈을 대고 문을 열어 주는 투자자와 극장들도 놀랍다. 이건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 들인 돈만큼을 수익으로 환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관객들을 영화 인식의 인내로 내몬다. 미지(未知)와 불가지(不可知)가 마구 뒤섞여 있는 영화. 노력하면 결국은 알 수 있는, 아직 모르고 있을 뿐(未知)이지만 동시에 그래도 결국엔 알 수 없는(不可知) 얘기가 혼재돼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인공인 보(호아퀸 피닉스)가 어렸을 때부터 싱글 맘인 모나(패티 루폰)로부터 정서적 학대에 시달려 왔고 그것이야말로 성인이 돼서도 그의 편집증의 궁극적 원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끊임없이 살모(殺母)라는 존속 살해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음은 느낄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 정신병리학적인 것이라는 점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보가 한 번도 섹스를 해 보지 않은, 에이섹슈얼(asexual : 무성애자. 무성생식)인데 나중에 보니 아들이 셋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보통의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에 맞지 않는다. 알 수가 없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1975년생인 보란 인물, 현재 48세인 남자가 겪고 있는 신경증적 질환에 대한 이야기이(일 수 있)다. 다분히 신경정신학이나 정신질환 연구, 심리학자들일수록 이해도가 빠른 영화일 수 있겠다. 무려 179분이나 되는 이 영화는 총 4개의 장(章)으로 구성돼 있는데 뉴욕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보의 일상이 1부이고 거리에서 칼에 찔린 후 어떤 중년 부부의 집에서 치료를 받는 상황이 2부이고 그 집안의 괴물(또 다른 환자로 이라크 파병 이후 PTSD를 앓고 있는 전직 군인의 공격으)로부터 탈출해 숲속에서 히피로 지내는 이야기가 3부이며 4부는 괴물로 변한 전직 군인에게 쫓기다 엄마의 장례식에 오게 된 후 어릴 적 여자 친구인 일레인(파커 포시)과 기습적으로 섹스를 하게 되는데 그가 평생을 걱정해 왔던 것과는 달리 남자인 자신이 복상사(腹上死)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인 일레인이 성관계 중 돌연사를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서 자신이 부계가 모두 복상사를 했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터이다.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것도 그렇게, 단 한 번의 사정(射精)으로 엄마를 임신시킨 후 사망한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엔 주인공 보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의 핵심 키워드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살부(殺父) 개념을 형상화한 셈이다. 남자는 어릴 때 처음 만난 이성이 어머니임으로 아버지에게 경쟁심을 느끼게 되고 그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 반대가 엘렉트라 콤플렉스(딸이 엄마에게 경쟁심을 느끼게 되고 죽이고 싶어 하는 심리.)인데 가부장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부권의 권위가 사라진 현대에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에게 해당하거나 교차하는 특성을 지닌다. 주인공 보가 엄마인 모나에게서 느끼는 것은 오이디푸스도 엘렉트라도 아닌, 아니면 두 개가 동시인 심리이다. 영화의 1장에 해당하는 첫 번 째 에피소드가 가장 현실에 근접해 있는 내용이다. 뒤의 세 장은 모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이다. 그건 실재라기보다는 감독인 아리 에스터가 반항하고 저항하려는 가부장 혹은 모계사회의 불필요한 권위의식, 종교의 외피를 쓴 가식적인 윤리 의식, 자본주의(특히 중산층)가 만들어 내는 끝없는 허위의식에 대한 관념적 비판과 비난의 서술이다. 머릿속에서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두서가 없을 뿐이다. 핵심은 자기 식의 비판이다. 첫 에피소드에서 보는 자신의 정신과 의사(스티븐 헨더슨)와 상담하는 것을 오프닝 시퀀스로 보여 준다. 의사는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엄마 집을 방문하게 돼서 좋으냐고 질문한다. 보는 의사에게 ‘꼭 갈 필요가 없고 자신이 가도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얘기한다. 의사는 자신의 노트에 ‘죄의식(GUILT)’이라 메모한다. 의사는 그에게 신약을 주면서 꼭 물과 함께 먹으라고 한다. ‘꼭’이라고 몇 번을 강조한다. 집에 돌아온 보는 일찍 잠자리에 들지만 옆집에서 두 시간에 한 번씩 보내는 항의 쪽지에 시달린다. 음악 소리를 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복도 바깥에서는 헤비메탈의 강렬한 폭발음이 터지는 중이다. 보의 환청은 무음인가, 아니면 음악 소리가 환청인가. 항의 쪽지 때문에 잠을 설친 보는 엄마 집으로 가기 위해 슈트 케이스를 싸고 방 키를 들고 나서지만 그 찰나 방에 놓고 온 무엇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같은 복도에 사는 아파트의 누군 가가 트렁크와 열쇠를 가져가 버린다. 황당해 하고 있는 그에게 아파트 청소원이 지나가면서 ‘너는 이제 X됐어.’라고 말한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 놨는데 가방과 열쇠를 잃어버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엄마는 넌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고 쏘아붙이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린다. 극심한 불안과 혼란한 정신 때문에 의사가 준 신약을 먹으려고 하자 이번엔 생수가 바닥이 나고 수도가 고장이 났는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약을 그냥 삼킨 후 용법을 살펴 본 보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데 물 없이 이 약을 먹으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돼있었기 때문이다. 물을 먹기 위해 집 건너편 편의점을 가려다가 보는 이런저런 걸인들과 부딪혀 도망 다니느라 헐덕댄다. 급기야 그는 목욕 중에 있는 자신을 욕탕 천정에 매달려 있다가 그를 덮친 청소부와 몸싸움을 벌이게 되고(이 장면은 명백히 엄마 배 안 물속에 있는 태아를 누군가 공격한다는 것으로 인간은 출생 전부터 심각한 위협에 시달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자를 피해 벌거벗을 채로 길가에 나온 보에게 역시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을 이미 넷이나 찔러 죽인 거지가 휘두른 칼을 맞고 정신을 잃는다. 이런 등등의 서사들은 알프레드 히치콕이 1945년에 만든 영화 ‘스펠바운드’ 속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풍 환상 장면(주인공 존 발렌타인 박사, 곧 그레고리 펙은 같은 내용의 꿈을 반복적으로 꾸는데 얼굴 없는 남자가 녹아내린 시계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는 장면이다. 동료 박사인 콘스탄스, 곧 잉드리드 버그먼은 존이 하얀 식탁보에 난 포크의 삼지창 자국을 없애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그가 극심한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간파한다.)을 연상케 한다. 아리 에스터 식 ‘환상특급’이자 ‘기묘한 이야기’의 결정판이 이번 ‘보 이즈 어프레이드’인 셈이다. 영화는, 인간이 지닌 정신병적 증후군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 카테고리나 심도에 비해 수사학적으로 지나치게 과장 왜곡돼 있거나 말이 말을 낳은 경우라는 점, 정신병이 사실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스템이 인공적으로 만들고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죄의식이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든 마더 콤플렉스든 그 모든 것이 지적 허영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얘기가 바로 이 영화의 키포인트로 보여진다. 관념을 관념의 끝으로 밀어붙여 그 추상의 실체를 더듬게 만드는 기이한 방식의 영화이다.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린 식으로 재단할 영화가 아니다. 자기에게 대입해 보면서 느끼고 직관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때론 그렇게 정신적일 때가 있다. 이게 다 죄의식 탓이다. 자 근데 그게 과연 무슨 말인가.
지난 2월 국내 극장 개봉 당시 41만 명이라는 비교적 괜찮은 흥행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세간의 화제를 얻는 데는 실패했던 작품 ‘서치 2’는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서치 2’는 매우 영리하고 똑똑한 영화이다. 어느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작 ‘서치 1’처럼 ‘서치 2’도 누군 가를 찾는 얘기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만 연작의 특징을 가질 뿐 두 영화는 연관성이 없다. 1편의 원제는 그대로 Searching(수색)이고 2편은 Missing(실종)이다. 이건 내용 면에서 큰 변별력을 보이는 대목이다. 서사의 구성 면에서 2가 1보다 진화했다. 영화가 훨씬 풍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이 별다르게 뜨거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1편과 달리)은 영화를 따라가는 ‘정서’가(‘기술’이 아니라) 점점 더 MZ 세대 중심이기 때문이다. 영화 ‘서치 2’는 디지털 세계의 기술적 다양함을 넘어선, 믿을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구사할 줄도 모르는 올드 세대 관객들에겐 그 서사(敍事), 곧 줄거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영화가 중간중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서치 2’는 애초부터 올드 세대 관객들을 껴안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아예 배제하고 간 셈이다. 기획부터 영화의 큰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영화는 비교적 단란한 가족을 보여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곧이어 전개되는 아빠의 죽음, 부성의 부재 속에서 자란 18세 된 딸과 43세 엄마의 일상에 대한 얘기이다. 배경은 LA이다. 엄마 그레이스 엘렌(니아 롱)은 남편에 대한 상처를 잊고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하는 싱글 맘이다. 그녀는 최근 케빈이라는 동양계 남자(켄 렁)와 연애 중이며 그와 함께 콜럼비아 여행을 떠날 참이다. 그래서 참 신경 쓰이는 사람이 청소년 딸 준(스톰 리드)이다. 그레이스는 딸을 준버그(우리 식으로 라면 똥강아지 준)라고 부르며 당연히 딸 준은 모든 청소년들이 그렇듯이 엄마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에 짜증을 낸다. 엄마 그레이스는 남친과 여행을 가기 전 자신의 친구이자 가정문제 전문 변호사인 헤더(에이미 랜테커)에게 딸을 좀 들여다봐 달라고 부탁한다. 당연히 이 문제도 딸 준은 엄마에게 부글부글 성질을 부린다. 자신의 나이엔 더 이상 보모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구구절절, 영화 초반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런 스릴러 영화일 수록 모든 인물에 복선이 깔려 있다. 영화 속 사건을 풀어 가는 해결의 실마리, 그 답은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엄마 그레이스는 딸 준에게 자신이 LA로 돌아오는 날 공항에 픽 업을 나와 달라고 한다. 며칠 신나게 파티를 즐겼던 준은 엄청난 숙취 때문에 가까스로 일어나 구글에서 서비스 업체를 찾아 내 난장판이 된 집의 청소를 맡기고 공항으로 엄마를 마중 나간다. 이 모든 것은 실시간으로 그녀의 모바일 폰에 셀카 녹화 형식으로 담겨진다. 하지만 엄마는 공항에 나타나지 않는다. 엄마는 실종된다. 남자 친구도 없어진다. FBI 수사관인 일라이저 박(다니엘 헤니)이 개입한다. 콜럼비아 현지에서는 일종의 흥신소 역할을 하는 서비스 프리랜서 자비(조아큄 알메이다)가 준의 의뢰로 현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구글 맵이 동원되고 준은 두 사람의 셀 폰 내 위치 추적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준의 개인 서칭은 디지털 기기의 모든 기능을 총망라시킨다. 심지어 엄마와 엄마 애인이 다녔던 콜럼비아 내 유명 관광지의 CCTV까지 원격 조종으로 열어 볼 정도다. 그녀의 기술, 요즘 아이들이 디지털 기능을 이용하는 수준은 실로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영화는 수사관 일라이저 박, 곧 다니엘 헤니가 전화 목소리 만에서 비로서 얼굴을 드러내는 중반쯤부터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엄마의 애인 케빈이 사실 사기 전과가 있는 남자라는 것이 알려지고 이 모든 것이 그가 엄마의 돈을 노리고 일으킨 사건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사게 된다. 이윽고 콜럼비아의 CCTV나, 케빈의 모든 SNS에 실린 여행에서의 사진 속 여자가 알고 보니 엄마가 아니라 엄마를 닮은 대역이라는 엄청난 사실이 드러난다. 엄마 그레이스는 콜럼비아로 가기 전, LA 공항으로 가는 우버 택시 안에서 이미 납치돼 실종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더욱더 수상한 것은 지금까지 준이 알고 있었던 엄마의 이름 그레이스도 12년 전 한번 바뀐 적이 있다는 것이며 이전에 다른 정체가 있었음이 알려지게 된다. 이쯤 되면 엄마는 납치, 실종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점입가경이다. 엄마는 실종됐을까. 딸을 버리고 사라졌을까. 아니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해됐을까. 영화 ‘서치 2’는 화려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이야기 구조이지만 두 가지 다른 측면에서 주목할 거리가 준다. 디지털이 전하는 수많은, 정말 수도 없이 많은 그 난장판의 이야기도 사실은 진실의 조각에 불과할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모든 것이 조작될 수 있고 그 조작 여부도 사용자의 취사선택에 따라 선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준도 그렇고, 그레이스도 그렇고, 케빈도 그렇고, 언제든지 모두들 위치 추적기를 끌 수 있으며 구글이든 페이스북이든 기분과 특정 목적에 따라 계정을 폭파시킬 수 있으며 아니면 가상의 계정을 만들어 다른 사람인 양 정체를 숨길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상당수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영화는 그 ‘리얼’을 보여 줌과 동시에 디지털 세상이 지닌 허구, 곧 디지털은 사실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척, 그 안에 담겨 있는 팩트들이 상당 부분 ‘해석이 필요한 진실’임을 나타내고 있다. 디지털 세상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며, 진짜가 아니라 진짜라고 믿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의 사이비 욕망이 만들어 내는 가상의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가정의 가치가 실제로는 많은 허점과 구멍을 지니고있다는 점이다. 진짜 가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성도 마찬가지이고 부성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훈련되고 쟁취되는 것이지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다들 무슨 말인가 할 것이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맞다 꼬시는 것이다. 영화를 보시라는 것이다. 결론을 밝힐 수는 없다. 다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해피 엔딩이어서 다행이라는 점 정도이다. 그러나 모르겠다. 실제 삶은 꼭 해피 엔딩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서치 2’는 할리우드 영화이다. 할리우드는 해피 엔딩을 좋아한다. 감안해서 봐야 할 영화라는 얘기이다.
정치적 무관심이 영화적 무관심을 부른다. 이제 아무도 영화’판’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무리 코로나19 탓이었다 해도 이제 극장가를 두고 수직계열화 문제니 스크린독과점 문제니 등등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특히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그렇다. ‘범죄도시3’가 개봉 초기 전국 2352개 스크린에 걸린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전국 스크린 수는 2700개 아래 수준이다. 그동안 돈을 못벌었으니, 뭣보다 극장가가 망하게 생겼으니, 한 영화만이라도 돈을 좀 번다는데 뭐 그리 잘못이겠느냐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적어도 생각을 해야 한다. ‘범죄3’가 그렇게 시장을 싹쓸이 하고 있을 때 지난 해 베를린영화제와 런던비평가협회에서 상을 탔으며 올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작이었던 ‘말없는 소녀’는 전국 스크린 45개에 불과한 것에 대해 생각을 좀 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아무 것도 기대할 게 없는 정권이고 세상이라고 한다. 영화 따위 어떻게 된다 한들 이제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이다. 심지어 정부가 영화진흥위원회를 지목해 혈세를 낭비했다며 곧 감사에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CJ등 주요 투자배급사에 대해 경찰이 관객수를 조직했다며 압수수색을 벌인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혹시 영화계 길들이기의 일환인 바, 지금의 정권이 영화계를 좌파의 온상으로 보는 편견의 소산 아니겠느냐는 일말의 의혹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래서 뭐 어쩌냐는 식이다. 세상 곳곳에 냉소와 조소가 판을 친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파고 그 뒤를 터는 것만이 흥미거리가 된 세상이다. 공정과 상식이라는 미명하에 특정인 몇몇의 인생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에 대해서도 재수없이 당했군,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양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언론인들, 기자들에게 얘기를 하면 돌아오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 그 문제는 아무도 모른다느니, 누구도 관심이 없는 것이라느니 하는 답변 뿐이다. 기사 조회 수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다들 먹고 사는 데 바쁜데 그런 기사를 쓴 들 눈길이야 주겠냐는 것이다. 아니 세상에. 기사를 써야 눈길을 주고 그 눈길이 더 큰 기사를 만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부산국제영화제 ‘사태’가 바로 그렇다. 한국 최고,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추앙하던 때는 다 잊은 듯 하다. 영화제를 둘러싸고 특정인에 의한 인사 전횡으로 사유화 논란이 치솟고 있음에도 부산 지역 외에서는 변변한 기사 하나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다가도 배우들이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조명을 받으며 개막식 레드 카펫을 걸어 가는 장면은 너도나도 실 시간으로 실어 나를 것이다. 세상이 그런 것이다. 그렇게 변한 것이다. 분명히 경고하는 바, 이런 식이라면 K-컨텐츠 붐은 향후 4~5년 안에 가라 앉을 것이다. 그건 홍콩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다. 홍콩영화계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정치적으로 미래비전을 잃으면서 그 빛이 꺼졌다. 일본은 자민당이라는 70년 철통 우파 독재가 영화를 잡아 먹었다. 이제 더 이상 구로사와 아키라와 같은 영광은 일본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정치적 무관심은 영화를 망가뜨린다. 영화적 상상력이 사라지면 사회의 역동성이 떨어진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자 어떤가. 또 그게 뭐 어쩌냐는 얘기냐는 식인가. 암울한 시대이다.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주의 감독인 스웨덴의 루벤 외스틀룬드가 칸에서 두번째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 ‘슬픔의 삼각형’은 제목이 주는 느낌처럼 슬프거나 혹은 그 반대로 재미있거나 유쾌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찝찝하고 불쾌하며 심지어 反 희망적이고(비관주의나 염세주의란 말은 너무 약하다.) 우울해지는 작품이다. 물론 너무나 신랄하고 조소가 가득해서 반어적 의미에서 재미와 흥미가 가득 찬 작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지난해 칸 영화제가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대신(감독상) 이 작품을 선택했는 가를 일응 수긍할 수 있게 한다. 칸은 두 가지 갈래에서 감독의 손을 들어 주곤 하는데 ‘매우 사회정치적인 작품이거나 아니면 매우 예술적인 작품이거나’이다. 외스틀룬드의 영화는 매우 사회적 리얼리티가 강한 작품이다. 이 세상을 묘사해 낸 내용들이 너무 적확해서 거꾸로 내용 하나하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칸 심사위원들은 지금 세상에 이런 영화가 필요하다고 봤을 것이다.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 세상에 대한 뛰어난 분석서이며 일종의 新 자본론이다. 아마도 마르크스가 봤다면 박장대소하고 웃으면서도 동시에 세상이 자신의 말이나 예언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어서(자본주의는 망하지 않으니까) 소리 내어 울지도 모를 영화이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을 소개하기 어렵지만 세상은 도돌이표처럼 처음으로 돌아간다. 뒤집어진 계급관계는 또다시 뒤집어질 것임을, 원래대로의 계급사회, 그것도 더욱 양극화된 사회로 돌아갈 것임을 보여 준다. 우리는 쳇바퀴 안의 다람쥐이다. 돌아갈 수 없다. 잠시 그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2억 5000만 달러짜리 초호화 크루즈에서 화장실 매니저였던 에비게일(돌리 드 레온)은 표류한 섬에서는 자신의 모시던 손님과 상사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다. 왠지 캄보디아의 학살자 폴 포트를 연상케 한다. 그녀는 자신만이 고기를 잡을 수 있고 불을 피울 수 있다는 이유로, 또 폭파된 요트에서 가져 온 프리첼 과자를 다량으로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구명정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부리기 시작한다. 지식인과 부자를 무조건 때려 잡으며 원시 공산제를 추구했던 폴 포트 정권의 미친 짓, 크메르 루즈의 광기를 서서히 내비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심지어 과자를 미끼로 모델 남자 칼(해리스 디킨스)의 몸을 탐하기 시작한다. 칼은 같은 모델로 (계약의 관계처럼 보이는) 애인인 아야(찰비 딘)의 분노와 묵인 하에 새로운 지배자 에비게일의 늙은 몸에 봉사를 하며 섬 생활을 이어 나간다. 같이 표류한 사람들은 칼의 매춘 행위를 지켜보며 조롱은 해도 비난하지 않는다. 도덕과 윤리는 생존보다 뒤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외스틀룬드의 이 영특한 자본주의 분석서는 모두 세 개의 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칼&아야’가 1부, ‘요트’가 2부, 3부는 ‘섬’이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발칙한 오프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칼을 포함한 패션모델 남자들의 오디션장에서 웃통을 다 벗고 모여서 테스트에 앞서 선배 급으로 보이는 게이 방송 진행자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다. 이 진행자는 예비 모델들을 모아 놓고 상반된 표정과 몸짓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하는데 이런 식이다. “자, 당신은 발렌시아가 모델이에요. 도도한 표정을 지어 주세요. 자 그러면 이번엔 H&M 모델이에요. 그냥 착하고 평범한, 왠지 해피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봐요. 자 모두 발렌시아가! 다시 H&M! 다시 발렌시아가! H&M!“ 남자 모델 모두들 그가 시키는 대로 표정을 바꿔 가며 연기를 한다. 인간은 돈과 명성 앞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징그럽고’ ‘귀엽게’ 묘사해 낸다.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모두 2부인 ‘요트’에 몰려 있다. 여기서 선장 토마스(우디 헤럴슨)와 러시아 부자 디미트리(즐라트코 버릭)는 뜬금없는 사상 논쟁을 벌인다. 토마스는 디미트리를 가리켜 러시아의 돼지 자본가라 부르고 디미트리는 토마스에게 미국 공산주의자라 하지만 선장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라 하는데 디미트리는 마스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기 때문에 그게 그거 아니냐고 되받아친다. ‘선장 토마스의 세상 현실 인식=감독 루벤 외스틀룬드의 세계관’은 토마스가 디미트리와 같이 떠들어 대는 술주정 대사 하나하나에 다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의 노트를 뒤적이며 이렇게 말한다. 디미트리는 그런 그에게 선내 마이크를 대 준다.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선장의 얘기를, 좋거나 싫거나, 귀 기울여 듣게 된다. 디미트리는 그런 그를 보며 ‘공산주의 나라에서는 항상 듣기만 해야 한다’고 비아냥 대지만 선장 토마스의 비판을 부인하지는 않는 표정이다.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 말콤 엑스, 존 F. 케네디 모두 미국정부가 죽였다. 미국은 민주적이고 정직하며 선한 타국의 지도자들을 죽였다. 칠레 베네주엘라 아르헨티나 페루 엘살바도로 니카라과 파나마 등등. 미국은 영국과 손을 잡고 중동을 망가뜨린 후 마음대로 국경을 그어 놓고 독재자를 앉혔다. 미국의 가장 돈 되는 사업은 바로 전쟁이다. 1918년 유진 뎁스의 말대로 전쟁은 정복과 약탈의 수단으로 사용돼 왔다. 지배계급이 전쟁을 선포하면 피지배계급은 나가서 싸운다. 지배층은 당신이 전쟁에 나가서 도살되는 게 애국이라 주입해 왔다.” 요트 밖 바다는 엄청난 풍랑이 이는 중이다. 요트 안은 한마디로 뒤집어진 상태다. 사람들, 곧 온갖 명품과 보석으로 치장한 최고의 부르주아들은 모두들 뱃멀미로 토하고 난리가 아니다. 선장이 마련한 파티에서 최고급 음식을 먹는 과정도 흥미롭다. 사람들은 초면에 인사를 나누는데 어느 점잖은 척하는 노부부는 자신들이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수류탄 장사꾼이다. 디미트리는 자신을 똥팔이라고 부른다. 돼지 똥을 팔기 시작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비료 장사로 일확천금을 벌었기 때문이다. 디미트리는 이 선상 파티에 아내와 젊고 풍만한 정부(情婦)를 함께 데려왔지만 정작 두 여자는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돈이 있으니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디미트리의 늙은 아내(선니이 머레스)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오물을 토하는데 남편이 선장과 술을 마시며 정치적 논쟁을 벌이느라 노닥거리는 상황에서 혼자 거의 벌거벗은 채 객실의 화장실을 뒹굴며 구토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녀의 변기는 결국 똥물로 넘치기 시작하며 비싼 카펫이 깔려 있는 선내 파티 룸에 똥물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이 마시던 고급 샴페인 모엣 샹동이 똥물 사이로 떠다닌다. 자본가는 디미트리 마냥 똥팔이이며 자본주의는 현재 똥물로 넘쳐나고 있음을 풍자한다. 미국의 공산주의자, 아니 마르크스주의자인 선장 토마스도 자신을 가리켜 ‘개똥 같은 사회주의자’라고 비아냥댄다. 왜냐하면 그저 자신이 하는 일이라곤 개똥철학만 나불대기 때문이다.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이 늘 하는 일이 그것인 것처럼. 3부인 ‘섬’ 부분은 조금 줄였으면 좋았을 법 하다. 명백히 1974년, 리나 베르트뮬러가 만든 ‘귀부인과 승무원(한국 비디오 제목 ‘무인도의 열정’)’과 그 리메이크작인 가이 리치 감독, 마돈나 주연의 2002년작 ‘스웹트 어웨이’를 벤치마킹한 내용 이자 확장판이기 때문이다. 3부를 조금 줄였으면 오히려 간결미가 돋보였을 것이다. 감독이 워낙 할 말이 많았던 듯이 보인다. 그 많은 수다 중에 감독이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는 여기에 담겨져 있다. 다시 선장 토마스를 통해서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풍요 속에서 헤엄칠 때 세계는 빈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어. 너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맞다 그러는 거 아니다. 착잡한지고. 아주아주 착잡한 일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