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전력난이 예상된 12∼14일에는 국민과 산업계, 관공서의 헌신적인 절전 노력에 힘입어 전력수급 위기를 모면했다. 관계 당국은 고비를 무사히 넘김으로써 한숨을 돌렸다. 특히 15일 광복절에 이은 주말이 계속되는 데다 다음 주에는 폭염이 한풀 꺾일 것으로 예상되면서 수급 사정이 다소 나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번 전력난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의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국가위기 대응 자세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사상 유례없는 전력난으로 산업체와 유통업체, 공공기관 등의 냉방기 가동은 중단됐다. 특히 관공서 사무실은 체온과 컴퓨터 열기로 온도가 32~34도를 오르내려 찜질방이나 다름없었다. 사무실은 냉방기는 물론 전등마저 꺼버려 공문서는 물론 컴퓨터 자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굴처럼 컴컴했다.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생산라인의 가동이 멈췄고, 에어컨이 꺼진 직원 휴게실은 한증막이었다. 정부의 읍소와 지시에 따라 절전에 동참하면서도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이 들끓었다. 중·장기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위기의식을 조장시켜 국민 희생만을 강요하는 정부… 비판과 반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번 청소년해외봉사캠프를 본인이 원해서 참여하게 된 학생은 손을 들어 보라 했더니 아무도 없었다. 지난 7월 30일 수원의 중·고생 34명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캄보디아 씨엠립주의 빈민 초등학교와 무료급식소, 고아원 등으로 6박8일의 해외자원봉사를 떠나는 날의 버스 속 분위기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캄보디아 씨엠립주는 수도 프놈펜 다음으로 큰 주(州)로 세계문화유산 ‘앙코르와트’가 있는 관광수입을 주로 하는 도시이자 동양 최대의 ‘돈레샵’ 호수에서 어업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낙후된 지역이다. 수원시는 2007년부터 씨엠립주의 ‘프놈끄라옴’이라는 빈민촌에 초·중학교 신축과 마을회관 건립, 마을우물을 여러 군데 설치한 바 있어 상호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으로, 이번 ‘프놈끄라옴 수원마을’을 학생들이 해외봉사로 방문하는 것 역시 연례행사다. 우리나라 중·고생 누구나 그렇듯 여름방학이면 평소 부진한 과목의 보충을 위해 학원을 가거나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로 바다나 계
봉사 단체 증가 협조 체계 필요 조직 일원화·프로그램 다양화 市 자원봉사자 2만7천여명 활약 공연·집수리 등 7700여건 실적 ‘1인 1재능나눔’ 9천명 참여 활발 기업인協·중견기업 봉사단 구성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앞장 행정 도우미 양성 공공기관 활동 ‘자원봉사 아카데미’ 전문성 강화 봉사자에 할인가맹점 이용 등 혜택 희생 아닌 기쁨으로 인식 변화 ‘작은 나눔 큰 기쁨’ 가치 실현 양주시 자원봉사센터 활약상 양주시 자원봉사센터는 행정만으로는 충족할 수 없는 세부적인 복지서비스와 체계적인 자원봉사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현재 시 자원봉사센터는 기존 사무국장 체제로 운영해 오던 센터를 올해 1월 센터소장을 신규 채용해 조직체계를 정비하고 다양한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운영, 지역사회에 이바지 하고 있다. 양주시 자원봉사 현황을 보면 6월 말 등록 자원봉사자 2만7천여명에 누적 봉사활동 12만7천 시간이다. 자원봉사활동을 체계적으로 통합·관리해 작은 나눔으로 큰 행복을 주는 ‘양주시자원봉사센터&rsq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어딜 가나 손에 검정색 작은 물건을 들고 다닌다. 지갑처럼 보이기도 하고 메모수첩 같기도 하지만 블랙베리라는 휴대전화다. 그리고 대통령이 사용한다고 해서 오바마폰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블랙베리는 보안이 생명인 대통령이 맘 놓고 쓸 만큼 대단한 스마트폰이었다. ‘쿼티’ 자판도 특별했고, 미 육군 등 군사·정보파트가 애용할 만큼 보안성도 뛰어났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 월스트리트 등 금융계, 대기업 근무자들은 물론 중소기업에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비즈니스계의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한때는 업무용 스마트폰 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1위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최소한 2007년 애플의 아이폰이 나오기 전까지 그랬다. 스마트폰의 원조라 불리는 블랙베리가 두 손을 들었다. 애플에 밀리고, 삼성전자에 치이면서 걷잡을 수 없는 추락을 거듭하더니 마침내 매물로 나오게 된 것이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모토로라를 비롯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 업체였던 노키아의 몰락 이후 글로벌 시장 돌풍주역의 세 번째 쓰러짐이다. 20년 휴대전화 왕국인 노키아가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3년이었고, 블랙베리는 갤럭시와 아이폰…
연이은 폭염에도 광복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요즈음 들어 부쩍 심해진 일본의 극우행보는 순국선열을 기리는 우리에게 찬물을 끼얹고 있다. 고위 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위안부 강제동원 부인, 침략 사실 자체도 부정하려 들며 평화헌법까지 고치겠다고 법석이다. 굳이 고치지 않더라도 외국의 침입은 자위대가 방어할 수 있다. 헌법을 개정하여 다시 침략자가 되겠다는 이야기인가? 피해자로 깊은 상흔을 가진, 이웃나라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20여 년간의 불황과 원전사고 등으로 무력감에 빠진 일본이 제국주의 향수에 빠져드는 모양이다.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행위는 국제사회의 고립을 자처할 뿐이다. 왜, 문명국답게 진심어린 사죄로 과거를 털어 버리고 이웃들과 진정한 협력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지? 해방이 된 지 70여년이 지났지만 일본의 진정한 사죄는커녕 연이은 망언과 독도 도발로 우리는 아직도 일제에 대한 한(恨)을 지우지도, 그 잔재를 청산하지도 못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36년은 우리민족에게 엄청난 영향력과 함께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들은 우리민족의 존재를 부정, 우리문화를 말살시키고 모든 분야 구석구석까지 일본문화를 심어 넣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의 자살률은 OECD 국가 1위를 차지할 만큼 급격하게 높아졌습니다. 유명 연예인, 명문대학교 학생, 입시에 시달린 고등학생 등 젊은이들의 자살도 충격적이지만, 노인자살률도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스스로 숙고하고 결단한 자기 생명의 자발적인 제거라는 의미의 자살은 종교사에서 매우 다양하게 평가를 받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살은 신에 대한 죄이며, 벌 받을 행동으로 판단합니다. 까닭은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거둘 권리 역시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법에 따르면 자살을 기도한 것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었으며, 자살자의 교회 예식에 따른 장례식은 거부되었습니다.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지만(생활고, 병고, 비관, 염세, 가정불화, 양심의 가책, 결백의 주장, 배신감, 실연 혹은 자발적 안락사 등), 자살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살한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한 사람은 이미 자살을 통하여 윤리적으로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거운 상처를 주고, 신과의 관계에서는 구원의 은총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적 인간, 특히 신앙인이 취할 마지막…
눈동자 그 눈동자 /박이화 이 들면 언제나 저 아득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꿈처럼 사랑하고 죽어 간 어떤 별들의 생애가 나타난다. 사천 년 전 해질 무렵 떠나와 이제사 내 가슴에 닿는 저 푸르고 슬픈 광년 그때도 나는 지금처럼 울먹였겠지 캄캄한 밤하늘에 그렁그렁 고이는 별빛을 바라보며 이제 머잖아 내 생애도 흘러가고 나는 또 끝없는 윤회의 궤도 속으로 별처럼 핑그르 떠돌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앞으로 이천 년도 내게는 꿈같이 찰나에 그쳐 나는 다시 저 쏟아질 듯 글썽이는 별들의 약속대로 당신을 만나리라는 것도 박이화 시집 <흐드러지다>에서 우주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너무 크고, 너무 멀고, 너무 깊어서, 우주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인류가 멸망하는 날까지 제아무리 연구를 해봐도 결코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왜소한 존재이다. 너무 작고, 너무 얕아서, 존재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크기로 우주와 나를 비교하게 되면 결과는 뻔해진다. 거리와 깊이로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우주를 이해하려면 외형적이거나 시각적이거나 물리적인 방법에서 떠나야 한다. 우주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역할이라도 과연 있는 것일까. 나에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첫사랑은 있다. 필자도 사십 년이 지난 일을 문득문득 기억하게 된다. 필자의 고향 해남의 바닷가는 사라진 지 오래다. 만수가 차면 바닷물이 필자의 집 마당을 채웠고, 벗어놓은 신발들이 바다로 떠내려가곤 했다. 문저리와 낙지를 잡은 작은 목선은 마당 앞까지 들어와 만수까지는 바다로 다시 나가지 못하고 마당을 지켰다. 그을린 소금과 염분들이 떠나지 않았던 고향집, 목포에서 유학 생활을 한 필자는 주일만 되면 한 시간 반가량 목선 백마호 혹은 조양호를 타고 목포 앞바다를 건너 상공리 부두에 내려 다시 40분간 황톳길을 달려 산이면 덕호리에 하차했다. 늦은 밤, 산비탈을 몇 개 지나 이름 모를 묘지 앞을 불빛 하나만 바라보고 희미한 위로를 받으며 걷다 보면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는 너무 어렸기에 첫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 그때가 첫사랑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된 것은 성년이 되어도 기억에 떠나지 않은 추억을 감지하고 나서야 그랬다. 동네어귀를 지나 친구네 집 앞을 서성이다 아침까지 기다린 적도 있고, 밤새워 모랫길 언덕배기에 바람을 등지고 서 있던 적도 있었고, 용남샘과 그루터기 나무도 첫사랑의 공간이었다. 추석과
올해 어르신들과 일할 기회가 많아서인지 윗세대들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올해 초, 몇 분의 농업분야 은퇴 교수님들과 해외원조 사업에 동참하여 파키스탄에서 일주일 정도 함께 지낸 적이 있다. 하루는 일행 중 몇 분이 먼저 귀국하게 되어 귀국 전날 한 사람씩 얘기나 노래를 하며 환송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 저녁을 잊지 못하는데, 그 중 연세가 가장 많으셨던 어느 교수님 때문이다. 그 분은 칠순 후반의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장하셨고, 사람의 중심에서 나오는 건강하고 올곧은 힘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귀국 전날인 그 날도 현지인의 농업기술 교육에 쓸 비닐하우스 짓는 일을 온종일 마무리 하고, 검게 탄 농부의 모습으로 저녁 식사에 나타나셨다. 그 분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우리에게 어떤 문건을 하나씩 나누어 주셨는데, 1919년에 작성된 기미독립선언서의 복사본이었다. 그 분은 독립선언서 전문을 외워보겠다고 하시곤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암송하기 시작하였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과연 그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