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근원.’ 여성의 하체를 노골적으로 그린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걸작이다. 너무도 사실적인 이 그림은 오랜동안 초록색 실크 베일 뒤에 숨어 있었다. 세간을 놀라게 한 스캔들의 화가 쿠르베. 그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중 가장 파워풀했다. 프랑슈 콩테 오르낭(Ornans)의 지주 아들로 태어난 쿠르베. 딸 부잣집의 장남이었던 그는 유년기 아버지의 농장에서 소를 치고 농사를 직접 지었다. 동네에 나가 산사람들과 사냥꾼, 어부, 나무꾼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가 미술을 시작한 건 초등학교 시절. 이 생활은 브장송 왕립학교에 입학해서도 계속됐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공학도가 되길 원했다. 뜻을 거역하지 못한 그는 공과대학 입학시험을 쳤다. 그러나 낙방했다. 진로를 바꿔 스무 살이 되던 해 법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로 상경했다. 그러나 법 공부대신 매일 그림만 그렸다. 자식 앞에 장사 없다던가! 결국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자기 길을 가도록 허락했고, 발 벗고 나서서 지원해 줬다. 너무도 자유분방했던 이 화가는 학교 대신 루브르 박물관을 좋아했다. 매일 거기에 나가 거장들의 그림을 복사해 연습했다. 쿠르베는 스무 살 때부
지난 추석 명절을 혼자 세상과 단절되어 보낸 분들은 얼마나 될까. 한국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겠지만 일본의 경우 홀로 지내는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남성은 60%, 여성은 30%가 명절 동안 혼자 지냈다고 한다. 혼자 사는 생활방식이 나이 들어 혼자 사는 것을 불행한 인생으로 여기는 등의 편견이 붙는 고독한 삶이 아니라, 가족들과 동거할 때보다 행복지수가 더 높을 수 있다. 하지만 혼자 사는 행복한 노후를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요양 시설이 아닌 내 집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가족 이외의 친구나 지인들과 소통과 교류도 꾸준해야 한다. 둘째는 장기요양보험 등 돌봄 제도를 통한 지원과 미리 마련해둔 노후자금도 필요하다. 이를 통해 요양 시설보다 나은 삶이 가능해지고, 시간이 지나 스스로의 선택권이 아닌 타인의 결정에 의해 언제든 요양 시설로 옮겨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도 있다. 요양복지 실현 과정에서 맨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이슈 가운데 하나로 욕창 관리가 있다. 최근에, 1cm 수준으로 욕창 관리를 받아온 요양환자가 폐렴, 당뇨 등 합병증으로 종합병원 중환자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 유해한 것을 자랑한다. 즉 권력과 부귀가 그것이다. 어디를 찾아봐도 어떤 점에서든 자신보다 더 나쁜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는 악한 자, 따라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악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칠 수 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현명한 가르침을 듣자마자 남에게 그것을 가르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섭취한 음식을 이내 토해내는 병든 위장과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 귀로 섭취한 마음의 양식을 자신의 내부에서 잘 씹고 소화하기 전까지는 성급하게 토해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누구의 마음에도 양식이 되지 않는 오물이 나올 뿐이다. (에픽테토스)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의식하는 것은 결코 교만이 아니다. 교만한 마음은 세속적인 성공에 비례해 커지지만 인간적 존엄성의 의식은 그 반대로, 세속적으로 냉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증대한
목에 떨어졌다. 절묘한 추락이다. 콩알만 할까. 옷깃을 피해 떨어진 빗방울이 눈물 되어 목을 타고 흐른다. 가을을 견뎌낸 것들은 모두가 이 모양이다. 하물며 영글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들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목을 타고 흐르던 것이 체온과 하나가 된다. 36.5°C로 데워진 빗방울은 더 이상 빗방울이 아니다. 마당에 떨어지는 가을비에 눈길이 멈춘다. 뭉클 피어오르는 흙먼지 따라 가을이 남긴 마지막 냄새가 부서진다. 가는 님을 붙드는 눈물바람이 저러할까. 볼수록, 세상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시절이든 인연이든 운명이든 마찬가지다. 마침내,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고야 만다. 불평하지는 말기로 하자. 우쭐이나 거만에도 유통기한은 있어서, 끝 가는 데 없이 거들먹거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생각할수록 다행한 일이 아닌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본으로도 구매할 수 없는 세월이라니. 재생버튼을 누를 수 없는 늙음이라니. 다 쓰고 망가져 발밑으로 흩어짐이라니. 고치고 다시 쓸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사람은 한없이 평등하지 않는가. 연민이라거나 긍휼 같은 것도 어쩌면 자기만족일지 모른다. 내가 머물고 있는 ‘백련재…
국내 최대 규모 왕실 퍼레이드인 ‘정조대왕 능행차’가 지난 8~9일 서울~수원~화성 융건릉 구간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도 끝까지 진행됐다.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1795년(을묘년)에 진행한 대규모 행차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본격 추진되고 있다. 정조대왕은 24년의 재위기간 중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화성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총 13번의 원행을 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원행은 즉위 20년인 1795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맞아 8일간 행했던 대규모 행차 ‘을묘년 원행’이다. 2007년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1795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과 함께 서울 도성에서 화성 융건릉까지 59.2km를 행차했던 을묘원행 모습이 기록돼 있다. 당시 화성행궁에서 열린 어머니의 회갑연, 행차를 위해 한강에 설치한 배다리(주교舟橋), 6000명에 달하는 군사와 수행원, 말과 가마 등 1㎞가 넘는 능행차 행렬, 수원에서 거행한 문무과 별시 등 모든 내용을 그림과 함께 소상하게 볼 수 있다. 수원시는 심재덕 시장 임기 중인 19
스포츠 클럽 대회는 학생들의 건강과 체력증진을 위해 시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체육대회다. 코로나 전에는 체육 전담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피구 대회에 나가는 걸 인솔 교사로 따라간 적이 있다. 담임교사에게 대회 출전 여부를 묻는 경우는 없는 편이다. 올해는 담임체육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넷볼과 풋살하는 걸 체육 선생님께서 알고 계셨기에 혹시 풋살 대회에 참가할 생각이 있냐고 물으셨다. 신청할 때 풋살은 여자부만 있었기에 옆반 선생님과 상의 후 흔쾌히 참가하겠다고 답변드렸다. 처음에는 풋살 경기 참가 제한인원이 10명 뿐이라 걱정이었다. 6학년 여자 학생이 모두 합쳐 21명인데 누군가를 뽑아서 대회에 나가기가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나중에 참가 인원이 15명으로 바뀌었고 대회가 주말이라 당일에 일정이 있어서 참여하지 못하는 학생을 감안하면 모두가 연습에 참여해도 될 듯 했다. 그때부터 풋살 초보 탈출을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아이들에게 대회의 존재 여부를 알리고 운동의 즐거움으로 동기부여를 한 다음, 중간놀이 시간과 점심시간에 함께 풋살을 연습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대회만을 위한 연습은 아니고 수업시간에 풋살 리그전을 하겠다고 말했더니 여자아이들 대부분
최근 수도권의 전 기초자치단체장 2명이 법정구속 되었다. 민선 7기 성남시장 은수미 씨(민주당)와 민선 6기 용인시장 정찬민 씨(국민의힘)가 주인공인데 범죄혐의 공통분모는 뇌물수수다. 이들의 혐의를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기초자치단체장의 고질적인 병폐를 단적으로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수미 씨는 보도된 대로 지난달 16일 1심 재판(수원지법)에서 징역 2년 및 벌금 1000만원, 추징 467만원 형을 받고 법정 구속됐다. 은 씨가 받고 있는 범죄혐의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직권남용), 뇌물공여 및 수수, 청탁금지법 위반 등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은 씨는 자신의 정치자급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담당 경찰관 김 아무개 씨(구속)로부터 수사자료 일체를 넘겨받는 대가로 김 씨의 지인 업체에게 4억5000만원 규모의 공원 터널 교체공사를 허가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은 씨는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박 아무개 씨(구속)에게 돈과 고가의 와인 등을 수수한 혐의도 받고 있다. 심지어 은 씨는 경찰관 김 씨의 내연녀인 보건소 직원의 보직 부여라는 인사 청탁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은 씨의 뇌물 공여와 수수는 기초자치단체장의 인허가권, 인사 청탁은 인사권에
동물로서의 인간은 죽음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죽음을 모르고 따라서 죽음에 저항할 수도 죽음을 원할 수도 없다. 죽음에 대한 관념이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야 할 영향을 주지 않고 있는 까닭은, 우리는 행동적인 존재로서의 본성으로 인해, 실은 결코 죽음을 생각해서는 안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에는 죽음과 상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이성을 흐리게 하고, 죽음의 불가피성에 의심을 품게 하려는 막연한 희망이 끝까지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생명은 악착같이 열심히 살고자 한다. 그것은 우화 속의 앵무새처럼 목이 졸려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뭘, 괜찮아, 이까짓 것!” 하고 되풀이 한다. (아미엘) 죽음의 순간, 영적 본원은 육체를 떠나지만, 육체를 떠남과 동시에 시공을 초월한 모든 본원과 합치하는지, 아니면 다른 유한한 존재 속으로 옮아가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죽은 뒤에 육체는 자기를 길러왔던 것에게 버림받고 단순한 대상이 된다는 것뿐이다. 죽음은 의식하는 대상의 변화 또는 소멸이다. 연극의 막이 바뀌었다고 해서 손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