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두 마리가 뒤뚱뒤뚱 길을 간다. 거리를 두고 뒤에 따라가던 오리가 멈추면 앞서가던 오리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어떻게 알았는지 동시에 멈추어 선다. 멀찍이 따로 서서 먼산을 보다가 앞쪽 오리가 출발하면 뒤쪽 오리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얼른 고개를 돌려 앞 오리를 따라 걷는다. 가축은 주인을 닮는다던데 덕기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운 오리가 분명하다.
국내 100대 기업의 사내 유보금이 지난해 1000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대외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데다가 고유가·고금리·고물가로 인해 투자 발굴과 사업 육성이 쉽지 않다는 명징한 반증이다. 위기의 수준을 가늠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악화하고 있는 경제환경 속에서 기업들이 투자처를 찾지 못해 사내 유보금을 쌓아두는 현상은 또 다른 위험 요소다. 기업의 투자 의욕을 폭발시킬 수 있는 과감한 투자 유인책을 써야 할 시점이 됐다. 더불어민주당 홍성국 의원이 국회 예산정책처에 의뢰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100대 기업 사내 유보금(자본잉여금+이익잉여금)은 2012년 630조 원에서 작년 1025조 원으로 불어났다. 10년간 무려 395조 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10대 기업으로 범위를 좁히면 사내 유보금은 같은 기간 260조 원에서 448조 원으로 188조 원이 늘었다. 같은 기간 사내 유보금 연평균 증가율은 5.5%였으나, 매출액 연평균 증가율은 절반에 가까운 2.3%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매출액 대비 사내 유보금 비율을 뜻하는 ‘유보율’은 2012년 46.7%에서 2021년 62.0%로 증가했다. 재투자를 망설이면서 번 돈을 재무적으로 쌓아두는 방향
어리석은 바보, 미치광이 천치... 병 이름 ‘치매’의 한자 癡(치)와 呆(매)의 뜻을 합친 이름이다. 사전은 ‘뇌세포 손상 따위로 인해 지능 의지 기억 등이 지속적 본질적으로 상실(喪失)되는 병으로 주로 노인에게 나타난다.’고 풀이한다. 한자 해석하니, 욕설 아닌가? 불가항력, 어쩔 수 없는 것이 병이다. ‘너’도 ‘나’도 걸릴 수 있는 안타까운 병 ‘치매’도 그렇다. ‘어리석다’거나 ‘미치광이’라는 말이 붙은 ‘바보’라는 명칭, 참 슬프고 어리석다. ‘기왕에 병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니’하고 혀 몇 번 차고 말 일 아니다. ‘한가위 명절에 치매 어르신 잘 보살피자.’는 TV 프로그램 자막 보며 가슴 아팠다. ‘미치광이 바보 어르신’이라니. ‘지랄’을 이제 병명으로 안 부른다. 대신 간질(癎疾)이다. 문둥병도 ‘문둥이’란 말의 실존 때문에 나병(癩病) 한센병으로 부른다. 전염병(傳染病)의 이름에 든 ‘염병’도 병을 빙자한 욕설로 쓰인다하여 피하는 말이다. 배려이기도 하겠다. 癡呆는 痴呆로도 쓴다. 癡나 痴는 같은 뜻이다. 질병의 대표 기호(글자)와도 같은 녁(疒)자와 의심의 疑나 지식의 知가 합쳤다. 의심하는 병, 아는 것의 병이라는 뜻에서 ‘치’는 어리석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시작한 인류의 진화는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호모 사피엔스까지 왔다. 현생 인류를 지칭하는 별명으로는 호모 루덴스, 호모 데우스, 호모 이코노미쿠스 등이 있다. 호모 데우스는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지어낸 이름으로 인류가 생명공학의 발달에 힘입어 노화와 죽음에서 해방돼 불멸과 신성과 행복을 구현한 미래의 상태를 예견하는 이름이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인간을 완벽하게 이성적인 존재로 설정한 현대경제학에 대비해 경제주체의 비이성적 감정적 심리를 부각시킨 이름이다. 호모 일렉트리쿠스는 필자가 새로 지어낸 이름으로 처음 선을 보인다. 아이디어의 원천은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의 통찰에 있다. 매클루언은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미디어라는 것. 매스 미디어 시대의 메시지 효과 이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외계어를 대하는 양 낯설 것이다. 생각해보자. 지난 10년 사이에 세상을 뒤집어놓은 것은 스마트폰이라는 미디어인가, 콘텐츠인가? 대답은 자명하다. 기차나 자동차, 비행기 등이 무엇을 실어 나르는가에 관계없이 세상을 변화시킨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들은 운송
수고로운 열매로 가득한 10월, 개천절을 보내며 모든 산맥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려도 차마 범하지 못한 곳이라는 이육사의 시 ‘광야’를 읽는다. 하늘이 처음 열리고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 천고(千古)의 뒤에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에게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는 광야를 상상한다. 최초의 민족국가 단군이 있었고 컴퓨터에 한글을 쓰는 오늘날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다. 남쪽에서 하늘이 열린 10월 3일을 개천절로 기념한다. 북쪽에서는 단군신화를 인정하지 않다가 1980년대부터 관심을 가지었다. 구전으로 전해지던 단군릉을 1994년 개건하면서 실존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핵문제로 준전시상태까지 갔던 불안한 시기를 감안하면 진위여부를 떠나 국가존립에 민족을 내세운 정치의 연속이다. 남쪽에서 한글날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세종 28년(1446년)을 양력으로 환산해서 10월 9일로 기념한다. 북쪽은 훈민정음 창제된 날인 세종 25년(1443년) 음력 12월을 양력으로 환산해 1월 15일 훈민정음 창제일로 정했다. 남북은 단군을 민족국가의 시조로 인정하고 한글을 사용하면서 선조의 업적을 기리고 있지만 인식에는 차이가 있다. 임산부의 날인 10월 10일 북쪽은 ‘조선로동당창
진정한 현자는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의심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수고와 탐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자신이 지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알려면 사람은 많이 배워야 한다. (몽테뉴) 모르는 것을 남에게 묻는 것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말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언제나 진실을 말하라. 학문을 배우고도 그것을 실제로 적용하지 않는 사람은 모처럼 밭을 갈아 놓고 씨앗을 뿌리지 않는 사람과 같다. (아라비아의 아르비테스) 철학이나 자연과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보통 사람들이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단순히 그럴 수도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리히텐베르크)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그리고 악한 일은 어떤 종류이든지 멀리하십시오. (데살로니카전서 5장 21절) 우리의 영혼에는 양식이 부족한 일이 없다. 그것을 자기 몸에 섭취하는 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과거에 존재했고 또 앞으로 존재할 모든 요소는 육적, 지적, 정신적인 모습으로 지금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요소들을 지배하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잠시도 멈춘 적이 없는 여야 정치권의 ‘무한 정쟁’ 형국이 갈수록 태산이다. 도무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집권당이나 정치를 사뭇 전쟁터로 몰아가는 다수 야당의 무책임한 정치행태가 가뜩이나 깊어지는 국민 불안을 하염없이 덧내고 있다. 고환율·고물가·고금리 등 3고(高) 경제위기 쓰나미 앞에서 숨넘어가고 있는 가계와 기업들의 애환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실종된 정치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는 정치·경제·사회·안보 등 전 분야에 있어서 복잡한 난제들이 동시다발로 불거지는 총체적 난국으로 몰려가고 있다. 특히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는 평마저 나오는 세계 경제 회오리의 여파로 민생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울한 시련 속으로 빠져드는 중이다. 각자도생의 처절한 수난 속에서 아시아에서 제2의 외환위기가 올 것이라는 경고마저 등장해 대외의존도가 유난히 높은 한국 경제에 공포의 그늘마저 감돈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의 2분기 재고자산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0%나 늘어난 106조 원을 넘었다. 총부채도 동기 대비 10% 늘어난 같은 기간 588조 원으로 증가했다. 증시가 얼어붙으면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이상 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는 진리와 선을 아는 소수의 철학자가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함으로써 시민의 대표자 다수가 정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정치인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는 듯한 막말과 저급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고 있다. 사실, 정치인의 막말과 시정잡배 같은 행태는 종종 목격되었으며 이로 인해 시민들은 정치 자체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를 경험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았으며 다음 선거를 기다린 후 투표를 통해 개인의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 유권자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의사 표시였다. 이쯤에서, 이러한 정치무관심과 혐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할까라는 환원론적 관심이 생겨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인의 대부분은 좋은 학벌과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한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훌륭한 사람들이 정치를 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무관심과 불신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러한 명제를 바꾸어 생각해보면 명석한 두뇌와 훌륭한 학벌은 좋은 정치인의 덕목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