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는 강렬한 시가 있다. 이름난 시인의 시도 아니고 레토릭이 멋진 것도 아니다. 그 시는 아주 평범한 한 사람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을 담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지인과 그의 어머님을 모신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작은 유리문 너머 하얀 단지에 적힌 글이 내 눈에 크게 들어왔다. ‘그곳에서는 발을 편히 피고 쉬시라.’ 하얀 단지에는 어머니를 향한 자식의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시가 되어 박혀있었다. 그 시를 읽으면서 얼굴을 직접 뵌 적이 없지만 ‘참 좋은 어머니였구나!’에 생각이 미쳤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분처럼 느껴졌고 한 쪽 마음이 아려왔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구인지 지인에게 물어보니 뜻밖에도 본인 글이라 했다. 이 사람은 평소에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마치 로봇같은 사람이다. 이 사람이 시를 쓸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아주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멋진 시를 쓰다니 놀라웠다. 플라톤이 말했던가?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내며 써내려간 극히 개인적인 추모의 글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마지막 편지’가 됐다. 나는 팝가수 중 아델을 좋아한다. 자신의 사랑 경험을 노래로 만드
인류 역사와 운명을 같이 해온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엇 일까? 아마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천재지변 등 자연현상에서 신의 존재를 느끼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고대부터 신이 사는 성스런 공간과 인간이 사는 세속의 공간을 구분해놓고 살았다. 그리고 신에게 의지하며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성스러운 공간에 대한 관념은 현대에서도 계속 이어져 교회와 성당 등 종교시설로 남겨져 있고 개념상 과거의 신전처럼 성역화 되어 있다. 지금도 그곳에서 사람들은 기적을 간구(干求)하며 끊임없이 신에게 기도하고 예배와 미사를 드린다. 그중 기독교의 신앙은 기적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적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가 성립되지 않아서다. 모세의 기적과 바울의 기적 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천주교는 좀 다르다. 특히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에서는 기적 현상을 엄격하게 다룬다. 세계 각국에서 특이 현상을 기적으로 인정해달라는 신청이 모여들지만 공식적인 기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기적 인정 심사도 신학자와 법률가, 역사학자, 의학자 등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모여 엄격하게 진행한
2008년에 숭례문 방화사건으로 5시간 만에 석축을 제외한 대부분이 소실됐다. 소방당국은 정확한 발화지점을 못 찾고 초기진압에 실패했다. 한옥은 목재를 끼워 맞춰 짓는 방식이라 초동에 해체했다면 원상복구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방당국과 문화재청은 업무 분장만 따지다가 골든타임을 놓쳤다. 당시 문화재청장은 “파괴돼도 좋으니 진화하라”고 했다지만, 실측도면이 소방당국에 전해진 것은 화재발생 2시간 후였다. 모든 재난은 초동대처가 중요하다. 신속하고 정확한 대처를 위해서는 현장과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위기관리능력을 시험하더니, 일본을 곤궁에 빠뜨리고, 이제 우리나라를 국제뉴스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이란과 이탈리아에서도 확산을 거듭하고 있어 사태의 끝이 안 보인다. 백신과 치료제가 없고, 전파력이나 치사율을 알 수 없어 사람들의 공포심이 극에 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각국의 대처방식을 보면 그 정부의 성격을 읽어낼 수 있다. 한중일 세 나라 모두 정치논리로 초동대처에 실패 한중일 삼국은 모두 초동대처에 실패했다. 중국은 국가적 정치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앞두고 있어 사태의 축소에 급급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 중에 흔히 쓰는 말이 ‘죽겠다’는 소리다. 아프면 아파서 죽겠다, 좋으면 좋아서 죽겠다. 웃기면 웃겨서 죽겠다, 심심하면 심심해서 죽겠다. 배부르면 배 터져서 죽겠다, 성질나면 화가 나서 죽겠다. 일이 뜻대로 안 되면 ‘그냥 콱 죽어버리겠다.’ 이래도 죽겠다, 저래도 죽겠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말 스스로 죽는 사람도 있다. 세상천지 만물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 지인 중에 한 무명작가가 있었다. 그는 평생 글을 써서 발표했지만 이렇다 할 작품 하나 남기지 못했다. 남들 다 타는 문학상 하나도 받지 못한 지질히도 문(文)복이 없을뿐더러 가난하기도 이를 데 없었다. 그는 결국 죽기로 작정을 했다. 한데, 막상 죽으려니 죽을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어느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살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여. 그래서 그만 죽기로 작정을 했네.” 전화를 받은 시인이 흔쾌히 응답했다. “그 참 좋은 생각이네. 솔직히 자네 같은 어벙이 무명작가는 죽는 게 나아. 어디서 어떻게 죽기로 했나?” “그냥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기로 했네.” “이 겨울에? 얼음이 얼어 제대
‘가족’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기초 집단이다. 고대로부터 이어지면서 형태가 시대에 따라 변하긴 했지만 부부와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다는 정의는 변함없다. 하지만 언제 부턴가 가족의 의미가 급격하게 달라졌다. 1인가구가 크게 늘어나면서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가구의 비율은 2000년 15.5%에 불과했지만 2018년에는 29.2%로, 20년도 채 되지 않아 13.7%p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2019년 1인가구의 수는 600만 명에 육박하며 증가 추세를 보였다. 이는 전체 가구 중 30%에 달하는 수준이다. 여성 1인가구는 더 늘었다. 291만 4천가구로, 전체 1인가구 중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20년 전보다는 무려 128.7% 증가한 수치다. 이 가운데 ‘65세 이상’ 1인 가구가 전체의 25%가량을 차지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2.4%가 이웃과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살고, 가족이 한 명도 없는 노인이 7%, 있어도 한 달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는 경우가 24%, 이웃과도 연락하지 않는 노인이 40%나 됐다. 대부분 고독사가 상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몇 년 전만 해도 일주일 이상 지나서 발견되는 죽음이
코로나19로 인해 노인·아동 시설들이 임시 폐쇄됐다. 이에 따라 시설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들의 일자리도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낮은 임금과 처우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사회복지사들이 힘을 잃지 말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했으면 좋겠다. 아울러 이들에 대한 임금과 처우 개선도 필요하므로 정부와 정치권이 다함께 나서주길 기대한다. 4·15 총선을 앞두고 어느 예비후보가 제시한 공약에는 사회복지사들의 오랜 소망이 담겨 있어 관심을 끈다. ▲전국적인 단일임금체계 구축 ▲사회복지사 일자리 확대 ▲사회복지시설 종사자 3교대 근무제 정상화 ▲사회복지사 안전사고 대비 보험가입 지원 및 민·형사상 법률지원 등이다. 아울러 사회복지사의 보수와 복지포인트 수준을 공무원에 준하게 상향 조정하고 사회복지사의 처우개선과 신분보장을 강화할 수 있는 구조적 보완책을 마련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사회복지서비스의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 종사자의 임금과 처우를 개선하고 사회복지시설 인력지원 기준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한다. 한국사회복지협의회도 사회복지계 20개 기관·단체를
예상을 뛰어넘는 코로나19 확산세에 ‘의료 대란’ 우려가 갈수록 커진다. 중앙방역대책 본부에 따르면 전국의 음압병상은 793실에 1천77개뿐이다. 지금까지 발생한 환자 수와 비교해서도 턱없이 모자란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한 대구는 그 양상이 이미 의료대란 수준이다. 대구의 누적 확진자는 1천17명에 달했지만, 음압병상은 63개에 그친다. 격리병상 역시 넘쳐나는 환자 수를 따라가지 못한다. 대구시가 민간병원까지 끌어들여 급히 마련한 격리병상은 5개 병원에 783개다. 전체 확진자의 80%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구의료원 등지에 입원한 일반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내보내고 300여 병상을 추가로 확보할 계획이지만 급증하는 환자 수를 따라잡기 어려운 처지다. 의료인력 역시 태부족이다. 전국에서 지원한 공중보건의 등 250여명이 투입됐지만, 힘에 부치긴 마찬가지다. 신천지 교인에 대한 전수조사 중인 경기도 또한 방심할수 없다. 전문 인력이 부족해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대구시를 반면교사 삼아 대책마련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코로나19는 이제 방역상 봉쇄 위주의 초기 대응에서 벗어나 장기전에 대비할 때다. 첫째는 의료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위해 병실 이원
어느 마을에 큰돈을 번 부자(富者)가 살고 있었다. 그는 외동아들 하나를 두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이는 나이가 듦에 따라 버릇이 고약해졌다. 오직 자기만 알고 한번 고집을 부리면 성질을 꺾을 줄을 몰랐다. 그 위에 가난한 집 아이들을 함부로 때리고 없는 집 자식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아이의 나이 열일곱 살이 되었다. 부자는 그렇게 자라는 아들이 심히 염려가 되었다. 그는 어느 날 가까운 산에서 도를 닦고 있는 현자(賢者)를 찾아갔다. 그는 아들 얘기를 하면서 현자에게 당부를 했다. “부디 제 아들의 나쁜 버릇을 고쳐 주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현자가 부자에게 말했다. “내일 모레 내가 댁을 찾아가리다. 그때 그 아이를 보여주시오.” 부자(富者)는 그날 아이가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일부러 잡아두었다. 저녁나절 약속했던 현자가 내려왔다. 현자는 아이를 불러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뒤뜰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현자는 아이에게 지금 막 싹이 튼 한 식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손으로 저 나무를 뽑아 보아라.” 아이는 엄지와 검지 하나로 냉큼 어린나무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현자는 조금 큰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 나무를 뽑아 보렴.” 아이
칠흑같은 어둠이 지나면 동트는 신새벽은 반드시 온다. 엄동설한 살을 에이는 삭풍이 물러가면 아지랑이 모락 모락 피어 오르는 따사로운 봄날이오듯 우주 삼라 만상에서 시공의 역사는 끊임 없이 변화하는 변증법적 진리를 벗어날 수 없음이다. 비장하고 엄숙한 테제에서 인간 사유의 길은 곧 이분법적 이었다.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빛의 힘 생성과 소멸,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생과사,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좌와 우 등 수 많은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 지고 둘 가운데 하나는 다른 하나에 종속되어 버리는 명확한 이치다. 그리하여 이분법은 더욱 선명 해지는 법이며 이분법적 도식은 일직선상의 배율이다. 양극단에는 대립과 투쟁이 있고 이분법적 대립의 종말은 균열과 산산조각남 이었다. 부서져 미세한 원소가 되어 다시 한덩어리가 되는 순환적 질서에는 한량없는 영겁의 시간이 소요 될 뿐이다. 군부 독재 시절 그 시대를 풍미했던 절창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의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그러나 이제 군화발의 독재는 물러갔어도 또 다른 개량화된 독재가 자본의 굴레를 앞세워 인민을 압제하고 인민이 그토록 열망했던 어둠은 밀려났지
“오늘날 인류에게 가장 두려운 재난은 핵무기도 기후변화도 아닌, 전염성이 강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다. 핵전쟁이 발발할 확률은 국가 간 정치·외교적 이해관계 때문에 희박하지만, 독감처럼 퍼지는 신종 바이러스는 언제든지 수천만 명을 사망케 할 수 있다.” 빌 게이츠가 2015년부터 전염병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자주 한 말이다. 그런 그가 최근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전미과학진흥협회 행사에서도 코로나19에 대한 우려를 했다. “코로나19는 세계 보건에 심각한 위협”이라며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가 전염병 확산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다시 경고 한 것이다. 스티븐 호킹도 살아생전 인류가 직면한 위협으로 전염병 대유행을 자주 거론했다. 그러면서 “인류가 이를 피해 멸종을 면하려면 100년 내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이색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의사도, 병리학자도, 경제학자도 아닌 이들이 전염병을 인류 최대의 적으로 꼽는 이유는 치명적이라는 사실이다. 핵무기가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지만 바이러스는 상상이 불가해서다. 전염병이 핵 전쟁보다 재앙적이라 부르는 이유다. 실제 새로운 형태의 전염병은 지난 40년 사이 30번 넘게 등장, 우리를 공포와 재앙으로 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