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어느 날 네덜란드의 안경사 한스는 자신이 만든 렌즈 솜씨를 보기 위해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각각 한 개씩 들고 근처의 교회 탑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두 개의 렌즈를 조금 떼어서 보았더니 탑이 놀랄 만큼 크게 보였던 것이다. 그는 이를 이용, 1608년 인류 최초의 망원경을 만들었다. 같은 시기 갈릴레오도 망원경 개발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물체의 3배, 다음에는 30배 이상의 크기로 확대하여 볼 수 있게 만들어 천체를 관측했다. 이 망원경을 통해 달 표면의 산맥, 태양의 흑점, 금성의 변화 등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160여 년이 지난 1771년 뉴턴이 거울을 사용한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고 비슷한 시기 독일의 케플러는 대물렌즈와 접안렌즈 모두 볼록렌즈를 사용한 망원경을 만들어냈다. 광학혁명의 대명사로 획기적 발전을 거듭한 망원경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현재 세계에서 가동 중인 망원경 중에서 가장 큰 망원경은 남유럽 연합에서 칠레에 건설한 ‘VLT’이다. VLT란 Very Large Telescope의 약자로 말 그대로 아주 큰 망원경이란 뜻이다. 8.2m 반사 망원경을 무려 4개를 연동시켜 놓은 엄청나게 크기여서 과거와 격제지감 그자체다.…
어린 시절 용인 시골에 살면서 땅속의 보물을 캐는 일은 생존이자 즐거움이었다. 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캐는 일이 아닌 더덕이나 칡 등산에서 먹을 것을 캐내는 일이었다. 땅은 인간에게 수많은 보물을 준다. 고구마, 감자, 더덕, 칡, 연근, 땅콩, 무 등은 땅속에서 자라는 보물이다. 인생의 보물을 얻는 길은 또 무엇이 있을까. 보물 즉 ‘Treasure’는 봉사를 통해 얻게 되는 선물이 아닐까. 로타리클럽 사업가인 아더F.셀던은 “가장 잘 봉사하는 사람이 가장 큰 이익을 얻어낸다.”라고 말했다. 봉사는 자신의 보물을 스스로 캐내는 일이다. 봉사는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일, 착한 일, 가식적인 행동이 결코 아니다. 지속적인 나눔을 통해서 내가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재물을 나누는 것은 조금 나누는 것이고, 지혜를 나누는 것은 많이 나누는 것이며, 사랑을 나누는 것은 모두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 마음으로 다가가며 자신의 시간, 물질, 땀과 재능을 기꺼이 타인과 나누고자 하는 봉사는 우리네 인생에 기쁨이라는 보물, 행복이라는 보물을 선물로 준다. 성형외과 의사를 하면서 일 년에 한달 씩이나 병원을 비우고 해외 의료봉사를 가…
인간적으로 볼 때 링컨은 참으로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그의 일생은 온통 가난, 슬픔, 시련, 고통, 불행, 실패, 좌절로 점철돼 있다. 침울함과 슬픔, 이것이 그의 심적 기조였음에 틀림없다. 절대자는 어쩌면 그렇게도 모질게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을까. 링컨은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숙명일까? 가난은 줄기차게 그를 따라 다녔고, 그는 가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링컨 출생지 국립공원이 된 켄터키주 하젠빌의 오두막집에서 그는 무식하고 가난한 사냥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가족과 함께 인디애나주의 인적 드문 숲 속으로 들어가 14년간을 살게 된다. 그곳이 지금은 링컨의 소년시절 국립공원으로 보존되어 있는데, 9살 때 죽은 어머니는 지금도 그 마을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그곳에서 그는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아버지를 도와 노동을 했고, 미래에 자신이 해방시킬 노예들이 겪었던 것보다 더 끔찍한 가난을 견뎌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19세 때 사랑하는 누나가 죽는 아픔을 맛본다. 그 후 링컨은 22살 때부터 6년간 일리노이주의 뉴세일럼에 살았는데, 그곳에서 남의 집 점원과 뱃사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거기서 그는 크나…
그 아버지 /이사라 아버지는, 어머니와 한 짝이었던 그 아버지는 그 가을 어머니와 함께 사라지고 세상은 그 아버지 아닌 아버지를 느린 호흡으로 새긴다 새 낱말을 씹듯 새 날들의 밥알을 씹으며 아버지가 홀로 새 세상을 지나간다 가족사진 한가운데에서 기억 언저리로 천천히 몸을 옮기는 아버지 새벽은 늘 오고 밤새 홀로 새기는 묘비명이 희미한 날들 그래도 아버지는 언제나 그 아버지다 - 이사라 시집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기억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이란 또 얼마나 소중한가.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이란 행복을 켜켜이 쌓아두는 집을 만드는 일이다. 오래도록 서로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그물망을 짓는 일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헤어진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했던 날들이다. 하나의 조각처럼 편편이 남아있는 기억들이다. 비록 곁을 떠났지만 가족사진 한가운데 자리한 모습처럼 내 안에 뚜렷이 남아있는 아버지. 세상이 그 아버지 아닌 아버지를 느린 호흡으로 새기고, 새 낱말을 씹듯 새 날들의 밥알을 씹으며 아버지가 홀로 새 세상을 지나가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어머니와…
100년 전인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대한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압박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피신, 오늘의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비록 조국 땅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였지만 독립국가를 설립하겠다는 불굴의 열망을 임시정부 수립으로 발현시킨 것이다. 임시정부는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3권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를 표방하고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27년 동안이나 대한독립 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면서 정부의 적통을 이어갔다. 지난 100년간 우리는 일제 침탈을 이겨내고 광복을 맞이해 한반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으나 6·25전쟁, 미군정 등을 거치며 척박하고 가난한 약소국의 아픔과 설움을 고스란히 겪었다. 그러나 특유의 부지런함과 영민함을 발휘해 극복해왔으며 기적과도 같은 경제발전과 지난한 민주화도 달성했다. 1996년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작년에는 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의 성과도 이루었다. 하지만 그동안 과연 우리가 ‘국민이 주인인 나라’로 제대로 발전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반성해봐야 한다. 광복 이후 군부독재는 상당기간…
오는 11일은 1919년 4월11일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또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 후손들 가운데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 이들이 많다. 그나마 독립운동 근거자료가 남아서 유공자로 지정된 지사나 그 후손들은 낫다. 아직도 자료가 부족하거나 후손의 행방을 몰라 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한 분들이 많다. 공적이 인정됐지만 후손이 없어 해당 관공서에서 훈장을 보관하고 있는 분들도 있다. 수원의 의기(義妓) 김향화 지사나 이선경 지사가 그분들이다. 이 두 분의 지사들은 그동안 역사의 뒷길에 잊혀있었다. 이동근 씨 등 수원시 학예연구사들의 노력으로 공로가 인정돼 최근 훈장이 추서됐다. 그리하여 이제 3·1운동에 관심이 있는 시민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런데 이분들보다 먼저 훈장을 받은 분들이 있다. 임면수 선생과 김세환 선생이다. 임면수 선생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고 뒷받침한 투사였고, 김세환 선생은 3·1운동을 사전에 기획·실행한 핵심인사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사람이다. 임면수 선생은 후손이 자료를 잘 챙겨 놓은 덕분에 수원지역에서 현양사업이 그런대로 이루
4월5일자 ‘여자다워라’라는 교가를 바꾼 강화여고 학생들이라는 시사인 기사를 봤다. 이 기사를 보면서 고등학교 때 칠판 위에 걸려있던 급훈이 생각났다. ‘순결’이라고 적혀있던 급훈은 보지 않으려고 해도 칠판 위에 위치해 있어서 매일 보면서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또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강조하던 ‘몸가짐, 단정함, 정숙함’은 여자가 지켜야 할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과도한 요구가 불편했지만 항변하는 일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착하게 살지 않았음에도 질문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회에서 말하는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데 더 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아니 비겁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분출하기도 했다. 사회가 가진 통념으로 무장한 나는 여자인 몸을 싫어하고 명예남성으로 살았다.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 버스 안, 학교 선생님들에 의한 침해를 받으면서도 난 스무살이 되기만 바랬다. 어른들이 말하는 대학을 가면 내 세상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남자 선배들에 의해 캠퍼스에서 여성을 대상화해 품
경제적으로 부유한 한의사가 있었다. 인성이 좋아서 주변사람들과 인간관계도 좋았다. 나라 안에서 몇째 안가는 고급 주택에 살고 있었다. 세상 사리(事理)에도 밝았다. 가정 밖에서는 저명인사였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딱 하나밖에 없는 아들 앞에서 모든 것에 약했다. 불면 꺼질까 걸어가면 넘어질까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길렀다. 아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조건 들어줬다. 청소년시절에 고가(高價)의 오토바이를 사줬고 ‘오냐오냐’하면서 돈은 달라는 데로 줬다. 부모를 살해한 비극 아들은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 아들은 미국에서 경제적 풍부함으로 생활이 자유로웠다. 돈 많고 시간의 여유를 갖게 되자 아들은 카지노에 빠졌다. 돈을 잃었다. 그 돈을 부모에게 송금하도록 했다. 부모는 서너 번은 아들이 원하는 대로 보냈지만 그 횟수가 지나치게 잦아지자 의심을 하고 생활을 바로 잡으려고 교육을 시키면서 보내는 횟수를 줄여갔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아들은 빠져나올 수 없는 도박에 중독이 되었다. 부모가 자꾸 이유를 묻고 돈을 따지게 되자 아들은 자신이 필요한 돈을 소유하기 위해 귀국을 했다. 그리고 밤중에 자기 집에 불을 질렀고 부모는 그 불에 타서 목숨을 잃었…
휴일 오전에 집으로 택배가 배송되었다. “인터넷으로 뭐 샀어?”라는 배우자의 질문은 부부의 평온한 하루를 불편한 하루로 바꿨다. 배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반대 상황이라면 배우자는 어떤 반응을 할까? 배우자의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인해 다툼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말에 대한 배우자의 반응에 마음이 상하고 그것이 더 큰 갈등을 불러온다. “인터넷에서 뭐 샀어?” / “내가 필요 없는 물건 샀겠어? 당신은 왜 사사건건 트집이야?” /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뭐 샀느냐고 물어본 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물론 질문하는 사람의 억양이나 태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누적되어 있던 감정이 폭발해서 발생한 다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부 사이 소통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상당수는 부부가 서로 가진 신념 체계(belief system)로 인해 발생한다. 의사소통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먼저,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에게 언어적·비언어적 메시지를 보낸다. 다음, 듣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 체계를 통해 메시지를 해석한다. 마지막으…
기네스 /전형철 혁명은 손끝으로부터 비롯되는 일 빈 잔 너머 깜박이던 피뢰침의 알전구를 타진하는 일 떠나간 옛 애인의 허리를 버즘나무 가로수를 안고 기억하는 일 불면의 밤마다 감은 눈동자에 맺히는 별자리를 헤아리는 일 덧니 난 입속을 유영하는 축축한 혀를 거두는 일 그립다는 촉수 같은 것은 스스로 잘라 내는 일 성급한 고백은 납작한 표정으로 숨기는 일 저주의 주둥이에 납덩이 추를 달로 낚시하는 일 고통을 빚진 자를 찾아 신음하게 하는 일 작은 죄는 더 큰 죄로 경신하는 일 무한 수렴되는 신전의 기둥 외다리로 서 있다 투신하는 일 - 전형철 시집 ‘고요가 아니다’ 혁명을 이루자고 다짐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매년마다 매월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다짐하는 혁명. 생각에 뿌리박혀 있는 적폐를 청산하자, 말에 도사리고 있는 부정(不淨)을 타파하자, 행동을 몰고 가는 독단을 철폐하자. 그러나 혁명은 마음속의 다짐만이 아니라 ‘손끝으로부터 비롯되는 일.’ 알전구의 상태를 타진하듯, 눈동자에 맺히는 별자리를 헤아리듯, 그리움의 촉수는 잘라내듯, 작은 죄는 더 큰 죄로 경신하듯, 외다리로 서 있다 투신하듯 그렇게, 구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