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시장 입구에서부터 한참을 걸었나보다. 생선전을 지나 떡집을 돌아 순대국밥 집이 보이고 왼쪽으로 구부러져 비스듬히 꺾인 골목길을 한 번 더 돌아들자, 저만치 웅성거리는 사람들. 벌써 자리가 없는 듯 보인다. 문 밖에서 기다리면 금세 들어가겠지. 쑥 쑥 줄어드는 순서를 따라 이내 들어선 좁은 식당. 아줌마 손칼국수집이다. 빈자리 하나 없이 빼곡하게 들어앉은 사람들. 사람 정이 그리울 때마다 무심코 찾게 되는 메뉴라곤 칼국수, 보리밥, 팥죽뿐인 내가 좋아하는 푸근한 식당이다. 평소에 먹곤 하던 손칼국수를 뒤로 하고 오늘은 왠지 앞자리의 할머니가 드시는 팥죽에 자꾸만 눈이 갔다. “할머니, 오늘은 다들 팥죽 드시는 날인가 봐요. 많이들 팥죽을 드시네요.” “그러게 유난히 팥죽이 맛있어. 동지가 며칠 안 남았잖여. 새알이 아주 실하구먼.” 금방 내어온 뜨끈뜨끈한 팥죽 한 숟가락에 김장김치를 얹어먹는 그 맛이라니, 연이어 동치미 국물 한 숟가락까지. 어린 날 엄마가 해 주시던 달큰하고 쌉쌀한 그 팥죽으로 이어지는 추억의 맛이다. 동짓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어머니의 팥죽. 가마솥에 푹 익힌 팥을 팍팍 으깨서 껍질을 걸러내…
2011년 대한민국을 충격과 공포에 떨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폐질병으로 산모와 어린아이들이 사망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국민들의 불안감은 증대되었다. 추후 이러한 사망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로 밝혀졌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제조사와 판매사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일반인에 불과한 소비자들이 제조물의 하자나 발생한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필자도 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담당했던 변호사로서, 여러 모로 쉽지 않았던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최근 라돈침대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 관하여 ‘피해자들의 상병이 모두 달라 인과관계에 대한 입증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접하였다. 유사한 사건을 담당했었던 변호사로서, 현재 역학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을 지적하며, 위 소송의 여러 쟁점 중 가장 입증이 어려운 인과관계에 국한하여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제조물의 하자로 인한 질병에는 특정원인에 의해서만 발병하는 ‘특이성 질병’과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발병하는 ‘비특이성 질병’이 있다. 쉬운 예를 들어, ‘염
숨 /이난희 유령처럼 새벽은 열린 창문에 기대어 있고 포스트잇이 흔들렸다 불안의 글자들이 창문 아래로 떨어졌다 오랜 어둠이 따뜻한 결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죽은 기억을 들고 사라져 줄 수 있을 것 같다 글자를 잃은 포스트잇의 얼굴이 차갑다 아까워서 오래 쥐고 있었던 건 아닌데 식어가는 까마귀 울음 다음엔 기척이 없다 찢긴 이파리가 제 심장을 마저 떼어주는 그 순간이 평화라면 신의 세계에 도착할 수 있겠다 유채색 꽃잎은 환하다 환해서 홀로 천국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불안의 연속이며, 그 불안은 우리를 어둠 속에 몰아넣기도 한다. 시인은 그런 어둠이 따뜻한 결로 다가올 정도로 오래 되어, 그곳으로 기꺼이 사라져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사실 어둠은 우리가 서로의 ‘숨’을 막히게 함으로써 비롯되는 일이다. 죽음은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서로에게 행하는 음모와 협잡과 방치가 우리의 숨을 막히게 한다. 유채꽃 무리처럼 잘 났든 못 났든 간에 함께 어우러질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숨이 트인 유채꽃처럼 환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김명철 시인…
지난해 우리나라 노인 예산은 11조71억원이었는데 올해 13조9천776억원으로 2조9천705억원이 늘어났다. 무려 27%나 증가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노인인구 비율은 14.7%(지난해 11월말 기준)에 달해 이미 고령사회가 됐다. UN의 고령화 사회 분류에 의하면 전체인구 중 65세 이상 7%~14%미만이 고령화 사회, 14%이상~20%미만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다. 아울러 현재의 노인인구 증가 추세대로라면 2026년에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하게 되며 2050년에는 세계 최고령 국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된다. 따라서 노인 예산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고령화 예산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노인들이 가장 원하는 일자리 창출 사업이나 고령화산업 육성 등에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지만 근로 능력이 있는 노인들은 경제적·사회적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노인들은 먹고 사느라, 자식들 교육시키고 가정을 꾸려주느라 정작 자신의 노후를 대비하지 못했다. 따라서 노후에 소득이 없으면 빈곤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노인 일자리가 중요한 이유다. 이에 정부가 노인일자리를 10만개 추가해…
서울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가 지난달 31일 진료 중에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병원 내 안전문제가 새해 큰 과제로 떠올랐다. 이번 사건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의료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고인은 우울증과 불안장애 분야 논문 100여편을 발표하고 한국형 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 마련에도 크게 기여한 전문가여서 더욱 안타깝다.고인의 동료인 의료계 인사가 그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확산하고 있는 추모 그림 속 메시지는 “살인을 막지 못하는 의료환경에 분노합니다”이다. 실제로 보건복지부기 집계한 ‘의료진 폭행·협박현황’에 따르면 의료진을 위협하거나 물리적으로 폭행하거나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행위는 2016년 578건, 2017년 893건, 2018년 상반기 582건으로 해마다 늘었다. 응급실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술에 취한 사람에게 구타를 당하는 등의 피해는 더욱 우려스럽다. 국립대병원 응급실 내 폭행·난동 건수만 해도 2014년 8건에서 2015년 15건, 2016년 39건, 2017년 33건, 2018년 9월까지 38건에 달한다. 심각한 응급실 폭력행위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지난해 11월 국회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보내는 지난해의 아쉬움보다 다가올 새해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새로운 해에 주어질 일과 자신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소망을 계획 하게 된다. 지나버린 일들의 결과와 부족하고 아쉬웠던 기억을 잊어버리고 떨쳐 버리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 여겨지는 것은 굳이 유쾌하지 않은 과거 속에 얽매여 있지 않으려는 이유라 생각된다. 하지만 지나치게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로 인해 정작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새해도 중요하지만 지난해의 잔상 속에 남겨진 미완의 과제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맡겨졌던 일을 비롯 지난 시간 속에서 만난 이들의 인연과 다가올 인연들 모두 귀하다. 지나온 공간과 내딛는 땅 모두 버릴 곳이 없다. 내가 묵은해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묵은해가 나를 스쳐 지나가지만 그저 없어질 시간과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큰 것에 대해 집착하는 일반화를 가지고 있다. 아울러 일과 과정 속에 큰 것과 작은 것,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가리는 습성이 있다. 지난해와 새해를 구분하는 것도 지난해는…
모델 A : 애니메이션 영화 ‘마이펫의 이중생활’은 뉴욕의 한 아파트에 사는 애완동물들의 이중생활을 흥미롭게 전개한다. 이들은 각자의 주인이 출근한 사이 함께 모여 놀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어느 날 주인공 맥스가 유기견 보호소에 붙잡혀 가자 구출작전을 펼친다. 작전에 성공한 후 진정한 우정을 느끼고 한층 성숙해진다. 각자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귀가하는 주인을 반긴다. 주인에게 사랑받는 것만 좋아했지만, 유기견같은 가엾은 처지에 있는 동물을 위로하고,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합심하여 모험을 펼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기특하다. 자신들이 한 일을 서로에게는 물론 주인에게도 자랑하지 않는다. 대견한 일을 한 것 그 자체에 뿌듯함을 느낄 뿐이다. 행적을 과대포장하거나 명절과 연말만 되면 연례행사 하듯, 공금으로 구입한 선물을 복지시설에 전달하며 그 선물이 자신이 마련한 것인 양 단체 사진을 찍고 홍보하는 기관장이나 정치인들이 새겨야 할 메시지다. 모델 B :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한 인간의 처절한 이중생활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낮에는 존경받는 의학박사이자 법학박사이지만, 밤에는 이기적이며 다른 사람들에
벼룩시장 구인구직과 잡코리아·알바몬이 각각 실시한 2019년 새해 개인소망 1위가 일치했다. ‘경제적 여유’였다. 잡코리아·알바몬이 설문에 참여한 성인남녀 2천31명에게 ‘기해년에 꼭 이루고 싶은 새해소원’을 물은 결과 대학생(48.3%)과 알바생(48.0%), 직장인(42.1%) 등 세 그룹 모두 ‘경제적 여유’를 새해소원 1위로 선택했다.(복수응답) 벼룩시장구인구직도 직장인 72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9년 새해 소망’ 설문 조사 결과 과반수이상이 ‘경제적 여유’(55.9%)를 꼽았다. 그 다음은 ‘정신 및 신체 건강 관리’(18.3%), ‘내 집 마련’(7%), ‘연애 및 결혼’(6.6%), ‘시간적 여유’(6.1%), ‘여행’(3.9%), ‘다이어트 등 외모 관리’(2.2%) 등이었다. 1위와 2위의 격차는 매우 컸다. 60대 이상을 빼놓고는 모든 연령대에서 ‘경제적 여유’를 꼽았다. 아무래도 건강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60대 이상은 ‘정신 및 신체 건강 관리’를 우선으로 선택했다. 잡코리아·알바몬의 설문 조사 결과도 ‘경제적 여유’와 ‘취업ㆍ이직’ 다음으로는 ‘가족들의 건강’ ‘결혼, 연애 등 솔로탈출’, ‘가정의 화목과 안녕’ ‘로또당첨
전 청와대 특별감찰반원 김태우 수사관이 제기한 민간사찰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운영위가 열렸지만, 국민 의구심 해소와는 거리가 먼 소모적 정치공방 성격이 짙었다.지난해 12월 31일 오전 시작된 운영위는 한국당이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일명 김용균 법) 등 법안 처리와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국회 출석을 연계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조 수석 출석을 지시함에 따라 열렸다. 민정수석이 운영위에 나온 것은 12년 만에 처음이다. 김 수사관의 폭로 이후 혼란이 한 달가량 지속하고 운영위가 어렵사리 열린 만큼 국민은 의원들의 생산적 사실 규명 노력을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 자체였다. 한국당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피해자라면서 김정주 환경산업기술원 전 본부장의 녹취록을 틀었지만, 그는 20대 총선에서 한국당 전신인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23번 후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3년 임기도 정상적으로 마친 것으로 확인돼 블랙리스트 피해자라고 하기엔 머쓱한 데가 있었다. 한국당이 준비를 충실히 했는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조 수석과, 그와 함께 출석한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을 엄호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 의혹 규명을 위해 앞장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한 해를…
우리는 지금 자유로운가? 또 자유의 무게는 스스로 감당할 만한가? 혹은 자유의 획득과 함께 전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은 고독하고 불안하며 무기력에 빠져서 결국 얻었던 자유를 다시금 반납하지는 않았나? 그리고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그런데 사랑하는 방법과 기술을 배워본 적은 있는가?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등은 널리 읽혀진 에리히 프롬(1900~1980)의 대표저작이며 위 질문들은 그의 책 속에서 다뤘던 문제들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이었던 프롬은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서 미국에서 활동했다. 사회심리학과 정신분석학자인 그의 저술들이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각광받았음에도 정작 심리학계는 물론 당시 세계를 양분하고 있었던 미국과 소련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유는 미국에서는 그가 칼 막스의 사회주의 이론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스탈린을 비롯해서 후르시초프에 이르기까지 막스의 사회주의를 왜곡시켜 물질주의화시킨 한계성을 강력히 비판했기 때문이다. 프롬의 사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막스로부터 주된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