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벌레, 자벌레가 /변종태 오일시장에서 오백 원에 사 왔다는, 칠순 노모의 고추 모종을 자벌레 한 마리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제 몸을 접고 접어 세상을 재던 놈이 제 몸의 몇 배는 됨 직한 고추 모종을 해치우고 나서 다른 모종으로 건너가다가 내 눈에 딱 걸렸다. 먼지투성이 흙밭에 내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이걸 어떻게 죽여줄까를 고민하다가 아, 나도 노모老母의 생을 저렇게 갉아먹었을까. 빼꼼히 열린 욕실 문틈으로 비친 몸을 닦는 노모의 몸뚱이에 내 이빨자국 선하다. 이 시는 화자의 노모가 사온 고추 모종을 자벌레가 갉아먹은 사건에서 비롯한다. ‘자벌레’와 ‘고추 모종’의 관계가 화자와 노모의 관계로 치환하는 발상이 빛난다. 고추를 갉아먹은 자벌레처럼 화자도 어머니를 아프게 하면서 살아왔다는 반성을 하는 순간 화자와 자벌레는 동격이다. ‘이빨자국’은 아프고 여운이 있게 한다. 이 시를 읽으며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인연을 맺기는 어려워도 이빨자국을 내며 상처를 주기는 쉽다. 그러므로 혈연이든 지연이든 학연이든 관계를 아끼고 살펴야겠다. 때로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믿음이 깨져서는
고위 공직을 지낸 한 선배님과 약 10년전 점심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은 ‘내가 이리 오래 살 줄 알았으면 퇴임 후 계획적으로 일을 시작했을 텐데’하고 후회하는 말을 했다. 퇴임 후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목표 없이 살아왔는데 그게 20년이나 되었다고 했다. 그 이후 10년이 또 지났는데 아직도 건강하시다고 한다. 10년 전 그 말씀 때 다시 시작했더라도 늦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100세 시대를 맞아 직장에서 정년을 맞아 퇴직하더라도 직장생활 했던 기간만큼의 활동 기간이 남게 되었다. 30년 이상 다시 제2의 경제활동을 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젊을 때 근무했던 직장에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워 재취직하기도 한다. 이때 가져야 할 자세는 준비와 계획을 철저히 하여 제2의 마라톤을 달리는 각오로 다시 출발하되, 불확실성을 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닥치는 대로 살다보면 발전도 없을 뿐더러, 잠재해 있는 많은 리스크를 감당해 나가기 힘들다 본인이 잘 알지 못한 분야의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망하는 경우도 많다. 자영업의 2년 내 폐업비율이 40%나 된다. 과당경쟁
최저임금위원회는 14일 내년 최저임금을 10.9% 인상된 8천350원으로 결정하였다. 이에 주 52시간 근로와 함께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와 대선공약인 최저임금 1만원을 임기 내 달성하려면 더 인상했어야 한다는 반론이 팽팽하다. 참여연대는 “프랜차이즈업체-가맹점주 간 불공정 거래구조를 개선하고, 영세상인이 겪는 임대료·카드수수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올해 최저임금 인상의 충격이 아직 남아있는데 내년 인상분까지 합하여 갈등이 커졌다. 논란의 중심은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기업위주 경제정책을 바꾸는 상징이다. 현 정부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려주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아직 뚜렷한 실적은 없고 오히려 지표는 반대로 나타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6월 고용동향에서 취업자 증가폭은 5개월 연속 10만 명 수준으로 금융위기 이후 최악이었다. 또 올해 1분기 소득 하위 1분위(하위 20%) 가계의 명목소득은 월평균 128만6700원으로 지난해 1분기보다 8.0% 줄어 20
사적 제140호인 독산성과 세마대지의 문화재구역 3만7천985㎡가 추가돼 모두 7만5천254㎡로 확대됐다. 문화재청이 성곽뿐만 아니라 성 내부까지 모두를 포함하는 종합 유적지임을 인식한 결과다. 이로써 오산시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불리는 독산성과 세마대지의 원형 복원 및 보존을 위한 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전망이다. 독산성과 세마대 그리고 정조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12월, 이곳에서 권율 장군은 전라도로부터 1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와 한양으로 가는 길목을 지켰다. 이른 바 세마전법(洗馬戰法)이라는 지혜를 발휘해 3만 명의 왜병들을 퇴각시킴으로써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밑거름이 됐다. 이 지역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또 있다. 인근에 있는 죽미령 전투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돼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일본에 주둔하던 스미스 부대는 7월 1일 부산, 대전을 거쳐 5일 오산 죽미령에 도착했다. 치열했던 전투로 500 여명 가운데 100여 명이 전사하고, 70여 명이 실종되기는 했지만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성과를 냈다. 죽미령 고개에는 스미스 부대의 희생과 공헌
“대회 개막을 코앞에 두고 낯선 선수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만남은 서먹했고 말을 트기가 쉽지 않았다 …(중략)…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17일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의 제20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은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하 단일팀) 남측 한수진의 수상소감이다. 재단이 단일팀에게 상을 준 것은 얼어붙고 메마른 남북관계를 녹이고 일촉즉발의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정신을 실현했기 때문이었다. 올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 정세는 긴박했다. 핵무기를 둘러 싼 북한과 미국의 신경전은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험악했던 상황을 순식간에 전환시킨 것은 평창동계올림픽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한다면서 대표단 파견 의사를 밝혔다. 이후 올림픽 경기에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이 참가, 경기결과에 상관없이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평화올림픽으로 승화시켰다. AFP통신은 “단일팀이 남북한을 위한 역사를 만들었다. 두 코리아 간 화해를 위한 이례적인 순간을 끌어냈다”고 타전했고 중국의 신화통신도 “경기는 졌지만, 평화가 이겼다”고 보도했다. 특히 개회식에서 남측 선수와 북측…
정조는 수원 신읍(新邑)을 급하게 만들면서 정치적 반대를 경험한 바 있었다. 그래서 축성을 계획하면서는 미리 준비하고자 비밀리에 설계를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정약용이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휴직을 하고 있어 그에게 수원화성의 설계를 맡긴다. 성곽설계를 맡은 다산은 31살로 경험이 적고 성곽의 전문가도 아니었다. 또한 비밀리에 설계를 추진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에 중국 병서(兵書)들을 탐독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병서 중 가장 많이 참조한 병서는 명나라 말기 1621년 모원의가 쓴 무비지(武備志)였다. 다산의 설계는 무비지 성제(城制)편에 나오는 시설들을 대부분 차용하였지만, 유독 공심돈(空心墩)만 배제하였다. 공심돈의 설명은 많은 분량이었는데 이를 배제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배제된 공심돈은 공사도중 3개나 설치된다. 정조가 공심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수원화성 준공 후인 정조 21년(1797) 1월 29일 서북공심돈 앞에서 신하들에게 “공심돈 제도는 우리나라 성제에서 최초의 것이다. 보고 싶은 신하들은 들어가 구경하라”며 자랑하였다. 하지만 동북공심돈 앞에서…
최저임금위원회가 지난 13일 밤을 새웠다. 결국 14일 새벽이 돼서야 내년도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10.9% 올렸다. 시간당 8천350원이다. 그러나 사용자나 근로자 모두 불만이다. 가장 불만을 나타내는 쪽은 소상공인들이다. 소상공인연합회는 즉각 성명을 내 “정당성을 상실한 일방적 결정을 수용할 수 없다”며 “내년 최저임금과 관계없이 소상공인 사업장의 사용주와 근로자 간 자율협약을 추진하겠다”고 사실상 불복종을 선언했다. 편의점가맹점주들은 인건비 인상 등을 고려해 월 하루 공동휴업을 하고 내년 1월 1일부터 심야할증·카드 결제 거부 등 구체적인 향후 계획까지 내놓았다. 그 후폭풍과 파장이 어디까지일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노동계도 불만족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한국노총은 최저임금위에 근로자위원으로 참여했으나 애초 요구한 시급 8천680원으로의 인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해 실망감을 드러냈다.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린다 해도 대기업과 하청업체, 프랜차이즈 본사와 가맹점 간 불공정한 관행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노동자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최저임금위에 불참한 민주노총은 ‘최악의 인상률’이라며 강력한 최저임금법 재개정 투쟁을 예고했다. 외형상…
중·고교생 10명이 여고 2학년생을 노래방과 관악산에서 집단 폭행·성추행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사회의 우려를 낳고 있다. 이 여고생의 가족들은 3일 심각한 청소년 범죄를 막기 위해 소년법을 폐기하거나 개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렸다. 청원 글에는 “현재 온몸에 멍이 들고 가슴에 공기가 차서 식도에 호스를 끼고 밥도 물도 먹지 못하고 있다”며 “가해자들은 산에 미리 각목을 준비했고 휴대폰 유심도 빼갔다고 한다. 계획된 범죄이며 협박과 증거인멸까지 시도했다”고 밝혔다, 피해가족은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가해 학생들이 “청소년은 들어가도 얼마 안 살고 나와요” “저 우울증 있어요” 라며 뉘우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분개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엔 지난 6월 24일에도 15살 여중생 딸이 지난 3월 남학생 7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는 한 엄마의 청원이 올라왔다. “가해자들은 떳떳하게 생활하는데 피해자인 저희 아이는 죄인같이 생활하고 있다”며 강한 법의 심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청원자는 “사건 후로 가해자들이 자랑스럽게 ‘OOO를 우리가 성폭행했다’며 오히려 딸아이 학교에 소문을 냈고, SNS에는 딸아이가 남자애들을 꾀어서 관계를 가
남북회담과 6·13 지방선거 이후, 보수궤멸이라는 단어를 미디어에서 수없이 접했다. 그럼에도 효력을 다한 것이 반공정서를 제 호주머니 속 유리알로 여기던 얼굴들인지, 아니면 반공정서 그 자체인지는 더 생각해볼 일이다. 오랫동안 대결의 말씨는 참으로 검질겼고, 또 매혹적이었다. 몇 해 전 북한의 도발에 대한 응답으로 일어났던 한 해프닝을 떠올려보자. 예비군들이 SNS에 자기 군복을 찍어올리며 항전의 의지를 보였던 일, 이때 SNS는 재판장이라기보단 런웨이다. SNS군복인증은 대결이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아름답고 추함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때때로 전쟁은 도덕보다 미학과 친하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 시체거나 돌이다. 모두 전쟁을 알지만, 그것을 경험한 이들의 일부는 세상에 없으며 생존자들은 마치 메두사라도 본 것처럼 석화한다. 아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때, 영화산업은 스스로 야사(野史)가를 자처하며 그 정사(正史)의 공백을 메웠다. 이 야사들이 전쟁을 낭만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낭만화에 대한 정의는 ‘잘 알려진 것에 미지의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인 노발리스의 말이다. 전쟁은 영화 속에
“때로 무심하게 생각에 잠겨/ 카우치에 누워 있을 때면/ 수선화가 내 마음의 눈에 떠오르고/ 그건 고독의 축복이 되네.” 윌리엄 워즈워드 「나는 구름처럼 외로이 거닐었네」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임을 하게 되면서 고별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65년이라는 짧지 않은 인생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수많은 장소와 시간들이 스쳐지나가고 특별한 장소와 시간에 시선이 좀 더 머무는 것을 발견했다. 장 그르니에가 말했듯이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엄청난 고독 속에서 각별히 소중한 장소와 시간을 지나게 되고 그 어떤 순간 우리는 자신과 만나게 된다.” 그곳은 현재적 삶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되돌아가게 하는 시원(始原)의 공간이자 시간이다. 며칠 전 ‘수원문학인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의 짧은 수상소감도 이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 각별히 소중한 장소와 시간은 진해에서의 유년시절이다. 선친이 중학교 교장으로 계시던 사택의 뜰은 의식 깊은 곳에 강력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다. 앞뜰의 탱자나무 울타리와 뒤뜰의 대나무 숲, 깊고 검은 우물은 각기 다른 이미지로 나의 삶에 고유한 자리를 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