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연거푸 흘러내리는 비. 나는 하릴없이 핸드폰만 이리저리 굴린다. 공간을 가득 채우며 마주 앉은 숱한 그들의 표정 또한 무료하긴 마찬가지다. 말없이 멀뚱멀뚱 서로의 동태를 살피며 시간 흘러가길 기다릴 뿐. 한 오십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마이크로 흘러나오는 내 이름자. ‘이상남 대기자 안으로 들어오세요.’ 우리는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와글와글 시끄럽게 성업 중인 먹고 마시는 공간. 양산을 여행하던 중에 들른 일명 ‘맛집’이라는 곳이다. 처음 만나는 숱한 남들이 어울려 함께 식사를 하는 공간, 그곳에서도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다. 빽빽하게 채워진 테이블마다 철저하게 분리된 다른 세상.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각자의 대화에 충실하며 식사에 임하는 모습들. 두서없이 떠들어대거나 일관된 침묵으로 이어지거나 어쨌든 그들은 지금 식사를 하는 중이다. 종종 옆 테이블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맛집을 찾은 그들만의 특권 또는 공통된 묘한 소통방법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집 안이 아닌 집 밖에서 식사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텔레비전 채널마다 돌아가면서 보여주는 &ls
효자손 /고경숙 구부러진 노모의 등이 밟혀 조막손 막둥이는 제 팔 한 쪽 툇마루에 두고 떠났다 해마다 5월이면 부모에게 찾아가거나 안부 전화를 한다. 자식들 모두 부모를 떠나 도시에 있거나 타지에 있는 것이다. 시골이나 고향에 있는 부모는 늙고 병들었거나 아니면 구부러진 허리로 툇마루에 앉아 멀리 있는 자식들을 그리워한다. 그런 부모와 자식들 모두의 곁에 고경숙 시인의 ‘효자손’을 놓아둔다. 자식들은 부모를 찾아가 구부러진 노모의 등을 긁어드리고, 부모들은 툇마루에 두고 떠난 조막손 막둥이의 팔 한 쪽으로 가려운 등을 살살 긁어보라고. 짧지만 깊은 울림과 여운을 간직하고 있는 시 한 편 암송하면서 아픈 마음 가만히 달래보라고. 실제 효자손 같은 이 시로 가려운 곳을 긁는 사람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 자식이라면 노모의 툇마루에 두고 온 팔 한 쪽으로 인해 평생 한 쪽 팔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저린 통증을 평생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 부모라면 팔 한 쪽을 두고 간 자식이 한 쪽 팔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세상에는 두 팔 모두 멀쩡하게…
색은 인간의 인식 체계를 반영한다.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검은색은 어둠, 빨간색은 열정, 녹색은 숲과 연계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이처럼 머릿속에 고정관념으로 박힌 빛깔을 기억색(memorial color)이라고 한다. 흔히들 노랑 주황 빨강 계열은 따뜻한 색으로, 파랑이라면 차가움을 연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색깔에 대한 관념은 국가별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의복과 예식 등에 쓰이는 색상이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란색이 대표적이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부의 원천인 땅과 황금을 나타내는 색이라 해서 황제의 색으로 여겼다. 반면 서양에서는 경계와 멸시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중세 화가들은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옷을 노란색으로 칠했을 정도다. 빨강도 마찬가지다. 신성, 경건함, 열정, 빛을 뜻하기도 하지만 악마와 지옥 불, 퇴폐미, 수난, 어둠을 상징하는 색이라 여겨 그렇다. 이 같은 색깔이 정치에 사용된 역사는 매우 깊다. 그 중에서도 빨강은 고대국가 시절부터 왕과 귀족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그러던 것이 중세 프랑스 혁명이후 ‘자유’로 인식됐고, 러시아 혁명에선 사회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또 파랑 역시 12세기부터 주목받기 시작해 꿈·명예·희망을 전달
소소한 일상의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 속 카페문화가 도시의 문화코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의 익선동, 북촌과 서촌 등 ‘큰길에서 들어가 동네 안으로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이 젊은 창업가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화제의 명소로 만들어지고 있다. 전주시의 발표에 따르면 전주한옥마을은 2017년 1천109만 7천33명의 관광객이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해마다 관광객들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이렇게 관광객들이 많이 오다보니까 어느 카페나 사람들로 늘 붐비고 있다. 근처에는 ‘남부시장 청년몰’이라고 하는 옥상을 골목길로 재현해낸 공간이 있다. 청년몰 32개 상점은 저마다 개성이 가득한 곳이다. 작가들이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작가공방 그리고 색다른 디자인이 눈길을 끄는 카페들이 모여 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한 곳에서 아기자기한 골목길 카페 등을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찾고 있다. 가끔 야외 공연장에서 개최되는 버스킹 콘서트도 볼 만 하다. 이곳은 청년상인협의회가 주관한다. 청년몰은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 사업(문전성시)&rs
장미의 독백 /이윤훈 나를 사로잡으려면 불안한 눈빛 떨리는 손 가뿐 숨결로 짙붉은 나를 탱고처럼 네 안에 들여야 해 자유로운 내 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름다운 순간은 왜 그토록 위태한지 바이올린처럼 울어야 해 아니면 내 향기를 빼앗아갈 수 없어 아름다움은 치명적이다. 아니 치명적이어야 한다. 짧지만 날카로운 삶의 가시들을 온몸에 밀어 넣어야 한다. 시인은 ‘아름다움’에 내포된, 미학적 이중성을 정확히 알고 있다. ‘불안한 눈빛’과 ‘떨리는 손’, ‘가뿐 숨결’은 나에게는 치명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장미’는 더욱 붉다. 장미는 절대 구속되지 않는다. ‘탱고’와 같은 위험하고 위태한 춤을 추며 ‘나’의 내륙을 휘감아 돈다. 그것은 비발디를 연주하는 바이올린처럼 거대한 매혹의 물결들이며, 소리의 울음들이자 꿈과 같다. ‘사로잡힘’이란 절대적 자유의 치명적인 망각이다. ‘아니면, 내 향기를 빼앗아갈 수 없다’고 일갈하는 장미 앞에서 시는 비로소 탄생한다. 5월이다. 장미…
우리나라에서 병역은 매우 민감한 문제다. 군대를 갈 수 있는 조건임에도 기피하는 인물들은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는 하지만 누구라서 황금 같은 20대 청춘의 전성기를 폐쇄된 공간에서 고되고 위험한 군사훈련과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보내고 싶을 것인가. 지도층과 재벌가 아들이나, 유명 연예인의 병역기피 사실이 알려질 때마다 군복무를 마쳤거나 입대를 앞두고 있는 국민들이 격하게 분노하는 것은 그만큼 군 생활이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힘없고 돈 없는 사람, 요즘말로 ‘흙수저’들만 군대에 간다고 생각하면 병역 기피자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 없다.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이회창 후보는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으로 1997년(15대), 2002년(16대) 대선에서 연이어 김대중·노무현 후보에게 패했다. 이 후보의 장남 정연씨, 차남 수연씨는 병무청 징병검사에서 처음엔 현역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추후 정밀 신체검사 과정에서 입대 면제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특히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병역 거부를 절대로 용납 못하는 국민 정서가 있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꾸준히 병역을 기피해온 사람들이 있다. 이른
한국 고용이 10년 만에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통계청 발표 내용을 보면, 4월 취업자 수는 작년 같은 달에 비해 12만 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 3개월째 증가 폭 10만 명대에 머물러 글로벌 금융위기가 진행됐던 2008년 이후 가장 저조한 실적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증가세를 유지했던 제조업 취업자마저도 감소세로 돌아서고 말았다. 그동안 우리 경제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신호가 적지 않게 쏟아져 나온 가운데 집계된 통계치 여서 국내 경기가 본격적인 하강국면에 들어섰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우리 경제 앞길 곳곳에 약재가 쌓여 있다는 점이다. 중동정세 불안으로 국제유가는 급등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할 위기에 몰렸다. 신흥국에서는 글로벌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17개 신흥국 가운데 미국 기준금리 인상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는 나라로 한국을 지목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수입 자동차에 대해 20%의 관세부과를 예고하는 등 무역장벽을더욱 높이고 있다. 물론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서민들의 소득을 끌어올려 소
배우자의 외도, 불륜, 바람 등의 단어가 부부에게 등장하는 순간 부부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워진다. 많은 부부가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아포리아(난관)에 빠진다. 어쩌면 현재 당신이 그 ‘외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이 틀렸다. 왜냐하면 ‘외도’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관계는 ‘육체적 관계’와 ‘정서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즉, 외도에는 두 가지가 있고 그로 인해 두 관계 중 하나라도 무너진다면 행복한 부부생활은 불가능하다. 부부는 ‘성적 일부일처의 관계’이다. 성관계, 키스 등 성적 행위는 당연히 배우자와 해야 한다.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적 행위를 한다면 부부의 육체적 관계는 무너지고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다. 우리는 그것을 ‘외도’라고 부르고 배우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무너뜨린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육체적 외도’ 이상으로 부부관계에 악영향을 주는 것이 있다. 바로
의료폐기물을 일반종량제봉투에 담아 불법 배출한 요양병원과 동물병원 등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경기도 특별사법경찰단(특사경)은 지난달 23∼27일 도내 요양병원 169곳과 동물병원 106곳을 대상으로 단속을 벌여 각종 의료폐기물을 불법으로 처리한 84곳(요양병원 57곳, 동물병원 27곳)을 폐기물관리법 위반으로 적발했다. 의료폐기물은 부패 또는 인체 감염 위험 때문에 의료폐기물 전용용기를 사용해야 하고, 별도 보관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특히 2차 감염이 우려되는 의료폐기물은 배출과 수거 단계에서 감염성 및 손상성, 가연성 및 불연성 등으로 적정하게 분리하고, 환경이나 인체에 대한 유해성분의 발생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번에 적발된 화성시 A동물병원은 혈액이 들어있는 주사기와 바늘 등 의료폐기물을 일반 종량제봉투에 넣어 배출했다. 김포시 B요양병원은 주사기 바늘과 환자 기저귀 등을 일반 플라스틱통과 비닐봉지에 넣어 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 적발 유형별로는 의료폐기물 부적정 처리 18곳, 보관기준 위반 57곳, 처리계획신고(변경) 미이행 9곳 등이다. 이번 단속은 요양병원과 동물병원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종합병원과 일반 병의원까지 확대됐다면 적발 건수는 더욱 크
우리나라 재벌이나 지도층, 이른바 ‘가진 자’들이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반 국민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졌고 그로인한 혜택은 모두 누리면서도 군 복무나 납세 의무 등 기본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오만무도한 갑질과 밀수·탈세 등 행태를 보면서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서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가뜩이나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악화되고 있는 지금, 가진 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 요구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는 뜻이다. 지난 2016년 말 영국 인디펜던트는 그해 세계인을 감동하게 만든 뉴스 10가지를 선정했는데 인도 부유한 사업가인 아자이 무노트가 딸 결혼 선물로 노숙자들을 위한 집 90채를 선물했다는 소식이 뽑혔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재벌기업들은 부의 세습, 일감 몰아주기, 골목상권 장악 등 국가 경쟁력을 낙후시키고 공정한 경쟁을 침해하는 실망스런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재벌기업의 독점으로 일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