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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위에 군림하는 법원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 발의권을 행사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국민 대다수는 아직도 개헌 자체는 찬성하지만 그 시기는 지금이 아니라는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와중에 법원이 집권당인 우리당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의 당헌개정 작업을 중단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비록 당내 계파 간의 갈등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지만 사법부가 집권당의 정치일정을 중단시키라고 결정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는 87헌법 이후 법원이 더이상 사법적 기구가 아닌 정치적 기구로 변전되었다는 증거의 하나이다.
서울 남부지법 민사 51부는 지난 19일, 우리당 기간 당원 11명이 당을 상대로 제출한 당헌개정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수용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당헌상 중앙위가 비대위에 당헌 개정권을 재위임할 수 없고, 비대위 성격상 당헌 개정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재위임을 하더라도 의결정족수인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당헌 개정결의의 효력정지 및 개정된 당헌의 집행정지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 결정문에서 또 “정당 활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함에 있어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되나 정당의 행위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한 자율성의 범위를 넘어 그 내용 및 절차가 현저하게 불공정하거나 정당 스스로가 정한 당헌·당규 등 내부 규정에 위배됨으로써 민주주의 원칙에 관한 헌법 등의 규정에 명백히 위반되는 경우에는 그 행위는 무효라고 할 것”이라는 논거를 제시했다. 법원은 이 가처분 신청을 심리함에 있어서 정당의 ‘자율성의 범위’를 법의 잣대로 그어놓은 셈이다.
당 지도부는 일단 법원의 결정에 따라 오는 29일 다시 중앙위원회를 소집해서 반발을 사더라도 기간당원제를 기초당원제로 바꾼 당헌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예정대로 다음달 14일 전당대회를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이 대회가 원만히 치러지더라도 가처분 신청파들이 순순히 응할것 같지는 않다. 결국 선도탈당 사태 등 분당으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우리당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은 지난해 5.31지방선거 참패의 후유증이다. 혼란에 빠진 당을 수습하기 위해 당시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면서 김근태 최고위원을 의장으로 하고, 모든 당무를 ‘비상적’으로 처리할 권한을 가진 비대위를 당 안에 설치했다. 비대위는 곧 국회의원과 중앙위원 연석회의에서 당헌개정안을 의결했는데, 이때 찬성표가 당헌상의 정족수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이 대목이 법원의 시각으로는 ‘당헌 위배’인 것이다. 법원은 당헌이나 당규가 완벽하지 못한 점을 포착하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정당이란 정치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다. 다수결 원칙이라는 상식이 존재함에도 당의 결정이 맘에들지 않는다고 당내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가는 행위는 정당인의 도리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고를 친 사람들, 바로 가처분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을 사수하겠다는 이른바 당 사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당은 몇 갈래의 파당으로 갈라져 있는 모양이다. 전당대회를 통해 당을 재정비하자는 통합온건파, 당을 해체한 다음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통합강경파, 현재의 우리당을 손대지 말고 그대로 가자는 사수파,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대세만 살피는 눈치파 등이 있다고 한다. 아마 노 대통령은 당 사수파의 입장에 서 있는 듯이 보인다. “통합신당은 지역당이 될 것”이라며 통합신당 추진을 폄하하고 있다. 가처분파와 코드가 맞는 말이다. 그의 복심으로 알려진 김두관 전 장관도 “가처분 신청 낸 당원의 노고에 깊은 존경을 표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 내의 영남파 수장격이라 한다.
87헌법이 채택된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성공을 거두고 다. 그러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과거에는 정치의 핵심이 정당이었으나 이제는 정당의 역할이 위축되고, 그 대신 정당, 시민단체, 사법부 그리고 언론이라는 정치 주체의 4원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다. 노무현 정부는 언론과의 전쟁만 펴다가 피투성이가 되었고, 집권당은 당헌·당규 하나 똑떨어지게 만들지 못해 법원의 간섭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는 87헌법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일 것이다. 정당 위에 군림하는 법원을 본래의 사법적 기구로 되돌려 놓자면 현행 헌법을 고치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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