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면!”
나뭇가지를 대충 다듬은 나무총으로 숨어 있는 상대방을 찾아 겨냥하며 외치던 이 확인 명령 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혹시 있을까?
가난했기에 세 들어 살던 곳이 기찻길이 높게 걸린 굴다리 아래 개천변이었고, 그 기차 불통 소리를 벗 삼아 7명의 우리 가족은 비교적 다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5.16 쿠데타가 터지고 새마을 운동의 여파로 나무로 집 짓던 대목 직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아버지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모두를 시골로 내려 보내고 그 당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나와 단 둘이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 시절 기찻길을 경계로 이웃마을과 구분 짓고 소통하던 방식이 바로 이 총싸움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우리는 이놈의 ‘카면!’을 무슨 뜻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적의 은신처를 정확하게 추적하여 잡아내면 충분하였고, 이 소리는 잡았다는 신호이며, 막연히 ‘너 가면 벗어, 너 가면 죽어’ 정도의 뜻으로 이를 좀 멋스럽게 표현한 것이라 짐작하면 족했던 것이다.
이 놀이는 우리 전통 마을의 교류의식이었던 석전(石戰)이 변형된 것이며, 우리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미군 ‘하야리야 부대’가 그 단어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기까지는 꽤 세월이 필요했다. ‘너 나타나, 손들어’의 뜻을 가진 영어 캄온 ‘Come on’이 그 어원이었던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 미국의 전시작전통제권 한국 이양 논의 등으로 한반도의 통일 정세가 변화해가는 가운데 우리 민족만큼 미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던 동남아시아의 2개국인 월남과 캄보디아를 방문한 것은 작년 연말이었다. 바로 그 때 호치민시, 씨엠립, 하노이를 비행하며 현지 안내원의 안내방송 끝을 맺는 ‘깜은’이란 발음이 한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 그 시절 그 이웃 마을과의 총싸움에서 외치던 ‘카면’을 기억 속에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왜 저 친구들은 말끝마다 ‘나타나, 손들어’라면서 자기 나라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것일까? 그것도 그 처참했던 통일 전쟁 과정에 뜬금없이 끼어들어와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손들고 나간 그 지긋지긋한 미군의 언어로.
황급히 의자 걸이에 비치된 월남 소개 잡지를 뒤적여 간단한 인사말을 확인하고는 그것이 ‘감사하다’는 월남 현지어임을 알아 챌 수 있었다. 일단의 의문은 해소되었지만, 총부리를 앞세우고 침략한 미군 언어 ‘캄온 (come on, 손들어!)’과 민족해방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월남 인민의 언어 ‘깜-은 (感-恩, 감사합니다)’이 자꾸 대비되면서 귀국할 때까지 끊임없이 묘한 파장을 불러왔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의 용사 웨스트멀랜드가 1965년 말 18만의 미군을 이끌고 월남에 주둔하면서 ‘캄온’하며 총부리를 들이대자 호치민이 ‘깜은’하며 두 손을 합장하고 맞받던 광경을 상상해 보라. 어째 좀 말이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이 순간 이미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고 만 것이 아닐까?
늙은이들만 넘쳐나고 애기 울음소리 끊어진 지 오랜 우리 시골 산천 어귀를 흰 현수막으로 도배질한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로 세뇌당해 있던 나의 감각은 잘 정돈된 노이바이 공항, 젊은 오토바이 행진이 새벽을 가르는 하노이 시내에 당도하면서 여지없이 깨져 나가고 있었다. 그 힘이 바로 이 캄온을 넘은 깜은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고 내심 결론내리고 있는 나를, 용이 올라간 상룡(하노이의 옛 지명)과 하늘이 그 숱한 섬 사이로 용을 내린 하롱(하룡)베이를 오가며 그 길 위에 그 바다 위에 새기고 있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침략, 정복, 동화를 넘은 감사, 화해, 상생의 그 길, 그 바다가 논어 경전으로부터 걸어 나와 이렇게 눈앞에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그 젊은 도시 하노이에서 호치민 묘소를 방문했을 때 일정에 쫓긴다는 핑계로 가이드가 제안한 ‘국제적인 새치기’에 동참하고는 뒤통수가 근질거렸지만, ‘급행료가 통하는 못 된 관행이 이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자행되고 있구나’ 하며 슬며시 솟구쳐 오르던 묘한 배신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 ‘깜은’ 덕분이 아니었던가 싶다.
호치민시에서 시엠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영자 신문을 펼치자 월남과 캄보디아 양국 수뇌가 만나 부패를 가장 큰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 척결에 나설 것을 공동으로 협약하였다는 기사가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왔지만, 이조차도 이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겠거니 하는 느긋한 마음 쪽으로 몰고 가고야말던 그 기운은 또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윤 한 택 <경기문화재단 전통문화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