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을 이룬 싯다르타는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 끝에 마침내 환히 터져오는 눈부신 태양을 향하여 가슴을 활짝 펴고 일어섰다. 그리고 북받치는 설레임을 억누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어둠은 영영 사라졌도다! 다시는 생사의 길을 따르지 않으리라!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고 선언하노라!”
싯다르타는 그의 깨달음을 히말라야에서 같이 고행했던 다섯 비구에게 설했다.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첫 시험이기도 했기 때문에 싯다르타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
“싯다르타여, 고행으로도 얻지 못한 깨달음을 자네가 어떻게 얻었단 말인가?”
“수행자는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되네. 극단의 하나는 모든 욕망에 탐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를 혐오해서 스스로 고행에 열중하는 것이니 두 가지 다 어리석은 짓이지. 나는 이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했다네.”
싯다르타의 말을 들은 비구들은 그 중도에 대하여 물었다.
“그것은 바르게 보고,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움직이고, 바르게 살고, 바르게 공부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마음을 안정하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이지.”
이와함께 싯다르타는 십이연기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하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한다.
친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일까? 무명의 연으로 행이 있고, 행의 연으로 식이 있으며, 식의 연으로 명색이 있고, 명색의 연으로 육처가 있으며, 육처의 연으로 촉이 있고, 촉의 연으로 수가 있으며, 수의 연으로 애가 있고, 애의 연으로 취가 있으며, 취의 연으로 유가 있고, 유의 연으로 생이 있으며, 생의 연으로 노사(老死)가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무명의 남김없는 멸로 행이 멸하고, 행의 멸로 식이 멸하며.... 명색... 촉... 수... 애... 취... 유의 멸로 생이 멸하고, 생의 멸로 노사가 멸하며, 그리하여 무명도 멸하게 되는 것이다.”
십이연기는 여기에서 해설할 만큼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다. 다만 이 이론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이십세기 초의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자동 기술법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신문지에서 단어만을 조각조각 오려내어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연결시켜보는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글로 적거나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각자 한 마디씩 한 것을 모아 한꺼번에 읽어보아도 좋다. 그렇게 하면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던 낱낱의 단어 사이에서 그동안 숨어 있던 어떤 의미가 빠끔히 얼굴을 내밀 때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