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흔이 좋다’
한재희 외 엮음
마고북스 출판/256쪽, 9천800원
“염전이 있던 곳/나는 마흔 살/늦가을 평상에 앉아/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지그시 힘을 준다/…/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 보는데/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나는 마흔 살/옛날은 가는게 아니고/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이문제의 ‘마흔 살’ 중에서)
남자들의 40대는 어떤 것일까?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불혹(不惑)을 지나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하늘의 명령이나 원리를 깨우쳤다는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지만 마음은 아직도 미혹에 헤매이고 돌아보면 아득하고 내다보면 캄캄한 사람들. 이게 우리시대 40대의 자화상이다.
그 40대의 자화상이 일곱 남자의 자기고백의 형식을 빌어 책으로 묶였다. 남자 나이 40대에 속으로 감싸안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직장에서는 한창 나이에 은퇴를 두려워해야 하는 예비 실업군이고, 커가는 아이들 등쌀에 통장잔고 들여다보기가 무섭고, 뭐든 인생의 마지막 배팅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그들은 사춘기 이후 가장 심한 ‘나이 몸살’을 앓는다.
다양한 직업과 경험을 가진 남자 일곱이 ‘나는 마흔이 좋다’라는 다분히 반어법적으로 들리는 제목의 책을 통해 자신들의 속내를 풀어놓았다. 초경이나 몽정 같은 사춘기의 징후들이 나만 앓고 있는 ‘질병’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나와 다른 줄 알았던 친구들의 경험으로부터 용기를 얻기 때문이듯이, 일곱 남자도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그들처럼 나이 몸살을 앓고 있는 이 땅의 40대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몸, 가족, 일상생활, 사회적 관계, 미래라는 다섯가지 주제를 놓고 그들이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는 쓸쓸하고 따뜻하며 익살스럽다. 삶에 대한 낭만적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이미 회한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진, 게다가 가족부양의 짐을 짊어진 가장으로서의 그들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하지만 아직 순수했던 젊은 날의 기억을 잃지 않고 있는 그들이 세상을 품는 시선은 따뜻하며 현실의 무게를 익살로 덜어내는 연륜은 녹록치 않다.
일곱남자의 이력은 언듯 색다른 듯 하면서도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외국계기업 마케팅책임자로 억대연봉의 받고 일하다가 자기 회사를 차려 다 말아먹고 미용실을 연 김재희, 가난에 치여 허덕거리면서도 소설쓰기를 고집스럽게 지켜가고 있는 유채림, 노동과 문화운동판에 뒹굴며 여러 밥벌이를 섭렵해온 희망제작소 기획실장 유창주, 삼성에 다니다가 ‘회의’하는데 ‘회의’를 느껴 드라마 만들어보겠다고 방송국 피디로 전업한 홍창욱, 대기업 홍보실에서 일하다가 시민운동가로 변신한 김성희, 역시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백수를 거쳐 산악전문잡지사 편집부장이 된 박성용, 미국에서 살다가 귀국해 농부로 살며 소설을 쓰고 있는 최용락 등이 이 책의 주인공 들이다.
무한경쟁을 부르짖는 사회에 치이며 온갖 자괴감에 흔들리면서도 일곱 남자가 부르는 마흔의 노래는 아직 희망의 편에 서있다. ‘나는 마흔이 좋다’는 마흔에 접어든 남자뿐 아니라 곧 마흔이 될 이들에게 40대 남자들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