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2 (월)

  • 흐림동두천 4.6℃
  • 흐림강릉 4.7℃
  • 흐림서울 7.2℃
  • 흐림대전 7.3℃
  • 흐림대구 8.0℃
  • 흐림울산 8.1℃
  • 광주 6.4℃
  • 흐림부산 8.6℃
  • 흐림고창 7.4℃
  • 제주 10.2℃
  • 흐림강화 5.0℃
  • 흐림보은 6.4℃
  • 흐림금산 7.1℃
  • 흐림강진군 6.6℃
  • 흐림경주시 8.0℃
  • 흐림거제 8.9℃
기상청 제공

[문영희칼럼] 언론활동의 암흑기 이젠 안된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처형은 박정희 정권의 사법살인 사건
당시 정신적 계승자 대선승리 언론활동 다시 위축될까 걱정

 

지난 12월 17일 저녁, 서울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는 백발이 성성한 원로 언론인 100여명이 모였다. 그들은 대부분 46년 전인 1961년 민족일보의 기자와 1975년 동아일보 사원 출신인 동아투위 소속 60~70대였다. 이 자리는 청암언론재단(이사장 이상희)의 제6회 청암언론상 수상자 조용수(1930~1961) 전 민족일보 사장을 추모하고, 46년만의 명예회복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그는 이미 지난 2006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약칭 진실위. 위원장 송기인)’로부터 국가 차원의 법률상 명예 회복조처를 받았는데, 다시 올해 청암언론상을 수상함에 따라 언론인으로서도 명예를 회복하게 된 셈이다. 청암언론상은 한겨레신문 회장을 지냈던 고 송건호 선생의 유족들이 설립한 청암언론재단이 지난 2002년부터 매년 언론자유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흔히 ‘민족일보 사건’이라고 불리는 언론인 조용수 처형 사건은 박정희 군사쿠데타 정권의 속성을 한 마디로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이다. 조용수는 경남 진양에서 태어나 1950년 연희대 정경학부에 입학했다가 1951년 일본으로 밀항, 거류민단에서 일하며 민단 기관지인 ‘민주신문’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귀국, 7·29총선거에 혁신계로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 후 시작한 사업이 민족일보의 창간이다.

일본에서 모금한 자금으로 1961년 2월 13일 설립된 이 신문은 파격적인 의제 설정과 논설을 통해 남북문제, 한·미 경제협정을 비롯한 한·미 문제, 민주당 정부가 추진한 이른바 2대 악법인 반공법·데모규제법, 용공조작 문제, 4·19를 통해 제시된 혁명과제 등에 대해 진보적인 주장을 편다. 동아, 조선 등 보수 일색의 당시 신문시장에서 민족일보는 하루 4만부 이상을 발행하는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민족일보는 특히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했다. 이 신문은 우리 민족의 절대적 과제인 통일을 이루자면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난 중립화의 길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 중립화론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지향하는 김일성의 고려연방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조용수는 한반도가 좌우를 초월하는 제3의 통일된 중립지대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미국과 이승만에 대해서도 비판했지만 소련과 김일성에 대해서는 아주 적대적 논조를 폈다.

조용수는 쿠데타 당일인 5월 16일자 조간에도 “조국통일은 민족이 자주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공통의 민족감정은 조국통일의 정신적 근저가 되는 것이다. 조국통일 전선에는 보수와 혁신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공명을 다투는 소아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호소한다. 그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주동자 박정희를 진보적인 인물로 보고, 사설을 통해 “이 획기적인 군사위원회의 혁명과업 수행에 더 많은 영광 있기를 바란다”라고 기대를 보냈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용수가 생각했던 진보적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에게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다. 박정희는 조용수를 택했다. 왜 그랬을까? 고려대 김민환 교수의 견해는 이렇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당시 두 가지 급박한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는 대학생과 진보주의자들의 저항 잠재력을 뿌리 뽑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 자신과 그 척족의 공산당 관련 경력에 기인한 미국의 의구심을 해소시키는 일이었다. 민족일보와 조용수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군사정부는 거사 다음날인 18일 조용수 등을 체포한다. 이 신문은 19일자로 지령 92호 이후 발행이 중단되며, 그달 27일에는 폐간명령이 내린다. 군사정부는 조용수에게 적용할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6월 22일 소급 제정하기에 이른다.

진실위는 유족의 신원(伸寃)진정에 따라 이 사건을 재조사,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은 국가가 중대한 위법을 범한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 “국가는 조용수 및 유가족에게 사과하며,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조용수는 1961년 12월 21일, 언론활동 1년도 채우지 못한 채 서른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언론이 모두 침묵하는 중에 한국일보(발행인 장기영)만은 8월 23일자 사설에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조국을 위해 일할 기회를 주라”고 호소했다. 그 엄혹했던 시대의 정신적 계승자들이 이번 대선에서 승리,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다. 언론활동이 다시 위축되는 세상이 오지 않을지 정말 걱정스럽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