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는 우리로선 암울한 시대였지만 전쟁으로 군마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애마정신이 유독 강조됐던 시기였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천황이 마필개량을 지시했던 4월7일을 애마일(愛馬日)로 정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요란한 말 행사를 열렸다.
서울에서는 400여두의 군마와 민간마가 시가행진을 하는 애마행진을 비롯, 군마 전시회, 군마미담(軍馬美談) 강연회, 여학생들이 당근과 물을 말들에게 먹이는 애마봉사 등의 행사가 개최됐고 극장에선 애마선전영화도 상영했다. 또 말에 관한 미담이 신문과 잡지에 대서특필되고 학교는 말을 소재로 작문을 하게 했다.
심지어 1942년 6월10일 용산역 앞에선 한 마리의 말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 거창한 환송행사를 열기도 했다.
역대 조선군사령관의 승용마였던 도찌기(柝木)가 퇴역하면서 고향인 후쿠시마로 돌려보내는 자리였다.
도찌기는 15대 미나미 지로부터 21대 이다가키 세이시로까지 모두 7명의 조선군 사령관을 태운 말로 조선군사령부의 고급장교들과 조선마사회 간부, 총독부 축산 관리 등 고관대작들이 모두 참석하는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했다.
그해 12월8일엔 남산 조선신궁(朝鮮神宮)에서 신마봉고제(神馬奉告祭)도 열렸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 남산 중턱에 세운 신사(神社)로, 군마의 무운(武運)과 마사 진흥을 빌기 위해 조선군이 주최해 앵글로아랍종 말 한 마리를 신마로 바쳤다고 한다.
같은 해 8월엔 전국 학생승마선수, 민간승마인, 일본 군인들이 출전, 학생들의 승무훈련 목적인 국방훈련기도대회가 열리는 등 말 관련 행사가 줄을 이었다.
일제의 애마정신은 군마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정치적 선전의 일부였고 근대에 이르러 마문화가 척박해진 한 요인과 무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