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이 아니다. 상고(商高)를 졸업할 무렵 마지막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엄숙하게 “내가 이제껏 아는 지식은 모두 전수(傳授)했다고 생각하는데, 하산(下山)하기 전 마지막 저울 속이는 법을 안 가르쳐 주었구나.
돈 버는데는 뭐니뭐니 해도 그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동차 교습소에서는 “만일 사고가 났을 땐 무조건 우겨라. 인상을 최대한 험악하게 쓰고 목소리는 최고로 크게, 잘잘못을 떠나 우선 상대방을 제압하라.”는 것을 가르쳤다. 우스개 소리라고 돌릴 수 없는 이런 우리의 과거가 분명히 있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불교적 속담이 있다. 이 아름다운 속담을 한 때는 엉뚱한 한량(閑良)들의 작업용 멘트로도 곧잘 사용됐는데 어쭙잖은 인연을 들춰서 “이것도 인연인데 차나 한잔합시다.”라며 접근했다. 대부분 여성들이 ‘인연’이란 말을 내세우면 약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속담이 요즘 변했다고 한다. 옷깃만 스쳐도 법(法)으로 하자. 불황 탓일까? 각박하게 변하는 세태를 보는 것 같아 매우 씁쓰레하다. 겁난다. 향기가 나던 속담도 세태(世態)에 따라 무시무시해질 수 있구나!
전보다는 훨씬 덜 하지만, 교통사고 현장을 보면 아직도 고성(高聲)이 오간다.
현장 조사를 하는 곳에서 제각기 일방적으로 끝도 없이 주장(主張)을 펴서 곤혹스러워하는 경찰관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어깨가 떡 벌어지고 기운 꽤나 쓸 만한 사람이 인상을 쓰면서 통증(痛症)인 듯 뒷머리를 만지며 “당신 운전 어디서 배웠어”하고 고함을 지르면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고가 내 부주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착각과 함께 협상에서 저자세가 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염치있는 사람이고 보면 교통사고 여파로 체증을 빚는 차량들 속에서 짜증스러워 하는 운전자들의 얼굴을 보면 빨리 현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별로 좋지 못한 통계라 어느 도시(都市)라고 구체적으로 내세우진 않지만, 지난해 교통사고가 2만5천건으로 2007년에 비해 약 9%가 증가했다.
특히 물적 피해신고는 14%가 증가했는데 대부분 접촉사고 등 경미한 사고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그냥 사과하고 끝날 것도 보험금을 탈 수 있다는 계산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병원부터 입원하자는 식이다.
국·공립병원 입원실에 저녁마다 이런 나이롱 환자들이 파티를 벌이는 것을 쉽사리 목격할 수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신사도(紳士道)하면 미국사람을 으뜸으로 쳤다. 연약한 여성을 항상 대접해주고, 결투를 하더라도 비겁하게 등 뒤에서 권총을 뽑지를 않고... 그러나 미국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특히 뉴욕 같은 경우 오늘 내일 할 만큼 배부른 임신부에게도 절대로 택시를 양보하는 법이 없다.
의아해서 미국 생활을 오래한 교포에게 물었더니 ‘언제 다시 볼 사람이라고’ 하는 심리가 깔려있다고 한다.
덧붙여 미국사람들이 결코 법을 존중해서 지나치게 잘 따르는 게 아니고, 법을 위반했을 때 따르는 범칙금(犯則金)이 무서워 법을 잘 지킬 수 밖에 없도록 사회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연구역 호텔방 안에서 물컵을 재떨이 삼아 꽁초를 넣었는데, 외출한 뒤 이를 청소부가 확인하고 신고해 벌금 100불을 물었단다.
장애인 전용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장애인을 무시한 괘씸죄까지... 하기야 그 많은 다양한 인종(人種)을 통제하자면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이 동원될 수 밖에 없겠지만...
법이란 물(水)이 흐르는 것(去)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나치게 총총한 그물을 펴면 아주 작은 잔고기마저 걸리고, 너무 틈새가 큰 그물은 웬만한 고기가 다 지나가고...
아무리 규정하기 힘들더라도 옷깃만 스쳐도 법으로 하자! 이건 분명 아니다.
인정은 사람사는 기본 도리(道理)다. 이 샘물이 마르면 결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게 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 무서운 진리(眞理)를 잊고 사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