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숨길 수 없는 것이 3가지 있다.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이다.
사람들은 보통 진정한 사랑에 대한 답변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있는 그대로 베푸는 것, 상대방의 단점까지도 포옹할 줄 아는 것, 남녀가 만나서 서로에 대해 차이점을 인식하고 사랑으로서 그 차이점을 극복하는 것 등이라고 말한다.
요즘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인색한 사람들이 많다. 상대방이 자기를 어느 정도 좋아하는가를 우선 살피고 측정하면서 내가 먼저 다가가 사랑을 표현하기보다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자식의 사랑을 먼저 확인하고 나서 꼭 그만한 크기의 사랑을 나누어 주려는 부모가 어디에 있으며, 장삿속으로 사랑을 흥정하고 저울눈을 속이듯 서로 이득을 노리는 그런 관계 사이에서 어찌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겠는가?
어느 저명한 목사가 여러 해 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아들이 중학교에 다니는데 얼굴도 잘생겼고, 공부도 곧잘 해서 누구에게나 귀여움을 받았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나면서부터 그의 눈이 사팔뜨기였던 것이다. 하루는 그 아이의 담임선생이 학교로 한번 찾아오라고 하였다.
무슨 일인가 하고 급히 그 학교 교무실로 달려갔더니 담임선생은 별일은 아니라고 전제하고, 이 학생이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소년이라고 칭찬마저 아끼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다소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담임선생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목사님, 저 놈이 모든 일에 모범적이어서 꿀릴 데가 하나도 없는데 한반의 친구란 놈들이 보기만 하면 ‘사팔뜨기’ ‘사팔뜨기’ 해서 학교에서는 좀 기가 죽어 있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목사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아니, 사팔뜨기를 사팔뜨기라고 부르는 게 무엇이 잘못입니까? 그것 때문에 기가 죽을 까닭은 하나도 없지요.” 이렇게 말하고 오히려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그는 교무실을 물러나와 교회 뒤뜰에 있는 목사관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는 그날 밤 한잠도 못자고 뜬눈으로 새웠다고 한다. 그 아들이 친구 녀석들에게 사팔뜨기라고 놀림 받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괴로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부터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저 아들의 눈을 내 눈과 바꾸어 주었으면” 하는 기도를 하였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받을 것을 기대하고 보내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장터에서의 흥정이다. 사랑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쉽사리 진실한 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사랑이 욕심과 질투로 얼룩져 변질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랑이 흥정거리가 되다 보면 욕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상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구사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뜻대로 안되면 끝까지 괴롭혀서 병신이라도 만들고야 말리라고 악을 쓰는 사람들도 없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쯤 되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것이 사랑이라 불리며, 사랑의 탈을 쓴 인간의 욕심과 아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풀고 또 베푸는 사랑, 되돌려 받을 것을 바라지 않고 오직 주기만 하는 그런 사랑이 그리운 세상이다.
주고 또 주어서 결국은 그 품에 하나로 녹아드는 바로 이런 사랑이 아쉬운 세상이다.
비록 겉으로는 미약하게 보일지 몰라도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넓고도 깊은 부모의 사랑이 너무도 간절해지는 때이다.
아무리 세상이 물질만능과 욕심으로 가득해진다 하여도 우리네 사랑만큼은 끝까지 고결하고 아름답게 남아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