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과 서울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된지 올해로 200돌이 된다. 1894년(고종 31) 8월 일본 정부는 식민지 야욕을 앞세워 한일합동조약을 체결하고, 경인·경부 두 철도에 대한 부설권을 강취했다. 이듬해 경인선 부설에 관한 협정을 벌였으나 영국, 독일, 미국, 러시아 등의 강대국이 끼어드는 바람에 일시 수포로 돌아갔다. 1896년 2월 미국인 제임스 알모오스가 부설권을 따냈지만 자금 조달에 실패해 공사를 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간교한 수단을 부려 부설권을 양도받았고, 재빨리 ‘경인철도인수조합’을 설립했다. 1899년 3월 70만환의 운영자금을 확보한 일본 정부는 인수조합을 ‘경인철도 합자회사’로 개편하고 공사에 착수, 그해 9월 인천·노량진 간을 개통했다. 이듬해 7월에도 전 구간이 개통되어 11월에는 영업을 개시했지만, 승객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다급해진 경인철도회사는 승객 유치 광고를 신문에 내게 되는데 광고 내용이 참으로 볼만하였다. 국·한문이 뒤섞인 광고를 한글로 고치면 다음과 같았다. “철도는 열기와 기계 힘으로 여객과 화물을 장차하여 육상을 쾌주하는 것이다. 경인철도는 즉 경성과 인천 사이 80리에 포설한 철도요, 그 속(速)함은 비할 것이 없느니라. 그 비용도 불과 몇 푼 되지 않으니 동대문에서 남대문까지의 교자 삯이면 인천을 왕복하겠노라. 차내는 3등 구별이 있으되 유리창으로 바람을 막고, 의자는 편하며, 대소변까지 별방을 준비하였으니 눈, 비와 바람은 내 알바 아니로다. 담소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인천에 당도함으로 경성 사는 사람이 매일 인천에 가서 일보고, 인천 사람도 경성에 가서 일보는데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노량진 철도는 미국에서 만든 최신공법이라 마치 긴 무지개가 가로지른듯하다. 부평 평야를 지날 때 만경평야를 본듯하고, 인천의 일·청 양관(洋館)은 높이 솟아 아름답더라. 영종도와 팔미도 앞바다엔 화물선이 연기를 토하고, 돛단배는 마치 숲과 같더라. 인천 사는 사람이 저녁에 차를 타면 풍광을 실증날만큼 구경하고, 장안에서 마신 술과 남산의 칭송에 취하여 집에 돌아와서는 깊은 잠에 빠지리라.” 일부 묘사가 과장된 듯 하지만 승객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한 문안이었다. 어쨌거나 경인선 철마는 200년째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