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면 으레 등장하던 것이 사과상자였다. 지금처럼 선물이 다양하고 고급화되지 않았던 시절 사과상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선물로 최고였다. 사과상자를 펼치면 드러나는 빨갛게 익은 사과는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각광을 받았던 사과상자가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과상자가 뇌물상자’로 변하며 은밀한 돈거래의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부터였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난 1977년 검찰에 구속된 2명의 시중은행장은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으로부터 돈이 든 사과상자를 두개씩 받고 구속됐다. 대출비리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손홍균 전 서울은행장도 사과상자 한개 때문에 당했다.
뇌물로 받은 것은 아니지만 당시 신한국당 김석원 의원은 전두환 전대통령의 비자금을 사과상자 25개에 담아 회사창고에 보관했었다.
이처럼 사과상자가 냄새나는 큰 돈 거래에 애용되는 이유는 눈에 띄지않으면서도 많은 돈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사과상자 한개에 1만원짜리 신권을 넣을 경우 최대 2억4천만원 정도를 담을 수 있다. 실명제 이후 수표가 뇌물로서 환영받지 못하자 사과상자가 현금운반용 도구로 각광받게 된 것이다.
그 사과상자가 다시 등장했다. 최근에 안산시청에 사과상자 2박스가 전달됐다. 고위 공직자에게 은밀하게 전달된 것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인 민원실로 배달됐다. ‘안산시를 방문한 서울시민’이란 글이 쓰여 있는 편지도 들어 있었다. 서울 성북구에 거주한다는 이 시민은 “야간에도 민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안산시청 직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썼다.
안산시가 지난 1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24시간동안 민원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원더풀 25시 시청’을 개청한 것에 대한 감사의 선물이었다. 안산시 자치행정과 신성훈 씨는 “택배를 통해 사과 박스가 배달됐으나 보낸 사람이 적혀있지 않아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25시 시청은 감사의 마음으로 사과를 받아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정이 넘치는 감사의 선물인 사과상자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