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이 개항된지 올해로 124년째가 된다. 세계 각국의 산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이 때 부터다. 이 무렵 주목을 끈 상품 가운데 하나가 베트남에서 수입한 안남미(安南米)였다. 이전에 흉년이 들면 호미(胡米), 즉 중국 쌀을 들여와 식량난에 대처한 적은 있었지만 안남미를 수입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1901년 7월 흉년으로 쌀값이 치솟으면서 밥 굶는 사람이 늘어나자 안남미 30만 석을 수입해 시장에 풀었다.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으나 미질이 나빠 불만의 소리도 적지 않았다.
1902년에도 10만여 포의 안남미를 수입했는데 안남미 수입은 흉년 탓도 있지만 우리나라 쌀을 일본인들이 인천항 등을 통해 본국으로 빼돌림으로써 쌀 재고가 줄어든 탓도 컸다. 맥주와 커피도 이 때 처음 수입됐다. “맥주를 마시지 않는 자는 개화인이 아니다.”라는 광고가 나왔고, 주로 개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마셨을 뿐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커피는 주로 왕실과 상류층에서 마셨는데 고종이 가끔 양식에 곁들여 커피를 즐겼다.
그런데 1898년(광무 2) 9월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독약을 넣어 시해하려는 ‘김홍륙(金鴻陸) 독다사건’이 발생해 세인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은 고종과 레시아공사 베베르와의 통역을 담당하였던 역관 김홍륙이 탐오한 죄로 귀향을 가게 되자 국왕을 죽이려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커피가 일반에게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1902년의 일로 손탁호텔 커피숍이 시조다. 신상품 가운데 특별히 주목을 끈 것은 약품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금계랍’과 ‘소독환’인데 금계랍은 하루 걸이로 앓는 학질(말라리아) 치료 특효약이었고, 소독환은 매독과 습진 치료제였다.
금계랍은 예전부터 있었던지 ‘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틀에 한 번 앓는 학질은 속칭 당학(唐 )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했다. 나이든 남자는 10명 중 4~5명이 죽고 힘센 소년도 수년 동안 폐인이 되었다. 이에 ‘우두가 나와 어린이가 잘 자라고 금계랍이 들어와 노인들이 명대로 살게 되었다’라는 노래가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지금도 60대 노인 팔둑에는 우두 자리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