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는 신오복(新五福)이란 게 있단다. 요즘이야 40대 같은 70대 노인이 수두룩하니, 몇 살부터 노년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고 건(健), 처(妻), 재(財), 사(事), 우(友). 첫째는 건강, 둘째 인생의 동반자가 살아 있고, 그 다음 적당한 재산이 있고, 하는 일이 있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친구란 이야기다.
주향백리(酒香白里), 화향천리(花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라고 했던가. 요즘 한 해를 정리하는 시기이고 보니, 며칠 전 잔칫집 도시락이 아닌 귀빈으로 아내를 동반한 망년모임이 있었다. 지난해만 해도 고깃집에서 소주와 맥주를 섞어 주거니 받거니, 노래방도 순회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꽤나 두서가 없었는데, 올해는 얌전하게 포도주에 스테이크... 이유야 어찌됐든 한 해 세월이 인위적으로 품위있는 자리로 만들어졌다.
사실 이해관계가 엇갈리거나, 아니면 업무적으로 인연을 맺어 갑(甲)과 을(乙), 을(乙)과 갑(甲)의 관계는 긴장을 완전히 풀 수 없어 꽤나 신경 쓰이는데 모임을 갖기 전후 모두 피곤하다. 혹시 실수한 건 없는지...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그러나 환갑을 전후해 내외간에도 일 년에 한 두 번 얼굴을 마주칠 기회가 있어 아내로부터 머리나 옷타령을 들을 필요가 없는 순수한 모임인데... 이름하여 일송회(一松會).
알고 봤더니 망년회(忘年會)회란 말은 일본식 표현이다. 일본은 1400년 전부터 연망(年忘)이라고 해서 괴롭고 슬픈 일을 털어버리는 세시풍습(歲時風習)이 있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은 왜색(倭色)이 짙다고 망년회란 말을 버리고 송년회를 주장하는데...
일송회의 특징은 망년지교(忘年之交)다. 이 말은 나이 차가 나더라도 서로 그 인품을 보고 사귀기 때문에 나이와 관계없이 대등하게 대하는 걸 뜻한다. 보통 친목모임에 보면 나이 많은 사람이 좌장(座長)이 돼 매사를 결정하고 또 전직 벼슬 높은 사람이 좌지우지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송회는 입회동시에 말을 튼다.
학교 동창회가 아닌 다음에야 환갑 전후의 나이에 이름을 부르는 모임이 어디 그리 흔한가? 이래서 더욱 정감이 가는데... 모임의 구성원도 소위 정부미(政府米-공무원 출신)가 주축인데 이젠 1명 빼고 모두 일반미가 됐다. 친구들 자랑 같아서 혹시 고깝게 들으실지 몰라도, 자기분야에서 모두 일관된 노력을 하며 분야에서 정상 아니면 바로 그 근처까지 올라간 사람들이다.
1명씩 돌아가면서 건배제의를 하기로 했는데 평소에 말이 별로 없던 친구가 마이크를 잡더니 “훌륭한 성행위!”라며 좀 파격적인 구호를 외쳤는데, ‘훌륭한 성공과 행운을 위하여’ 이 말을 줄인 거란다. 무엇이든지 물꼬트기가 어려운 법, 당장 왁자지껄했다.
“당신 멋져” 당당하게 신나게 그리고 멋지게, 져주면서 살자. 져주면서 살자, 참 멋있는 말이다. ‘껄껄껄’ 건배도 있다. 좀 더 사랑할 걸, 좀 더 즐길 걸, 좀 더 베풀 걸... 베푼다. 이 말도 멋있다. 그중에 압권은, “인생은~” 하면 “길게~” 이렇게 대답하고, “불륜은~”, “짧게~”, “사랑은~”, “길게~”
나이야 가라! 이런 건배사도 있었는지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에 연유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나이야 가거라! 가는 세월이 싫은 사람들의 건배다.
또 기억나는 게 있다. 한 친구 부인이 마이크를 잡더니, 3개 국어로 건배제의를 하겠단다.
어느 자리든지 자기의 유식함을 감추는게 서툰 사람이 있는데, 혹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을 했다. 영어, 불어, 독어로 선창을 하겠단다. 원샷(영어), 좋아불어(불어), 멋찌당케(독일어)! 정말 멋있었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앞으로 댄스스포츠에 더욱 매진할 것을 결정했다. 웬 댄스스포츠 했지만 부부가 함께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댄스 밖에 없다나? 결국 전 회원 제비화로 결정했구나 하면서 웃어 제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역대 가장 낭만적인 건배라는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카트가 잉글리드 버그만에게, “당신의 눈동자를 위해(Here's looking at you, kid) 건배”라고 했던 장면을 흉내내었더니 아내는 “웬 주책” 이런 핀잔을 했지만 싫지않은 표정이었다.
이렇게 한 해가 가는구나... 그리고 ‘인향만리’, 참으로 좋은 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