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돈 ‘99엔’은 우리나라 돈 1300원쯤 된다. 일본 정부는 1944년 14세 때 일본으로 끌려가 미쯔비시(三菱) 중공업 공장에서 강제 노역하다 광복 후 귀국해 ‘후생연금 탈퇴수당 지급청구’를 했던 임금덕(80) 할머니 등 7명에게 각각 99엔씩을 지급했다. 그것도 1998년 일본 후생성에 청구한지 11년 만에야 “11개월간 후생연금에 가입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대리인 구좌에 입금한 것으로 밝혀졌다.
임금덕 당시 소녀를 일본으로 강제로 데려간 법적 근거는 조선총독부가 제정 공포한 ‘국민총동원법’이었다. 이 법은 1944년 2월 공포된 징용제와 마찬가지로 12세 이상의 남녀를 일본 내 광산과 군수공장에 강제 취업시켜 노동력을 착취한 악법 중 하나다.
일본이 1941년 선전포고 없이 대미(對美)전쟁을 벌이면서 만든 악법은 한 둘이 아니었다. 1941년 2월 소위 내선(內鮮)일체정신대를 조직해 소학교 6학년 조선인 졸업생 600명을 일본의 공장과 사업장에 파견한 것도 모자라, 각급 학교 학생을 연중 30일 동안 근로봉사를 시켰다. 근로봉사에 동원된 학생들은 솔방울 따기, 도로 닦기, 제초작업, 농사짓기, 심지어 군수공장에 가서 잡역까지 해야만 했다. 1942년 1월 총후(銃後)정신대를 결성하고, 1943년 1월에는 보국(報國)정신대를 조직해 미국과의 확전에 대비하였다. 3월 1일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를 시행하여 젊은이들을 싸움터로 내몰았고, 10월 20일에는 일본 육군성이 조선인 학생의 징병유예를 폐지, 학병제를 단행했다.
1944년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최후 발악 단계에 접어든다. 소위 ‘총동원법’을 발동하면서 전면 징용을 단행하는데 임금덕 할머니 등도 이 때 ‘근로정신대’란 이름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것이다. 같은해 8월 23일 여자정신대 근무련을 공포하면서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을 일본과 남양군도로 끌고가 굶주린 성욕의 출구 역할을 강요했다.
억울한 일은 당한지 65년 만에 달랑 ‘99엔’을 탈퇴수당으로 주었다니, 일제 식민지의 탈색은 아직도 먼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