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가족부가 최근 국민기초생활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인권침해 소지가 다분한 내용을 고시해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기초보장급여를 받는 조건에 용모나 집중력·자신감 같은 자의적인 평가기준을 넣고 기초지방자치단체장이 이를 판단토록 했다.
보건복지부가 질병으로 일할 능력이 안돼 정부지원을 신청하는 극빈층에 대한 심사를 강화하면서 불합리한 기준을 도입해 말썽을 빚고 있는 것. 판단 기준이 지나치게 자의적인데다 인권침해 소지마저 있어 빈곤층이 피해를 볼 것이라는 게 비판의 요지다.
◆ 근로능력 판정때 ‘공무원 평가’ 도입
보건복지가족부는 지난 1일부터 시장 등 기초자치단체장이 근로능력평가로 국민기초보장급여 수급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조항을 삽입한 국민기초생활법 시행령을 시행했다. 시행령은 질병이나 부상 또는 후유증으로 요양이 필요한 기존 수급자격에 ‘근로능력평가를 통해 시장 등이 근로능력이 없다고 판정한 자’라는 내용을 신설했다. 근로능력 평가 기준이나 방법·절차는 복지부장관이 고시토록 했다.
지난해까지는 기초생활수급자 판정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신청자가 근로가 가능한가 여부를 따질때, 신청자가 의료기관에서 받은 의학적 평가가 근로가 힘들다고 명시돼 있으면, 질병 부상으로 인해 근로능력이 없는 자로 인정해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인정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여기에 더해 시·군·구 공무원이 열 개 항목으로 수급자를 직접 평가하는 활동능력 평가기준이 도입돼 기준이 까다로워진다. 또한 할동능력까지 만족해도 일을 해야 기초생활급여가 지급되고 의료급여도 2종으로 분류돼 진료비 부담이 늘어나는 등 혜택은 줄어든다. 특히 공무원의 활동능력 평가를 추가함으로써 평가에 주관적인 요소가 끼어들 여지를 키웠고, 복지부가 제시한 심사기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올해 새로 도입된 시·군·구청 공무원의 평가내용을 보면 평가기준은 모두 10개 항목이며, 각 항목마다 0~4점의 점수를 매기게 돼 있다. 문제는 이들 항목에 대한 평가가 제멋대로 이뤄질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외모관리의 경우 ‘외모가 혐오감을 주거나, 심한 냄새가 난다’는 0점, ‘철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옷이 늘 더럽다’는 1점,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고, 늘 같은 옷을 입는다’는 2점 등으로 점수가 정해져 있다. 또 집중력 항목은 ‘산만해 한 가지 일을 마무리 해본 것이 거의 없다”는 0점, ‘한자리에서 오래 앉아 있지 못한다’는 1점이며, 자신감 항목은 ‘자포자기’ 0점, ‘작심삼일’ 1점 등으로 평가하게 돼 있다. 낮은 점수를 받을수록 근로능력이 없는 것으로 인정받는다.
이는 결국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일부러라도 외모와 행동을 초라하게 꾸미도록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이런 기준이 명백한 인권 침해라고 지적하고 있다. 외모와 행동에 따른 편견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또 시·군·구청 공무원이 기초생활수급자의 근로 능력을 판정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들 공무원이 기초생활수급자들과 꾸준히 만나면서 생활 실태를 직접 챙겨도 쉽지 않은 일인데, 형식적인 평가로는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권침해·자의적 판단 기준 논란
참여연대는 지난달 31일 고시된 보건복지가족부의 ‘근로능력평가 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폐지 또는 객관적인 조건부 수급기준으로 전면개정하라”고 정책 권고해 줄 것을 지난 7일 요청했다.
참여연대는 공무원들이 기초생활수급자 활동 능력을 평가하는 항목별 기준에 ‘외모가 혐오스러운지’ ‘산만한지’ ‘자포자기하는지’ 등이 추가됐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나열해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전은경 팀장은 “항목 기준들이 대체로 수급자는 ‘더럽다’ ‘무능하다’는 사회적 편견을 줄 수 있는 등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며 “수급자 처지에서는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근로능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기를 원할텐데, 이는 정부가 앞장서 가난한 이들에게 ‘평소에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고 자포자기 생활을 하라’고 부추기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은 “수급자를 전혀 만나본 적도 없는 시·군·구청 공무원이 ‘산만하다’ ‘작심삼일’ 등의 기준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며 “자의적인 해석으로 빈곤층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비판했다.
이 단체는 또 현행 근로능력 판정제도는 중증장애인을 일률적으로 ‘근로 무능력자’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일하고 싶은 중증장애인에게 근로 기회를 박탈할 여지가 있어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충돌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진단방법 표준화· 재심사 절차보안 필요
보건복지부는 평가 방식을 바꾼 건 지원대상자를 줄이기 위한 게 아니라 심각한 부정수급자들을 걸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원이 필요 없는 사람들을 걸러냄으로써,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하겠다는 취지이다.
보건복지부는 복지 체계의 합리화는 복지예산 증액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인권단체와 장애인단체들은 보건복지부의 평가기준은 부정수급자를 걸러 내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며 수급자들에게 굴욕감을 주는 등 인권침해 소지만 높아 효율성도, 합리성도 없는 공무원 평가를 당장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권활동가들은 질병이나 부상 때문에 일할 수 없는 지 여부 판단은 전문 의료인의 몫이지 공무원들이 면담을 통해 심사할 성격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비전문가인 공무원이 개입할게 아니라 진단 방법 표준화 또는 재심사 절차 보안 등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