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선망의 대상이 되는 부러운 친구가 반드시 한두 명 있는 법이다. 고등학교 동창 가운데 말솜씨 싹싹하고, 노래 잘 부르고, 공부도 고만고만하고, 적당한 용돈도 조달해 줄 부모가 있고... 이런 3박자, 아니 4박자를 모두 갖췄으니 단연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요즘 말로 ‘짱’인 친구가 있었다.
대기업에 무난하게 입사하더니 영국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친구 가운데 가장 먼저 자기 집을 마련했다. 하여간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회사의 주요부서 부장(部長)으로 일했는데 상사와 갈등으로 끝내는 회사를 그만 두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그 친구는 골프 티칭프로, 부인은 YWCA 수영강사. 이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국내 출장을 며칠 다녀와서 집에 도착하면 그렇게 포근할 수 없고, 단기간 외국출장의 경우에도 광고 문구처럼 “집 나오면 개고생”이란 말이 혀끝에 맴도는데 하여간 그 친구의 결단에 우리 모두 놀랬다. 찬사와 우려가 반반씩 섞어 조촐한 환송연을 하고 떠났다.
어찌됐건 그 당시 우리에겐 선구자였다. 일년에 한 번 오는 엽서배경은 푸른바다, 요트, 한가로운 낚시풍경. 하여간 팔자좋은 친구, 부러운 친구였다. 엽서 내용은 뉴질랜드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얼마나 자기 생활에 충실한지...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어 보니 새삼 ‘우정’이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다는 소감이 우리를 감격시켰다.
덧붙여서 꼭 놀러 오너라, 체류경비는 신경쓰지 말고...
그러나 친구를 만나러 며칠씩 직장을 비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간간히 직장생활이 힘들 때 나도 한 번 떠나봐? 이런 막연한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지난해 추석 느닷없이 귀국했다. 약간은 날씨가 선선했는데 완전히 여름옷이다. 추워 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나 완전히 귀국했으면 싶다. 뉴질랜드의 이민법이 까다로워져서 한국학생들 유학도 옛날보다 훨씬 줄고 경제적으로 힘들어 졌다. 그리고 나이도 들다보니, 내가 한국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낚시도 하루이틀이지... 그래 맞다! 생산이 없는 일 얼마나 무료하고 한심스러운지 짐작이 갔다. 국내 사정도 어려운 판에 몇 군데 문을 두드려 봤지만 속시원한 대답은 듣지 못하고 출국 며칠을 앞두고 저녁을 했다. 뭔가 잘못됐다.
이국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죽어서 뼈 묻을 곳이 아니여서일까? 눈물만 보이지 않았을 뿐, 자기인생을 실패로 단정하는 것 같아 무슨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희뜩은 이야기로 술자리를 끝냈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해외로 이민을 떠났다 돌아오는 역(逆)이민자가 많이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7080시대 해외로 떠났던 이민세대들이 노후를 고국에서 보내려고 ‘유턴’하는 경우도 있고 국력신장으로 기회가 많아진 한국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려는 젊은층도 증가한단다. 2008년은 영구귀국 신고자가 3천700명, 2009년은 4천300명. 전년 대비 14.3%가 늘어난 셈이다.
사실 우리 이민역사의 배경에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이 존재한다. 1903년 지금부터 약 100년 전, 배 타고 열흘이 넘는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굶주림은 벗어났다고
하지만 외로움을 어떻게 이겼을까? 오죽했으면! 당시 이민 모집광고에 ‘학교무료,영구적인 직업보장, 법률의 제반보호, 대한(大韓) 돈으로 월 57원 보장(15$), 농부들이 유숙(留宿)하는 집과 땔감, 식수(食水)보장, 병을 치료하는 경비 주인부담...’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작고했지만 이 분들의 조국에 대한 헌신, 독립자금을 모아 미국의 국민회 본부로 송금을 하고 크고작은 일본 규탄대회를 열고... 해방이 되자 피눈물로 기쁨을 맞이했다는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먹고있는 달콤한 과일은 이민갔던 어른들이 뿌린 씨의 결실인지 모른다.
역사는 돈다고 했다. 이민을 갔다가 다시 귀국하는 역이민 현상도 커다란 역사의 윤회(輪廻)의 한 부분일까? 하여간 이민을 간, 우리 모두가 부러워한 그 친구... 영화 박하사탕의 절규 “나 돌아갈래...” 가슴이 아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