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에 이어 한파가 계속되면서 삼한사온은 무색해지고, 좀처럼 얼지 않던 한강이 꽁꽁 얼어붙어 동토(凍土)의 계절을 실감하게 한다.
영하의 혹한은 겨울나기를 어렵게 하지만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못 참을 일도 아니다. 아무튼 얼음은 추운 겨울의 표상이면서 생명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겪는 시련의 상징이다. 조선 시대에는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으면 조정에서 동대문 밖 사한단(司寒壇)에 모셔놓은 북방신이면서 동신(冬神)이자 빙신(氷神)인 현명(玄冥)에게 기한제(祈寒祭)를 지냈다.
그래도 얼음이 얼지 않으면 현명을 높여 ‘현명씨’라 부르고, 신위(神位)도 5위로 특진시켜 얼음을 갈망하였다. 그래서 한강이 얼면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했다가 춘분에 개빙제(開氷祭)를 지낸 후 얼음을 꺼내 어전에 올렸다. 하지만 얼음을 떠내 빙고에 보관하는 일은 애꿎은 백성들 몫이었다. 때문에 겨울이 오면 한강변의 장정들은 부역을 피하기 위해 부락을 떠났고, 사내들이 집을 비우다 보니 때아닌 청상과부가 생겨 빙고청상(氷庫靑霜)이란 말이 생겨났다. 또 빙고의 얼음을 눈물의 얼음, 즉 누빙(淚氷)이라고 했으니, 얼음 떠내는 부역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짐작할만 하다.
채빙(採氷)은 신라 지증왕 때 처음 시작됐다. 빙고를 맡아 보는 관아를 빙고전(氷庫典)이라 했고, 고려 시대에는 빙고를 열 때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냈다. 개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평양에 빙고를 마련하였다가 여름이 되면 날랜 일꾼을 시켜 개성으로 날라다 썼는데 나르는 동안에 얼음이 많이 녹으면 나라는 일꾼에게 벌을 내렸다. 조선 시대에는 얼음을 공급하는 공역을 맡은 빙부(氷夫)들을 위해 밭뙤기를 마련했는데 이를 빙고전(氷庫田)이라고 했다. 사빙(賜氷)이라 하여 가끔 노인들에게 소량의 얼음을 나눠주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체면치레에 불과하고, 힘겹게 떠낸 얼음은 왕실과 사대부 만이 쓰는 사치품이었다. 지금은 얼음을 떠내는 일도, 보관하는 일도 하지 않지만, 옛날 얼음 생각을 하면 무심히 보아 넘길 일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