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일에 작은 감명을 받을 수 있고, 작은 일도 크게 감명을 받을 수 있다. 올 정초(正初) 세가지 일이 나에게는 유달리 흐뭇했다. 지난주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딴 모태범 선수 왈, “기자들이 나만 빼고 다른 선수들에게 질문을 해 오기가 솟았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런 경우 섭섭함이 좌절로 빠져들지만, 오히려 스물하나 이 청년은 오기로 삼았다니 대견스럽고 예쁘다.
또 하나, 21년 전 약속을 아름답게 가꾸어 온 인연! 네 쌍둥이 자매가 한날 한시에 태어난 병원에 간호사가 됐다는 이야기. 이름도 예쁘다.
슬, 설, 솔, 밀. 네 자매와 이길녀 길병원 이사장의 인연. 쪼들리는 살림을 알고 “병원비는 걱정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너희들이 자라면 장차 등록금은 내가 낼 터이니.”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면 모두 길병원 간호사로 뽑아 주겠다”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 이길녀 원장이 쓴 자서전 제목이다. 경원대, 길병원, 가천의과대학 하여간 그 자서전을 읽으면서 대단한 여장부라는 감탄이 절로 나는데 “지금와서 보니 내가 그렇게 큰 일을 했어? 처음부터 큰 일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저 열심히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날 보고 일과 결혼했다고 하는데 일하다 보니 결혼 못한 것뿐이지.” 큰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사소한 약속을 잊어버리기 쉬운데, 어쩌면 작은 약속을 끝내 지키는 것이 성공한 사람들의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은 건 부산 소년의집 관현악단이 카네기 홀에서 연주를 마쳤을 때, 벅찬 감동을 느낀 청중들이 10여분간 환호성을 지르며 기립박수로 화답을 했단다. 카네기홀이 어떤 곳인가? 음악하는 사람들은 꿈의 무대라고 부른다. 부산 ‘소년의집’! 소개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상처받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맘껏 웃고 즐겁게 살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썩은 밀알’이 되는 삶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느님과 함께 하시면 보람있는 값진 삶이 됩니다.” “함께 하면 가볍고 즐거운 길입니다. 소외된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벗인 마리아 수녀회가 하는 일에 애정과 관심을···”
쉽게 말해 돈 없고, 사랑 모자라고, 부모가 없거나 형편이 어려워 부모와 떨어져 세상에 어릴적부터 힘든 짐을 지고 태어난 아이들을 모아 자칫 잘못하면 뒷골목 어두운 길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감수성(感受性) 예민한 아이들을 밝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성장시키는 종교 교육시설이다.
관심을 안주니 오기가 생겼다는 모태범 선수의 말이 떠 올랐다. “전문 오케스트라가 평소 실력의 70~80%를 발휘하면 잘했다는 소리를 듣는데 오늘 소년의집 악단은 120%를 발휘했다.” 오늘 공연은 기적이다. 어떻게 이런 사운드가 나올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는다.
이번 공연을 주관한 우리가 자랑하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씨의 말이다. 정명훈씨 이야기는 계속된다.
“4년 전 이 악단을 처음 본 순간 특별한 것을 느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줄리아드 음대에 입학할만큼 소양있는 사람은 결코 없었지만 이 유명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모였을때 결코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조화입니다. 이들은 같은 생각,같은 느낌으로 혼이 담긴 연주를 하다 보니 개인적인 힘보다 열배백배 효과가 난 것입니다.”
동정심만으로는 결코 설수없는 무대 카네기홀. 언뜻 봐서 불우청년들의 학예회(學藝會)로 간주한다면 이들에게 모독이 될 것이다.
우리가 잘아는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 김병지도 소년의집 출신이다. 부모님들이 계셨지만 키가 작은 탓에 김병지 선수를 스카우트 하는 학교가 없었던 상황에 마침 소년의집에 골키퍼가 없어서··· 고교 졸업 후 대학이나 프로에도 스카웃 되지 못해 동네 조기축구대회에서 뛰다 군대에 가서 상무팀 소속으로 활약하고 차범근 감독에게 발탁돼 울산 현대에 입단한다.
대부분이 어떤 분야에서 성공하면 스스로가 개척한 것처럼 위선을 하고, 주위에서 도와준 건 묵살하는데 김병지 선수는 휴가 때마다 찾아와 학생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자신이 떳떳하게 소년의집 출신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정초부터 흐뭇했다. 이 흐뭇함이 올 한해도 지속됐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