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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단상] 바지 입은 천사(天使) 두 분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서 전화로 손님을 찾을 때, 요즘처럼 호칭(呼稱)인플레가 되기 전에는 대부분 “무슨 무슨 씨(氏) 계세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가끔 “김 사장님, 박 교수님, 권 변호사님 계세요?” 했을 때, 모든 손님들이 전화받으러 가는 사람을 쳐다봤다.

그 가운데 단연 변호사가 돋보였다. 변호사라면 존경받는 최고의 직업이였는데 요즘 대수롭지 않게, “변호사 얼마에 샀다” 이런 말을 한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물건 취급받는 것 같아 매우 기분 나쁘겠지만,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고 불리는 시대에 몇몇 미꾸라지 변호사 처신도 문제가 있었다.

“조개는 칼로 열고, 문은 열쇠로 열고 변호사 입은 돈으로 연다” 서양 속담이다.

국선변호사(國選辯護士) 공모에 와글와글 하단다. 사법연수원 백수시대(白手時代)이고 보니, 올해 경쟁률이 16.6대 1이라고 한다. 아이고, 똑똑하면서 불쌍한 분들!

나에겐 두 분의 변호사가 머릿속에 남아 있다.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착한 바지 입은 천사 두 분! 월파 계철순(桂哲淳) 변호사. 일제 강점기 때, 판사로 시작, 6.25 때는 법무장교(대령), 교수(경북대법대학장), 총장, 변호사, 화려한 이력이다.

지금은 지방 민방(民放)에서 중견 사원으로 일하는 후배가 주례선생님으로, 계철순 씨 섭외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어느 날, 천원짜리 밥집에서 오후 1시가 넘어 마주쳤다. 윗목에서 혼자 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는데 키가 큰지라 뒤에서 보아도 외로움이 물씬 풍겼다. 알 듯 모를 듯한 사람이 와서 돈을 내고 가버리고, 그렇지 않으면 나이 탓인지 모두들 어려워해서… 일부러 혼자서 때 늦은 점심을 드신다고 했다. 조심조심 주례를 부탁했더니, 조용하면서 겸손하게 거절하셨다.

온갖 말로 설득하였는데 사례비는 2만원을 넘기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았다. 주례 내용은 “심각한 부부 싸움을 하더라도 의(義)로운 일은 절대 양보하지 마라.” 당시로는 파격적인 말씀이었다.

“법정에 들어가면 손자 벌 되는 판사에게 최경례(最敬禮)를 한다. 그것은 국가의 이름으로 재판을 하는 판사의 직책에 관한 존경이다.”

가끔 전직(前職)이 아직도 사라져 버린 직책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노추(老醜)! 참으로 학(鶴) 같은 분이셨다. 하늘나라에서 평온한 얼굴로 주무실 것이다. 새삼 명복을 빈다.

또 한 사람의 변호사는 일본인이다. 박열 의사, 일황 암살 기도로 사형을 받은 열혈 혁명가이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무권력주의가 아닐까?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減刑)을 받는데 변호사는, 후세 다츠지(布施辰治)란 분이다. 농지 수탈로 식민지의 농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다 못해, 혈서를 써서 현해탄을 건너 후세 변호사에게 호소하자, 직접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실태 조사를 했다.

그 당시, 그를 얼마나 구세주처럼 여겼는지 그의 강연회를 알리는 신문 광고에, “왔다! 왔다! 후세 선생. 일찍 가서 들어 보세.” “그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며, 조선의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한다. 그것은 세계 평화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후세 변호사를 일제가 가만히 둘리가 없다. 치안유지법인가 뭔가를 적용시켜서 두 번이나 투옥시켰지만… 여론은 후세 변호사 편이었다. 세월은 달라도 어딘가에는 의인(義人)이 있기 마련인 모양이다.

오랜 법정 다툼 끝에 대심원(우리나라의 대법원) 공판에서 박열 의사는 의자를 재판관과 같은 높이로 해 달라는 등 그들로 보아서는 턱없는 요구를 했다. 후세 변호사의 노력으로 모두 승낙을 받았다.

후세 변호사의 좌우명은, “살아야만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만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 참으로 거룩한 말이다.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훈장(建國勳章)을 받았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왜인들 가운데 이런 분도 있다는 사실……. 소인국(小人國)의 유일한 거인(巨人)!

이야기가 다시 국선 변호사로 돌아간다. 국선(國選)이던 사선(私選)이던 모름지기 계 변호사의 표표한 달관된 인생관, 후세 변호사의 쇠보다 강한 신념을 닮아야 그 동안의 각고(刻苦)와 맞바꾼 변호사란 직업의 성취감을 맛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저 높은 곳에 떠있는 고고한 보름달이 되던지, 땅에 깔린 동전 한 닢이 되던지 스스로의 운명은 자기가 결정짓는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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