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91년째다. 3.1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기폭제였다. 이보다 앞서 우리의 독립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조선 말기의 의병 투쟁이었다. 이 때의 의병 투쟁은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 의병은 188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 등을 강제 시행한 을미개혁 이후의 을미(乙未)의병, 제2기 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한 을사(乙巳)의병, 제3기 의병은 1907년 정미7조약 및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자극받아 일어난 정미(丁未)의병이다. 을미의병은 창의소(倡義所) 설치로 시작됐다. 1885년 11월 충청도 제천과 유성에서 유인석과 문석봉이 ‘거의토적(擧義討賊)’의 기치를 들었고, 1896년 1월 박준영을 대장으로 한 경기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 이홍응 등의 포천 의병부대, 김한복의 충청 홍주, 이소응 중심의 강원 춘천, 곽종석 등의 경상도, 허위(許蔿) 등의 김천과 성주, 기우만의 전라도까지 의병활동은 전국화됐다. 이 때 창의 군사들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찌(長谷川好道)의 머리에 칠(漆)을 발라 술잔을 만들고,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의 두육으로 회(膾)를 친다”고 했으니, 그 적개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 했다.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은 일본군과 국지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독립군에 견줄만 했다. 일제는 후기에 접어들면서 의병 항쟁이 가열해지자 1907년 일본 본토에서 육군 14연대를 조선에 파견하고, 이른 바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대공세는 매우 가혹했다.
군비조달과 보급이 여의치 않게 된 의병활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뤄지면서 통한의 패배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순국하거나 희생된 독립투사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항일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 중심의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고, 1912년에는 윤세복, 신채호 등이 중심이 된 대한광복회가 지하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1918년 뜻을 접었지만 이듬해 3월 1일 독립만세를 외치니, 제국주의 타도의 사자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