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만 되면 우리를 ‘자극’하는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한쪽 마음은 자극에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을 하면서도, 휘둘리지 않을 만큼의 정보도 기준도 철학도 갖고 있지 않기가 십상이다. 이성과 합리성을 마비시키는 자극은 분노와 놀라움, 부풀리기, 흠집내기, 음모, 모략, 이념적 특성 등 다양하기도 하다. 매번 같은 내용이 반복되기도 하지만 시대를 달리하며 선거의 쟁점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오십 언저리에서 그간의 선거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유쾌함 보다는 뭔가 불편했던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내가 투표한 후보의 당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표까지 가는 과정에서 겪었던 유쾌하지 못한 선거의 기억들이 무의식으로 잠재돼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불쾌함은 내 의식을 잠식해서 선거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고, 선거 이후 벌어지는 모든 책임은 유권자에게 부메랑 되어 생활의 불편함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놓치며, 무의식 속으로 밀쳐내 버렸던 기억이 수차례다.
선거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조직이나 집단에 있어서 특정 지위에 취임할 사람을 그 조직이나 집단 구성원들이 집합적인 의사 표시를 통해 선정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정부수립과 함께 치러졌던 수많은 선거들은 많은 이들을 정계입문이라는 ‘입문의례’ 절차를 통해 지역공동체, 혹은 민족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책임, 권한, 권력 등을 위임했다.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마련한 칼 융 박사에 의하면 입문의례(이니시에이션)의 형식은 고대사회나 신화 속에서 혹은 현대의 미개사회 의식에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이러한 입문의식은 일생을 통한 발전단계(유아기 초기에서 후기로, 청춘기 전기에서 후기로, 청춘기에서 성인기로, 성인기 초기에서 중년에 이르는 과도기, 중년기에서 노년기로 이행하는 단계 등) 곳곳에서 일어난다고 봤다.
부족 단위의 집단에서나, 보다 복잡한 사회에서나, 인생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개인에게 통과제의를 베풀어 준다고 보았다. 이 의례는 항상 상징적인 죽음과 재생을 경험하며 강조한다. 또한 입문의례(이니시에이션)의 과정은 무모한 야심이나 욕망은 포기하고 집단이 부여하는 고통의 길을 따를 것을 강요당한다. 해서 이를 따르는 자는 영광의 희망도 없이 시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겸허의 미덕을 배우기도 하며, 입문의례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집단이 요구하는 ‘복종’과 집단의 공동생활이 자기에게 맡기는 역할에 몰입하는 것 등으로 이어진다.
선거를 ‘입문의례’의 한 절차로 비교하는 것이 딱히 내용이 맞아서 라기 보다는, 칼 융 박사가 말한 무의식중에는 개인이 체험하고 억압한 것 외, 어느 종족집단이 오랜 세월을 통해 체험한 것이 누적돼 종족의 성원이 공유하게 된 무의식도 있다고 주장하고, 전자를 개인적 무의식, 후자를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빌리고자 함이고 당선의 입문의례를 거친 이들에게는 공동체를 위한 당선자의 역할 과정을 엿보고자 함이다.
혹여 처음 시작하는 새내기 유권자들이나 오랜 유권자들이 자신이 경험하고 체득된 의식과 다르게 생각한 것들을 자신의 무의식 속으로 깊숙이 감추거나 억압했던 것들이 있다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개인적인 무의식과 집단적인 무의식이 돼 어떤 ‘자극’에 의해 표출돼 의식을 삼켜버린다는 것이다.
입문의례자들이 매 과정에서 겪었던 상징적인 ‘죽음과 재생’은 지금 막 통과의례를 지나온 당선자들이 지역공동체를 위해 민족공동체를 위해 어떤 결의와 활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미치기를 바란다.
입문의례의 또 다른 상징인 공동체에 대한 ‘겸허한 미덕과 복종’, ‘무모한 야심이나 욕망을 포기하고 집단이 부여하는 고통의 길을 따른다’는 것을 성실히 실천할 때 당선자 개개인은 활동을 통한 지속적인 ‘입문의례’의 과정을 경험하게 되며 이는 지혜로운 지역의 일꾼이 탄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유쾌한 집단무의식’을 선물할 당선자들을 축하하며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