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小暑)가 지나면서 무더위와 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농촌에서는 김매기에 한창일 때로 비라도 내리면 하루 공치는 날이고, 막걸리 추렴이라도 하며 힘든 농사일을 견뎌내곤 했다. 이 때쯤이면 유난히 밀가루음식이 당긴다고들 한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한 번쯤 여름철에 땀을 뻘뻘 흘리며 칼국수나 수제비를 먹던 추억이 있다. 선친께서는 칼국수를 ‘장국’이라 부르며 즐기셨는데, 밀가루를 반죽해 홍두깨로 얇게 민 다음 애호박을 숭숭 썰어 넣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먹었다. 비록 먹을 것이 흔한 요즘이지만 바지락이나 멸치로 낸 국물도 아닌, 그저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췄을 뿐인데도 산해진미(山海珍味)가 부럽지 않던 시절이었다.
‘도문대작(屠門大嚼)’이란 말이 있다. ‘도살장 문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뜻으로 탐내고 부러워하는 바를 실제로 가질 수는 없지만 얻은 것처럼 만족하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許筠,1569~1618)에게도 같은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은 1611년(광해군 3년) 허균이 바닷가인 전라북도 함열(咸悅)로 귀향 가 있던 시기에 지은 것으로, 유배지에서 거친 음식만을 먹게 되자, 이전에 먹었던 맛있는 음식을 생각나는 대로 서술했다. 허균의 별미(別味)노트인 이 책에는 강릉의 방풍죽(防風粥)과 개성의 석이병(石耳餠), 죽실(竹實), 웅지정과(熊脂正果) 등 병이류(餠餌類) 11종, 강릉의 천사배(天賜梨), 전주의 승도(僧桃) 등 과실류 28종, 곰발바닥(熊掌), 표범의 태(豹胎), 사슴의 혀와 꼬리 등 비주류(飛走類) 6종 등 이름도 생소한 음식과 어패류, 그리고 각종 채소를 원산지와 더불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실국수를 설명하면서 중국의 오동(吳同)이라는 사람이 이를 잘 만들었기 때문에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고 적어 오늘날의 우동이 일본식이 아님을 말해준다.
귀양살이의 궁박한 가운데서도 좋은 시절을 떠올리며 ‘맛의 무릉도원’을 거닐었을 허균은 과연 대단한 미식가였다. 허균처럼은 아니더라도 비 내리는 여름 날, 옛날을 추억할 겸 좋은 사람들과 더불어 파전에 막걸리라도 곁들이면 어떨까 싶다./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