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이 제 모습을 찾았다. 광화문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돼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됐으나 1425년(세종 7년)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 이름을 바꾼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에서였다. 이처럼 경복궁의 정문으로 서울의 중심에 자리 잡은 광화문은 조선왕조 600년 영욕의 역사가 오롯이 서려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진 광화문은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중건됐으나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조선총독부 건물에 밀려 지금의 민속박물관 부근으로 이건(移建)되는 수난을 겪는다. 원래는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일제가 민족정기를 훼손하기 위해 남산에 신궁을 짓고 그쪽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방향을 틀어버렸다. 한국전쟁으로 복층 누각인 문루가 모두 불에 타 돌기둥만 남아있던 광화문은 1968년 박정희 정권 때 변형된 모습으로 복원된다. 건물은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로,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현판으로 바뀌었고 당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 축에 맞추면서 원래 위치에서도 벗어난다.
광화문이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고는 해도 아쉬움은 남는다. 바로 현판의 글씨 때문이다. 이는 문화재청이 2005년 1월 박 전 대통령의 한글 현판 교체를 추진하면서도 논란이 됐었다. 유홍준 당시 청장은 정조의 어필(御筆)이나 추사와 석봉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한자 현판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이에 한글 관련 단체와 정치권 등에서 현판을 한글로 해야 한다거나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등의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다 1916년께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판의 유리원판 사진이 고종 중건 당시 훈령대장 겸 영건도감제조 임태영(任泰瑛)의 글씨로 드러남에 따라 이를 그대로 각자해 걸었다. 여기에 꼭 그래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는 명백한 복제품이다. 굳이 복사해 걸 이유가 있었는지. 한글로 된 현판도 하나의 역사인데 어쩐지 씁쓸하다./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