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자를 존경하지만, 공자의 어디가 존경할 만한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난쟁이가 사람들 틈에서 연극을 구경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잘 한다는 소리에 덩달아 따라 하는 장단일 뿐이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서 짖었던 것이다”. 유교의 전제(專制)에 맞선 중국 사상사 최대의 이단아로 불리는 탁오(卓吾) 이지(李贄,1527~1602)의 통렬하고도 직정적인 고백이다.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은 일찍이 중인층 예술인들과 함께 벽오사(碧梧社)를 결성해 ‘조선적’ 문인화의 세계를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이념 보다는 기량을 중시하는 수예론(手藝論)을 화론(畵論)으로 내세웠다. 당시는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중국 남종 문인화가 화단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추사의 제자로 알려진 우봉은 ‘불긍거후(不肯車後)’, 즉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겠다’는 정신으로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여기엔 추사가 유배지 제주에서 서자인 상우에게 보낸 편지가 한 몫을 했다. ‘난초를 치는 법은 또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중략) 조희룡 같은 무리는 나에게서 난초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칙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는 그의 가슴속에 문자의 향기가 없기 때문이다’. 추사는 전통적인 남종 문인화의 문자향과 서권기를 중요시 한 반면에 조희룡은 이에 못지않게 그림 그리는 손재주(手藝)를 중요시했다. 문자향과 서권기만으로는 좋은 문인화를 그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지금도 일을 처리할 때 걸핏하면 ‘전례에 비추어’라든가, ‘전례가 없어서’를 마치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내세운다. 정치권에서는 DJ서거 1주기를 맞아 ‘유훈정치’라는 말이 나돈다. 도대체 왜 과거에 얽매여 의존하려 드는가. 이래서는 개인이나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없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돼서야 자신의 학문이 맹목적이었음을 통탄하며 유교에 맞선 탁오와 추사의 모욕에도 ‘불긍거후’의 정신으로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한 우봉처럼 과거를 딛고 일어서야겠다는 ‘앞선 생각’은 이래서 필요하다.
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