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출신의 민족운동가인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 선생을 기리기 위한 ‘민세상’이 제정됐다는 소식이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민족운동가로 9번에 걸쳐 7년 3개월 간 옥고를 치른 선생의 ‘신(新)민족주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이 상은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평택시와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사회통합’과 ‘학술연구’ 등 2개 부문에 걸쳐 선생이 태어난 11월 30일에 시상한다고 한다.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민족운동가요, 정치인, 언론인, 그리고 역사학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공부를 하다 사마천의 ‘사시(史記)’를 읽고 감명을 받아 “나는 조선의 사마천이 되겠다”는 다짐은 선생이 1937년 중·일 전쟁 당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와 정인보 선생과 함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교열 간행하고, ‘조선상고사감’과 ‘조선통사’ 집필로 이어졌다. 선생의 마지막 감옥생활도 1942년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을 지원하다 제자인 국어학자 이희승과 함께 한 감옥살이다. 또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한국사의 특수성이라는 측면에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식민사학을 비판했다.
선생의 아호인 ‘민세’는 ‘민족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민족으로’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처럼 선생은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하며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후에도 민족의 통합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전 생애에 걸쳐 민족의 통합을 위해 노력한 선생은 지난 1927년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총무간사를 지냈으며, 광복 후엔 극도의 대립양상을 보이던 좌우갈등 속에서도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며 통합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저변에는 그가 꿈꾸던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라는 신념이 있었다. 이는 좌우도 계급도 뛰어넘는 진정한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민족통합 노력은 ‘다사리’ 정치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치는 ‘다사리’이다. 전 인민 각 계층의 ‘나’와 ‘나’를 ‘다 살게’ 하는 것을 말한다”던 선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납북되면서 잊혀진 인물이 됐다.
최근 들어 선생의 업적이 재조명되면서 지난해 8월 기념사업회가 결성된 데 이어 10월에는 독립기념관에서 어록비 제막식을 갖기도 했다. 이미 반세기도 훨씬 이전에 ‘사회통합’을 강조했던 선생의 혜안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소통’과도 일맥상통한다. 모쪼록 이러한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는 상인만큼 큰 울림으로 이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