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다름아닌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로 송환하는 일이었다.
이듬해 6월, 그렇게 일본에서 찾아온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의사의 유해를 백범은 직접 부산으로 내려가 정중히 맞이하고, 효창공원에 안장한다.
그리고 묘역 앞에 손수 쓴 휘호를 바친다. ‘유방백세(遺芳百世)’, ‘꽃다운 향기여, 영원하라’ 이후 그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지혜를 구한 ‘삼의사 묘역’, 그리고 그 옆에 묘비도 없는 네 번째 묘. 이른바 유해도 없이 봉분만 있는 허묘(虛墓)인 그것은 유해를 곧 찾을 것이라 믿었던 백범이 미리 준비해 놓은 안중근 의사의 것이었다. 하지만 백범은 네 번째 묘의 주인을 찾지 못한 채 1949년 삼의사 묘역 옆에 잠든다. 생전에 남긴 글씨마다 잘린 네 번째 손가락을 자랑스럽게 남긴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이로움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줘라.’ 그는 이를 대의명분으로 풍전등화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거 후 다섯 달 만인 1910년 3월 26일, 안 의사의 사형을 집행하고 곧바로 뤼순(旅順)감옥 인근에 매장한 일본 관리들은 기생들을 관사로 불러 질펀한 잔치를 벌였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보훈처가 지난 25일 공개한 만주일일신문과 만주신보에 실려 있다. 두 신문은 당시 기사에서 ‘3월26일 안중근의 매장이 끝났다는 보고가 있은 지 얼마 후 5시에 안중근 재판의 최고책임자인 뤼순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요시토(平石義人)관사에서 안중근사건 관계자 위로만찬회라는 이름으로 축하연을 개최했다’며 참석자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정부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지난 2008년 남북 공동으로 발굴작업에 나섰지만 유해는 물론 위치조차 찾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국제심포지엄’에서 안 의사의 유해가 매장된 곳으로 알려진 뤼순감옥 터에 현재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 유해가 이미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이 제기됐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