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양이 발달한 과학문물을 앞세워 동양으로 진출하자, 한중일 3국은 각자 ‘동도서기(東道西器)’, ‘중체서용(中體西用)’, ‘화혼양재(和魂洋才)’론으로 맞선다. 즉 자신들이 서양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도덕과 사상을 바탕으로 과학기술만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화에 성공해 제일 먼저 근대화를 이룬 나라는 일본이었다. 1천엔부터 1만엔까지 4종인 일본 지폐에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절에 활동한 작가와 학자의 초상이 고루 들어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액권인 1만엔권에는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초상이 들어 있다. 후쿠자와는 1860년 미국을 최초로 방문했던 일본 사절단에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 1861년에는 막부(幕府)의 유럽 사절단 일원으로 약 1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이런 경험으로 일찍이 유럽과 미국의 학문 및 서구사상에 눈을 뜬 그는 활발한 언론 및 저술활동으로 당대의 여론과 국가의 나아갈 바를 결정한 탁월한 경세가(經世家)였다. 후쿠자와는 1885년 3월 16일 자신이 창간한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실은 ‘파괴는 건축의 시작이다’라는 글에서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했다. 서양만이 문명의 총화라고 여기고 동양에 결별을 고했던 후쿠자와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한다)’를 추종한 덕분에 일본은 아시아에서 먼저 전근대를 탈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정체성에는 큰 혼란을 가져왔다.
최근 일본사회의 화두는 ‘환태평양 전략적 경제동반자협정’ 즉 ‘TPP’의 참여 여부다. TPP를 둘러싼 일본 사회의 논쟁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한국경제에 매몰당할 것이라는 경계심 때문이다.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아예 TPP 참여를 ‘제2의 개국’과 같다며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면서 패배주의에 빠진 열도 전체를 뜯어고칠 유일한 대안이라고 여론 몰이에 나섰을 정도다. 아시아를 부정하고 서구를 지향했던 일본이 이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뼈저린 학습을 마치고 ‘탈구입아(脫歐入亞)’로 회귀하려는 이런 모습이 왠지 애처롭기만 하다./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