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9일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이 일반에 공개됐다. 중명전은 1897년 러시아 건축가 세레진 사바친(1860~1921)의 설계로 건립된 황실도서관이었다. 원래는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황제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사용되며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인물이 바로 한국 근대 서양건축의 비조(鼻祖)로까지 일컬어지는 사바친이다. 서대문의 독립문과 정동 러시아공사관, 덕수궁 석조전을 비롯한 우리나라 근대 주요 서양건축물을 설계한 그는 1895년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하게 시해되는 장면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서양인 2명 가운데 하나였다. 1905년 11월 17일 오후 덕수궁 중명전은 완전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포위된다.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한 일본의 압박 때문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자 곧이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하려는 조약체결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1905년 10월 27일 내각회의에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지배할 것을 결의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해 11월 10일 그 결정을 고종에게 통보한다.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서 대신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조약체결이 절대로 불가하다고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학부대신 이완용은 강대국인 일본의 요구에 따를 수 밖에 없지 않느냐며 조약체결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토가 군대를 이끌고 개입하자 권중현, 이근택, 이지용이 이완용의 의견에 동조했고, 결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이들을 대표해 조약에 조인한다. 일제가 강압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은 이들 5명 대신의 찬성으로 체결될 수 있었다. 을사조약 체결에 참여한 이들 5명이 매국노의 대명사가 된 ‘을사오적’이다.
을사늑약에 대한 백성들의 충격은 ‘을씨년스럽다’란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컸다. ‘날씨나 분위기 따위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을씨년스럽다’는 바로 ‘을사년(乙巳年)스럽다’가 변한 말이다./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