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5일 대통령이 통일세를 제안했다. 통일의 중요성과 장기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면에서 분명히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현 상황에서 과연 이러한 제안이 시기적으로 적절했던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한반도 통일에 관한 절대적 명제는 반드시 평화통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력에 의한 통일은 안 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한 쪽의 붕괴에 의한 흡수통일 방식도 연구결과는 물론 독일통일 사례로도 입증됐듯이 천문학적 통일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대북화해협력 기조는 북한 경제를 끌어올려, 남북합의에 의한 단계적 평화통일을 통해 비용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도 결국 북한의 비핵화가 실현되면, 북한 주민소득을 3천불로 끌어올려 통일비용을 줄이자는 취지 아닌가?
통일세 제안이 있은 지 두 달 이상이 경과한 지난달 21일, 남북협력기금운용과 관리를 위해 설치된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가 38억원을 통일재원 연구와 공론화를 목적으로 하는 남북공동체 기반조성 사업을 위해 쓰기로 의결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문제는 남북협력기금을 통일재원 연구와 공론화 사업을 위해 쓸 수 있는가 하는 법적 근거이다. 정부는 지원가능성을 ‘기금법’ 제8조 제6항인 “그 밖에 민족의 신뢰와 민족동동체회복에 이바지하는 남북교류·협력에 필요한 자금의 융자·지원 및 남북교류·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사업의 지원”을 들고 있다.
그러나 ‘남북협력기금법’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남북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른 남북간의 상호교류와 협력을 지원하는데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남북협력기금법’의 모법이라 할 수 있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제2조4항은 ‘협력사업’에 대한 정의를 “남한과 북한의 주민(법인·단체를 포함)이 공동으로 하는 문화, 관광보건의료, 체육, 학술, 경제 등에 관한 모든 활동을 말한다”고 돼 있다. 남북간의 협력사업에 한정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협력기금을 통일재원 연구에 쓰겠다는 것이다. 통일방안, 남북공동체 형성에 관한 연구를 위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문제 관련 연구소의 연구과제도 지원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그동안 협력기금에서 지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통일재원 연구가 특별한 이유는 대통령의 통일세 제안에 대한 후속조치라는 것 밖에 없다.
정부는 이번 공론화 사업을 국민 각계각층의 의견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통일문제 만큼 사회적 합의가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는 협력기금을 사용할 수 있는 명분이 못된다.
엄연히 헌법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설립돼 있다. 관련법 제2조를 보면 민주평통은 조국의 민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정책의 수립 및 추진에 관해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해 통일에 관한 국내외 여론수렴, 국민적 합의도출, 범민족적 의지와 역량의 결집 등의 기능을 수행하게 돼 있다. 이런 기능을 활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통일세가 북한의 급변사태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의심을 사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세 공론화 사업이 “남북교류·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사업의 지원”에 해당될 수 없다.
더구나 8·15 경축사의 통일세 제안에 대해 북한은 이틀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이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통해 통일세 제안은 “전면적인 체제대결 선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무엇보다도 남북협력 지원사업에 한정돼야 할 협력기금을 남북화해와 협력을 원하는 국민을 대상으로 통일세를 공론화하겠다는 발상은 국민을 무시하고 현재의 대북강경정책을 지속하겠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
통일재원연구와 공론화를 위한 사업이 꼭 필요하다면 남북협력기금이 아닌 총리실 산하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활용한다든지, 연구사업을 위한 예산을 따로 확보하면 된다. 왜 법적 근거도 없고, 명분도 없는 과제 수행비용을 남북협력기금에서 조달하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그동안 통일부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도 못해, 협력기금 집행율이 4%미만인 상황에서 이런 일들을 하겠다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통일부는 통일세 공론화보다, 남북간 상호 신뢰 복원을 통해 남북교류협력을 확대하는 방안부터 강구해야 한다./문희상 국회의원(의정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