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곡 수확이 한창인 어느 시골마을의 풍경, 촌로들이 쉬엄쉬엄 낫으로 베어온 조 이삭을 적당히 건조시킨 다음 뜰에 깔아 놓고 트랙터를 이리 저리 몰아가며 탈곡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조선시대 우리 옛 어른들이 사용하던 방법 그대로다. 다만 소가 트랙터로 바뀌고 소에 매달아 굴리던 돌이 자동차 바퀴로 대체 됐을 뿐이다.
이 밖에도 잡곡재배는 기계화가 이뤄지지 않아 거의 수작업에 의존하고, 심겨지는 품종 역시 재래종이 주를 이루는데 그나마도 많이 혼종돼 균일한 품질을 바랄 수 없는 실정이다.
경지의 효과적 이용정도를 가늠하는 작부방식은 오히려 더 후퇴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중기에 이미 중부이남 지역의 밭농사는 잡곡을 중심으로 2년 3작 혹은 1년 2작의 알뜰한 이용체계를 갖췄으며 이는 당시 세계적으로도 모범적인 경지이용 방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현재는 농촌인력 감소때문에 다모작이 가능한 지역에서도 1년 1작의 단순한 작부체계로 토양산출력의 지속적인 유지와 증대를 기대하기 힘들고 잡곡 생산성의 경쟁력 측면에서도 한계를 나타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재배면적 역시 조의 경우 과거 남·북한 합쳐 최대 79만7천㏊가 재배됐다는 기록(1941, 조선총독부 농업통계)이 있어 벼, 보리, 콩과 더불어 주식으로서의 위치를 점한 시절도 있었으나 현재는 1천㏊정도로 위축돼 있는 실정이다. 또한 가공·유통분야에서도 시중에 유통되는 잡곡생산물은 대부분 쌀과 섞어 먹는 혼합잡곡형태로 판매되고, 수입산과의 차별성도 모호할 뿐만 아니라 품질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설정돼 있지 않은 관계로 생산 및 수급 전반에 걸쳐 열악한 수준이며, 식량자급율 역시 팥 20%, 녹두 26%, 조 48%, 수수 39% 등 잡곡류 평균 26% 정도로 저조하다.
그런데 이러한 식품소비 시장의 구조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귀하디귀한 쌀을 절약하기 위해 끼니때마다 조, 기장 등 잡곡밥을 지어 먹고 도시락 검사를 하던 시절은 옛말이 돼 버렸고, 잡곡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과자류는 훨씬 인기가 좋게 판매 되고 있으며, 쌀보다 몇 배나 비싸게 판매되는 것을 감안하면 잡곡은 이제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식품이 아니다.
이는 잡곡생산성이 쌀보다 낮고 공급량이 격감한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소비 트렌드가 영양공급 차원의 식단에서 건강기능성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증거로써 소비자들 성향이 식이섬유가 많이 함유된 저칼로리 식품을 선호하는 쪽으로 큰 변화를 이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수수 전곡에 함유된 식이섬유는 약 21%로서 현미의 7배 정도의 함유량을 가지고 있다.
식이섬유 뿐만 아니라 잡곡에는 현대인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심장질환, 당뇨, 치매 등 성인병 예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미량원소나 폴리페놀류를 비롯한 생리활성 물질을 다량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기능성 식품소재로서의 효용성과 함께 농가 소득작물로 크게 부각되고 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잡곡산업 발전을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추진 중에 있다.
잡곡생산이 소규모·다수농가 생산구조로 경영규모가 영세한 문제점을 개선해 생산성 증대와 유통비율을 줄이기 위해 전국적으로 잡곡주산단지를 선정해 생산·가공·유통이 일원화 된 집단화단지를 육성함으로써 지역중심으로 키워나가는 강한 체제를 도입하는 한편, 잡곡이 보유한 다양한 건강기능활성을 농식품산업과 연계시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연구를 강화해 소비확대를 통한 수급안정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다양한 용도의 잡곡 품종이 육성되고 있으며, 기계화에 필요한 재배기술 및 부가가치가 높은 가공기술이 속속 개발되고 있어 잡곡이 농가소득과 국민건강증진에 기여하는 미래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시기가 앞당겨질 것으로 기대된다./남민희 농진청 국립식량과학원 기능성작물부 기능성잡곡과장